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의 어려움.
완벽주의자들의 성취는 낮지는 않다. 이 책에서는 완벽주의가 성취에 미치는 부정적인 얘기를 주로 했기 때문에 성취도가 낮을 것 같지만 노력을 하기 때문에 높은 편이다. 다만 확실히 스스로 만족도는 낮다. 기대치가 매우 높고, 잠재력이나 쏟아부은 자원의 양에 비해서 성취가 모자라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서 양가감정이 실린 태도가 나온다. 한편으로는 높은 기대에 못 미치니 자존감이 떨어지고 반대로 어느 정도 실적이 나오기 때문에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이 애매모호한 지점에 존재하기 때문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한다. 아예 자존감이 높으면 남이 어떻게 보든 편하게 남에게 모르는 것을 질문도 하고 부탁도 할 수 있다. 아예 그 반대면,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 자존심은 상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마치 야구에서 빗맞은 타구가 외야수 두 명 사이에 떨어져서 운 좋게 안타가 되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자존감의 위상으로 부탁을 하는,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힘들다.
게다가 역할 전도는 부자연스럽다. 부탁을 주로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역할로 바뀌게 되면 어색하다. 못할 일을 하는 것 같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 실제로는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될 관계지만 편치 않다. 힘들어도 오래 경험하고 적응이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데 새로운 역할은 파악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완벽하게 불편하다. 고려해야 할 사항도 많고, 여러 가지 돌발 변수를 다 고려해야 하고, 상대의 반응(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형성된 그 사람의 표상, 내적대상이라고 앞선 글에서 설명)도 확실치 않다. 이렇게 불편한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주말 내내 고생을 해서 일을 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주의자들은 앞선 글에서 얘기한 대로 일은 시키면 잘하면서 거절을 못하는 성향 때문에 주로 남에게 부탁을 받는다. 인정욕구와 자신의 완벽성을 확인하기 위한 심리 때문에 거절도 못하는 상황에 부탁은 더 어려운 일이다. 완벽주의자에게 부탁은 하객으로 참여하려고 해도 너는 언제 결혼하냐는 식의 얘기가 부담스러워서 참여가 고민이 되는데 결혼식 사회를 맡아달라는 식이다. 심리적으로도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데다가 이런 얘기를 많이 해본 적이 없으니 어색하다.
이 어색한 마음 때문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부탁을 할 거면 상대가 일정이나 사정을 조정할 수 있는 시기에 미리 하면 되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급하게 부탁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부탁을 하면 큰 일이 아닐 수도 있는, 동료 간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당직일자 변경이나 근무 조정 같은 일이 본의 아니게 무리한 부탁이 되어버린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이 한번 발생되면 부탁이란 게 피하고 싶은 일이 되어 버려서 또다시 미리 편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무리를 해야 하는 악순환의 연쇄반응이 작동된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부탁이 이런 무리스러운 부탁으로 전환되는 반응을 거치게 되면 부채의식이 생겨 일의 크기만 보면 항상 손해가 되는 거래를 하게 된다.
완벽주의자가 체감하는 부탁의 크기 =
실제 일의 크기 x 상대의 대응 준비 기간 x 완벽주의자의 심리적 부담
이런 방정식에서 실제의 일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기간이나 본인의 심리적 부담이 크다.
완벽주의자의 부탁 = 실제 일 (10) x 기간(90) x 부담 (200) = 180,000
상대의 부탁 = 실제일 (90) x 기간(10) x 부담 (1) = 900
조금 과장되어 보이지만, 이 식대로라면 남들의 몇 배의 일을 해주고, 항상 마음은 편치 않다. 사실 이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아예 모르는 건 아니기 때문에 왠지 불만스럽다. 그러나 상대 앞에서 가서 얘기하다 보면 또 그 사람에게 설득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왠지 아름다운 잉그리드 버그만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완벽주의자의 부채 의식은 심각하다. 남에게 빚지고 못 사는 게 완벽주의자이다. 자기애적인 성향이면 남에게 빚지는 게 일상이며, 사이코패스라면 빚이라고 생각도 안 할 텐데, 자주 그러는 것도 아니면서 빚지는 게 싫다. 그래서 선물도 싫어하는 분들이 많았다. 작은 화장품 샘플이라도 하나 받으면 그걸
-적당한 시기에 (그런 시기란 건 없는데)
-자연스럽게 ( 어떻게 해도 내가 하면 어색해)
-보답할지 (보답 적립은 이미 너무 많이 되어서 더 이상 누적도 안되는데, )
- 어떻게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는 거 다 보이는구먼)
고민한다.
이런 일은 윗사람한테 뿐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도 불편하다. 어떻게든 욕먹지 않은 상사나 부모, 선배가 되려고 애는 쓰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나중에 어딘가에서 일이 꼬이면 관계는 그때 더 나빠지니 이미지 신경 쓰는 게 소용도 없다. 그냥 조금 뻔뻔하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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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완벽주의로 고생하는 분들을 보면서 책으로 한번 내어볼까 하는 구상을 하고 현재 준비중입니다. 여기 원고에서 제시된 문제들에 대해서 책에서는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혹시 질문이나 의견이 있다면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like로 표현해주시는 관심에도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