1. 우선순위가 확실치 않다.
완벽주의는 완벽을 추구한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잘못되면 완벽해지지 않는다. 어차피 100점이 되어야 완벽하니 99점이나 10점이나 다 기각된다. 그렇다면 사소해 보이는 1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1점이 모자라서 0점 처리가 되면 더 억울할 수도 있으니 작은 것도 신경을 쓴다. 세부적인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 일의 가볍고 무거움이 구분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신경도 안 쓰는 작은 일도 완벽을 이루는 꼭 필요한 조각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다.
일은 중요성이나 급한 정도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급한 일은 하루만 지나도 연체료가 붙는 마감일의 세금이 있다. 세금을 내는 것이 꼭 내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건 아니지만 만약 오늘까지 처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니까 급하게 처리해야 한다. 중요도는 필요성과 가치가 있다. 취업을 위해서 토익시험 점수를 내야 한다면 토익시험공부는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토익 점수가 내 삶에서 큰 의미를 지니거나 가치가 높다고 하진 않다. 가치는 안식일을 지키는 종교인이나 현실적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지키는 의리, 성공을 포기하고 대신 선택하는 좋아하는 일이나 이념 같은 게 있다. 의리는 사는 데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큰 가치를 부여해서 그에게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정하고 어떤 일을 할지 취사선택을 할 때는 이런 일의 급한 정도, 중요도(필요성, 자기 삶에서의 가치)를 고려한다. 급하고 중요한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고, 그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완벽주의라는 필터가 적용되면 이 판단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작은 일이거나 심지어 무의미한 일에 꽂혀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심리적으로는 강박적인 성향이 동기가 된다. 강박적 성향은 완벽주의와 비슷한 의미이다. 정신의학/심리학에서 완벽주의는 정식으로 등록된 용어가 아니다. DSM이라는 정신과 진단 매뉴얼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완벽주의라는 단어는 없고 그 자리를 '강박성 인격'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강박성향은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 아니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확실성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문을 100번이나 잠겼는지 확인하고, 손을 두 시간 동안 씻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둑이 들거나 큰 병이 걸리기 때문에 그런 재난을 막는 그 행동은 비현실적이지만 무시할 수 없다. 도둑과 질병을 피하려는 마음은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먹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기승을 부린다.
동기가 재난이나 질병 등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있다. 이 두려움은 ‘혹시?’라는 질문으로 어떤 것도 가볍게 버리지 못하게 한다. 시험을 보는 사람인 경우, 혹시 내가 이거 비중이 낮다고 안 외웠다가 시험에 나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식이다. 이러니 알아봐야 시험에 별로 쓸모없는 잡지식은 많이 한다. 그러나 핵심과 버릴 것을 구분을 못하기 때문에 아는 것, 노력한 것과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다.
이를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지금은 동료들에게도 존경받은 정신과의 사이며 정신과의사로서 성취도 어느 정도 이룬 분이 있다. 그가 예전에 4년 차 수석 전공의 시절에 학술대회 현수막을 만들어야 했다. 그는 글자 폰트와 색깔, 왼쪽 오른쪽 경계선 등등 너무 고심하면서 아래 연차들이 작성해 온 디자인 안을 수정에 재수정을 했다. 모두 완벽하고 아름다운 현수막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의 멋진 현수막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학술회의를 하는 시간과 장소가 빠졌다. 새로 제작할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A4지에 매직 손글씨로 시간과 장소를 써서 스테이플러로 찍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저게 뭐야 하고 한번 보고는 더 이상 신경도 안 썼을 것이지만. 그 볼썽사나운 모습은 그에게는 너무나 고통이었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의 사례도 있다. 나도 완벽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완벽주의가 있다. 프로그래밍에 호기심이 많아서 하다 보니 나중에 사업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런투런'이라는 이름의 공무원시험용 앱을 서비스하고 있다. 특허도 몇 개 받았고 기존과 다른 (혁신적인, 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방식으로 구동하는 앱이다. 기존의 앱은 종이에 나와 있는 방식을 폰에 옮긴 것뿐인데, 런투런 앱은 기출문제를 풀다가 관련된 노트 내용을 보게 하고 반대로 노트를 보다가도 연결된 기출문제를 불러와서 풀도록 했다. 틀린 문제의 경우에도 같은 문제를 그냥 외우는 게 (이게 화장실에서 봤던 문제야...라는 식의 기억으로 외운다는 의미) 아니라 문구를 조금씩 다르게 하고 순서를 바꿔서 제시를 해서 확실히 개념을 잡지 않으면 풀 수 없게 했고, 이 부분에서 특허를 받았다. 나중에는 미국 특허까지 받았다.
여기까지 보면 너무 그럴듯하다. 그런데 앱 서비스 초기이다 보니 오탈자나 문제 오류 관련 지적이 들어왔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사안이라서 이용자들에게 보상을 주었다. 그런데 이미 오류신고가 된 문제라면 다음 사람에게 또 보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문제는 이미 오류신고가 되어서 보상이 안된다'라고 하면 사람들의 들어올 항의가 신경이 쓰였다. 타인의 비판이 신경이 쓰였다. 그때는 내부개발자가 있어서 그에게 이미 신고가 된 여부를 알게 하도록 했다. 즉 문제를 불러올 때 한번 더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해서 모든 문제의 오류신고 여부를 확인해서 표시가 되도록 했다. 문제앱이면 문제가 안정적으로, 빠른 속도로 잘 불러오게 하는 게 기본인데, 당시 내게는 '일부 이용자'의 도덕적 비난이 신경이 쓰여서, 오류신고 여부 표시와 안정적 구동이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그 결과는 공무원 시험 직진 트래픽이 증가할 때 앱이 다운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시험 직전의 서버다운으로 전 직원이 잠도 못 잔 건 당연하고, 사업을 거의 접을 뻔하기도 했다. 물론 이 문제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적잖이 기여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시행착오를 거친 탓인지 다행히 현재는 잘 서비스가 되고 있기는 하다.
너무 공감이 되는, 그러나 공감이 되지 말았어야 할 서버다운 공지.
나중에 이런 일이 생긴 배경을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배경에서 말 바꾸는 게 나쁘게 다가왔고, 진료하는 과정에서 다른 말하는 상사나 거래처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내게는 말 바꾸지 않기가 큰 가치였고, 솔직히 잘 작동하는 앱의 기능과 보상이 있다는 공지를 보고 오류신고했는데 다른 말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할 그 장치의 무게감이 거의 똑같게 느꼈다. 이런 문제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비슷한 실수를 할 것 같다. 그리고 완벽주의가 있는 많은 분들에게서 똑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비록 자기 머리는 잘 못 깎긴 했지만, 남의 머리는 잘 깎는 중처럼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나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와드리기도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급성(급한 정도), 중요성(필요성, 가치)의 점수를 매겨 시간이나 공을 더 들여야 할 일과 나중에 하거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한다.
이미 이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완벽주의가 있다면 그 구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다른 관점의 존재가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중시하는 의견이라면, 가치를 중시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선순위 결정은 한 번에 이뤄지기보다는 시작 전에, 중간에, 마무리할 때 여러 번에 걸쳐서 할 수도 있다. 일이란 게 멀리서 볼 때 하고 막상 진행될 때 하고 많이 달라지고 다르게 보인다. 실제로 시작 전에 중요했어도 나중에는 그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에 맞춰 조절해야 한다.
완벽주의는 두려움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실제로 일어나기 힘든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과도한 관심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때 논리적 가능성과 현실적 가능성을 구분하면 도움이 된 것 같다.
논리적 가능성과 현실적 가능성의 경우에도 내 얘기를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다.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진 여자분이 있었다. 몇 년 동안 기분이 '안 좋지 않았던 날'이 없었고 항상 무표정에 가까운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분도 실제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만 '혹시'하는 완벽주의적 걱정으로 힘들어했다. 내 설명은,
"내가 논리적으로는 가수가 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안되지 않을까요?"라고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는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너무 이해가 잘 된다며 활짝 웃는다. 그녀에게서 전에 본 적이 없는 그런 밝은 미소였다.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내 기분이 살짝 미묘해졌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가수' 대신에 대통령으로 예를 바꾸었는데, 가수를 예로 들었을 때보다는 감칠맛이 훨씬 떨어진다.
손을 씻지 않아서 큰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이 문제 하나를 더 풀지 않아서 1점 차이로 재수를 해야 할 수도 있고, 그걸 안 해서 계약에 깨지거나, 인연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는.
그러나 그런 희박한 논리적 가능성 대신 실제로 그런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살펴보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수가 되는 논리적으로만 가능한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하던 일이나 잘 하고 살면 되는 현실적 가능성을 따른다. 완벽주의 필터가 입혀지면 이 두가지 가능성이 혼동이 온다.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처럼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 단순한 가능성의 설명만으로 품지 않아도 되는 불안감을 가진 분들이 많이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