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함
한창 김연아 선수가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전 국민이 피겨 스케이트 전문가가 되었고, 트리플 악셀이라는 전문용어도 점심시간 식사 자리에서 나올 정도였다. 만약 김연아 선수가 없었다면, 누군가 트리플 악셀이라는 용어를 써도 아무도 관심도 없고, 그걸 한 시간을 두고 설명을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스케이트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일반인들이 그걸 이해하고 올림픽 참여 선수들의 트리플 악셀을 평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그게 가능했던 건 김연아 선수가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완벽하지 않은 게 완벽주의의 현실이다. 완벽은 못 가본 세상이고, 저 너머의 세상이다. 매일 완벽해지려는 내면의 압박에 시달리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완벽해지는 지 알 수 없다. 쉬지도 못하고 종종 걸음으로 어딘가를 가려 하지만 정확히 그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고 안 가도 되는 건 아니고 압박감이 약해지지도 않는다. 못 가보고 경험하지 못한 세상은 완벽한 모습은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해결책은 두 가지이다. 완벽한 대상을 찾아서 닮으려는 모델링과 현실에 없는 것을 마음 속에서 채우는 상상이다.
모델링은 그나마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으니 막연함이 덜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 대상으로 다가가는 길이 막연하다. 백종원 씨처럼 설탕을 많이 넣는 식의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 맛은 안 나온다. 참 쉬워 보이지만 내가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모델링은 할지언정 더 필요한 타인의 피드백은 사절이다. 짝사랑은 상대와 상관없이 맘대로 할 수 있어서 진짜 사랑보다 좋다. 모델링은 내가 알아서 하면 된다. 내 식대로 변형을 해도 된다. 그런데 피드백은 아프다. 남에게 싫은 소리 듣기는 너무 싫다. 이미 마음속에서 충분히 내적대상(내 마음속에 사는 비판적 인물들)에게서 충분히 비난을 받았는데 '새삼 외부인들에게까지야', 하는 게 그들의 마음이다. 피드백은 내가 한 일을 거울로 비춰보기이다. 거울로 비춰 보려 하지 않으면 닮을 수 없다.
모델링의 대상도 없을 경우에는 더 막연하다. 눈에 보이지 않은 사람을 그리려는 시도와 같아서 그림이 그려지지도 않지만 그린다고 해도 실제와는 다르다. 옛날 사람들은 사람들이 날아가는 상상을 하면 모두 새와 같은 날개를 만들어서 날려했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 난 사람은 신화에서나 존재했고, 처음으로 날았던 라이트 형제는 날갯짓하는 새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2. 막연함이 우리의 성취에 미치는 영향.
완벽주의는 우리가 한 일을 두고 '이건 아냐'라는 평가는 내려줄 수 있지만, '그럼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는다. 지금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려주지만, 대신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답은 없다. 한걸음 더 나갈 수도 다 내려놓고 나갈 수도 없다. 항상 뭔가 하는 것 같지만 진짜로 확신을 갖고 일을 진행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으니 한다. 개인에게서도 나타나고 큰 조직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럼 어떻게?라는 질문이 해결되지 않은 일은 어떤 일일까?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라기 보다는 내면의 갈등을 다루기 위한 면피용 일이다. 불안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속이기도 하고, 비난을 피하거나 예산을 더 타기 위해서 남을 속이기도 한다.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다스리는 일들은 어떤 영향을 줄까?
- 그 일들은 어차피 제대로 되지 않을 거 뻔히 알고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은 열정은 고사하고 자신이나 남을 제대로 속이려는 성의도 발휘하기 힘들다. 기대와 희망을 갖고 어떤 일에 달려들 때와 실체가 불분명한 완벽주의의 압력에 떠밀려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할 때는 현실과 마음에 주는 파급력이 다르고 마음으로 그걸 안다.
- 자책이 이어진다. 특히 자신을 속일 때는 나쁜 의도로 속이려는 게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줄이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 속임은 눈 가리고 아웅이고, 효과도 좋지 않다. 속임이 효과가 좋다면 그건 망상이다.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심하게 손상되지 않은 일반인의 범위 내에 있다면 그 일의 용도를 안다. 현실에 적응에 도움이 되는 일을 제대로 안 한 거 아니까 스스로 칭찬을 해줄 수 없다. 자기에게 관대한 성향이라면 몰라도 엄격한 완벽주의자들은 심하게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스스로에게 욕을 먹고 있으니 견디기 힘들다.
- 그러면 새로운 일을 할 때 무의미하고 비난이 예정된 그런 일 하는 게 어떨까? 부담스러울 것이다. 물론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특히 새로운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쉽지 않아요' 정도일 것이다.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하거나 막연함이 클수록 부담감은 커진다. 하던 일은 어찌어찌 이어가겠지만 새로운 일은 쉽지 않다. 설사 그동안 잘해 왔다고 해도 확신이 없다. 완벽주의적인 잣대로 봐서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갔지만'이다. 그럼 그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는 잘 하지만 새로운 일 시작은 고역이다. 완벽주의가 심했던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난다.
'내 인생은 매번 찍어서 어느 정도 점수가 나오는 객관식 시험 같아요. 그런데 뭐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오답 노트를 만들어 주지 않으니 같은 문제가 나와도 매번 원점에서 새로 찍는 느낌이에요'
듣고 보니 이번에는 살아남았지만 다음에는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안 되는 러시안룰렛 같았다.
- 마지막 종착점은 회피이다. 회피의 다른 말은 미루기이다. 완벽주의에서 미루기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며 책으로도 몇 권이 될 정도이다. 그 사람에게 시도는 성취를 위한 걸음이 아니라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안 하면 못 난 모습을 한번 더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안 하면 성취도 없다. 그건 안다. 그런데 그 성취의 달콤함은 작다. 성취는 어떻게든 평가절하가 될 터이다. 그러나 실패나 못난 모습의 노출과 확인은 너무 끔찍하다. 돈이 덜 벌려도, 승진이 덜 되어도 좋다. 그에게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상의 상실을 잘 포장해 줄 논리가 잘 갖춰져 있다. 합리화는 그에게 너무 익숙한 무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