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우울증은 사실 누구나 평생에 한 번씩은 다 경험을 했을 정도로 흔한 현상이다. 질병 통계에서 봐도 중독과 더불어 가장 빈도가 높다. 대략 15% 정도까지 보고 있다. 즉 4인 가구 기준으로 두 집에 한 명 정도는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상이 있다.
우울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자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기본적이다. 자기가 못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매력이 없는 사람이든 낮게 본다. 앞날도 밝은 미래와는 거리가 멀고, 주변 사람들도 나 말고는 다 잘 사는 것 같고, 내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을 것 같다. 자신을 못난 사람으로 볼 때, 못. 났. 다. 는 판단 기준이 꼭 사실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완벽주의 경우에는 그렇다.
완벽주의자들은 항상 목표를 높게 설정한다. 그리고 그의 만족도나 자책감은 실제 성취와 무관하게 이 기준으로 평가한다.
만족도 = 실제 성취 / 기준
이다. 기준이 낮으면 성취가 좀 낮아도 만족도는 높지만, 기준이 높으면 아무리 큰 성취를 해도 만족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에서는 기준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설정되어 있으므로 이를 만족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완벽주의자들은 우울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우울은 갑자기 사업이 망하거나 실연을 당하거나 할 때처럼 갑작스러운 우울이기보다는 평생을 두고 길게 이어온 성격과도 같은 우울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럭저럭 잘 지냈거나 반대로 겉으로는 잘해 나가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인다. 내면의 기준에 따라서 우울한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좋아지거나 나빠지기보다는 늘 그렇다. 늘 그러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반복되는 일상이라서
"지금 힘들어" , "나는 왜 이럴까?"
가 아니라,
"사는 게 그렇지", "다른 사람은 별 다르겠어?"
이다.
이런 우울은 또 그다지 심하지도 않다. 평생의 사랑을 잃고 죽자 사자 한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나 기능이 급격히 저하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가랑비에 옷 젖듯 표시도 잘 안 난다.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서 그 역할 연기조차도 완벽하게 잘 해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경우 더욱더 그 사람의 우울이 드러나지 않는다.
"남들은 내가 이런 줄 모를 거예요"
이런 우울을 성격적인 우울, 기분부전장애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영어로 하면 큰 일을 겪고 죽자 사자 하는 우울이 depression이면, 이런 우울은 dythymia로 구분해서 부른다.
이런 우울에다 큰 일을 겪어서 우울해지면 dysthymia + depression이 겹쳤다고 해서 double depression이라고 한다. 이중우울이다. 완벽주의자들에게 큰일이 닥치면 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참다 참다가 이런 순간에 이르러서야 병원 치료를 받는다.
이런 우울이 있는 사람들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큰 일을 겪고 우울한 사람들은,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빨리 원래대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라고 하지만,
이런 우울에 빠진 사람들은
"지금이 더 힘든 건 사실이지만, 우울증이 좀 낫는다고 해서, 그렇다고 살만한가요?"
이다.
돌아갈 목표 지점이 없다. 갈 곳이 없으니 어디론가 갈 수 있는 연료는 약물치료나 면담으로 충전이 가능해도, 방향이 없으니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두 번째는
"내일 아침에 편안하게 눈 뜨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
는 심정이다.
힘들어 보여도, 아닌 사람들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라고 한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미련도 없다. 이룬 것,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있어도 와닿지 않는다. 이룬 것, 가진 것을 또 하려니 그 반복이 너무 괴롭다. 마음 깊이의 공허감이 채워지지 않고, 내일이 오늘과 다를 바 없다면 그게 권태다. 그 권태는 물 잔뜩 먹는 솜처럼 그 사람을 짓누른다. 여기서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잊을 수는 있다. 그게 뭐든 중독적이다. 좋아서 중독이 아니라, 금방 내성이 생겨서 더 큰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행을 떠나도 결국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 권태의 본질이 잘 드러난 장면. (영화 인턴. 로버트 드니로가 여행에서 돌아오는 장면)
그런데 만약 그 비현실적인 기준을 충족시킨다면? 물론 기준이 충족되었으므로 아닐 때에 비해서는 덜 괴롭다. 그런데 만족을 할까?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바닥에서 그 정도 있었는데 이런 정도의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게 문제인거지, 이 정도의 결과를 냈다고 해서 자랑할 만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마음이다. 만족시켜도 우울해진다. 게다가 그런 일은 매번 반복되기 힘들다. 그러면, ‘그럼 그렇지’라는 마음으로 이전의 성공과 성취를 평가절하한다. 그런데 또 '만약'을 동원해서 그가 반복적으로 성취를 한다면? 그럼 만족하기보다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지친다. 이제는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현재의 성취에 안심하지 못한다. 그게 된다고 해도 그는 무리한 목표설정과 수행 그리고 성취의 무한반복 회로를 돌고 있다. 그 무한반복하는 쳇바퀴의 결과는 번아웃이고, 견딘다고 해도 내일 아침에 편하게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는 마음이다.
완벽주의자가 우울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쳇바퀴에서 내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쳇바퀴에서 달리는 사람의 눈앞에는 달콤함 미끼가 있고, 뒤에는 넘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달콤한 미끼가 내게 생각만큼 도움이 안 되고, 그 두려움은 무시해도 되는 허상이라는 걸 깨달을 때 거기서 내릴 수 있다. 내리면 어디로 갈까? 귀농을 하거나 욜로(YOLO; you live only once)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필요하면 뛰고 쉬고 싶을 때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쳇바퀴로 용도 변경하는 것이다.
실제로 임상에서 완벽주의자들이 완벽주의에서 벗어났을 때, 삶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면이 변화가 크다, 삶을 부담스럽고 무섭게만 여기게 했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가 달라진다. 하는 일이 재조정되고, 완급조절을 한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달라진다.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상하고, 주변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만족도가 달라지고, 성취를 덜 해도 괜찮을 때는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대신 단순히 ‘괜찮다’고 하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끝낸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상관없다. 달라진 건 쳇바퀴의 방향과 그 쳇바퀴의 속도를 조절하고 정지시킬 수도 있는 스위치를 자신이 갖는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너무 충분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