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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N잡러 Sep 10. 2020

나는 일벌레 혹은 돈벌레

하루 쓰리잡, 보험사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며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의 역할을 하던 주인공은 벌레가 되어버렸고, 그의 가족들은 그를 ‘벌레 보듯’ 쳐다봤다. 소설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어릴 적, 소설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이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내가 죽도록 일만 하게 되자, 그 소설이 오랜 세월을 뚫고 나왔다. 더 이상 주인공이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이 벌레로 변할 것만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나의 하루는 보험사의 세미나실에서 시작되었다. 알람을 듣고 일어나거나, 나의 상사이기도 한 친구가 나를 깨우러 왔다. 지워진 화장만 대충 채우고 아침 조회에 참석했다. 내 가방에는 클렌징 폼, 클렌징 오일, 고데기 등이 들어있었다. 지금 당장 며칠간 여행을 떠나도 문제없을 수준이었다. 여분의 옷과 편한 신발도 챙겨 다녔다. 졸린 눈으로 아침 조회를 마치면 곧바로 회사를 나섰다. 소송 준비를 비롯하여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 회사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친구 때문이었다. 우선 친구가 자리 잡고 있었고, 내 사정을 아는 친구가 편의를 봐주기로 해서다. 실적이 그대로 월급이 되는 곳이라 영업이 중요했지, 회사에 오래 앉아있는 걸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서 기본수당을 받을 정도로만 일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오전에만 회사에 가고 백 얼마의 월급을 받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다.


오후에는 학원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논술을 가르쳤다. 쉬는 시간 없이 최대한 시간표를 빡빡하게 채워, 많은 반의 수업을 맡았다. 주말에는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수업했다. 원장 선생님이 수업을 더 맡을 수 있냐고 물어오면 시간표를 이리저리 짜보며 시간을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밥시간이 생길 리 없었다. 가끔 아이들이 늦게 오면 그 시간에 김밥 한 줄을 먹었고, 대부분은 단백질 셰이크를 우유에 타 먹었다.

단백질 셰이크를 인터넷으로 주문할 때 문의글을 이렇게 남겼다.

“단백질 셰이크를 먹으면 배가 부르나요? 저는 다이어트하려는 게 아니라, 식사 대신 이용하고 싶어서요. 꼬르륵 소리만 안 나면 돼요.”

조용한 수업시간에 꼬르륵 소리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여러 번 배꼽 알람이 울렸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이어트 중이라고 둘러댔다.


밤부터 일한 곳은 강남에 있는 호프였다. 호프 서빙 아르바이트는 아침 조회만 하면 되는 보험사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논술강사로 일했던 학원처럼 시급이 세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고, 더 일할 수 있는 시간대는 밤과 새벽시간뿐이었다. 그래서 늦게까지 여는 곳이 많은 대학가와 번화가 중에 일할 곳을 찾았다. 집 근처이기도 한 대학가에서 일하면 편했겠지만,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보험사와 가까운 강남역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곳에서는 오전 5시까지 근무했다. 


이 일이 가장 힘들었다. 보험사에서는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논술강사 일은,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라 괜찮았다. 하지만 호프 서빙은 그렇지 않았다. 웃으며 서빙해야 했지만 웃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억지웃음을 짓고 있느니, 차라리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편이 나았다. 세 가지 일 중 가장 오랜 시간 그곳에서 일하면서 억지로 웃는 법을 배웠다. 경련이 나도록 미소 짓고 일했고, 잘 웃는다는 칭찬을 받았다. 지금도 어딜 가든 잘 웃는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나의 장점이란다.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가면처럼 지었던 미소가 습관이 된 것이다.


나는 겉으로만 웃고 있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 벌레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호프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일만 하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일벌레라... '일'에 '벌레'를 붙인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구나. 일만 하는 고독한 인간. 통장에 월급 들어오는 그 하루를 위하여 나머지 30일가량을 일하는 사람, 아니 벌레. 그게 나였다.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소설 ‘변신’의 결말을 떠올렸다. 나는 다른 결말을 낼 수 있을까.


서빙 일이 끝나면 1시간 거리인 집에 갔다가 출근하기에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곧장 보험사로 가서 아무도 오지 않을 세미나실 책상에서 엎드려 잤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매일 청소하러 오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혹시라도 나가라고 할까 봐 항상 자는 척했다. 시끄러운 청소기 소리에도 나는 미동이 없었고,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른 일자리도 찾을 수 있었다.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월급도 늘었다. 이제 세미나실 대신 종종 찜질방에서 잤다. 시설 좋은 여자 수면실이 있는 곳도 찾았다. 더 편하게 잘 수 있었지만, 두세 시간 후면 일어나야 하는데 알람도 못 듣고 자기 일쑤였다. 그럴 때는 상사인 내 친구가 방패막이해줬다. 그 친구는 이것 말고도 꽤나 나의 편의를 봐줬는데, 문제는 ‘나만’ 그렇게 봐주다 보니 회사에서는 우리 둘이 사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나는 급할 때마다 이 친구에게 돈을 자주 빌렸는데, 친구의 이름을 따서 ‘OO론’이라 불렀다.


‘00론 백만 원만 대출해주세요. 상환 날짜는 기약이 없습니다.’

이 친구는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친구이지만, 회사에서 상사로 있다 보니 내가 가장 많이 폐를 끼친 친구이기도 하다. 나 대신 참 많이 혼났다. 지금도 가장 미안해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보험사를 나왔다. 영업만이 답인데, 다른 직원들이 영업하러 나가는 동안, 나는 집안일을 처리하느라 동분서주했기 때문이었다. 내 고객은 친구들이었다. 보험료가 곧 월급임에도 친구들에게 비싼 보험료를 내게 할 수 없었다. 수십 가지의 특약 중 실비보험만 넣은 보험 계약서를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이삼만 원대의 보험료가 나왔다. 그러니 월급이 많이 나올 수 없었다.


한 친구는 이모부가 보험회사에 다녔다. 이미 친구네 가족은 이모부로부터 여러 번 보험 가입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가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 친구는 어머니에게 내 이야기를 했는지, 동생의 남편에게도 들지 않았던 보험을 나를 통해 가입했다. 친구와 동생 두 명까지, 3개나 가입했다. 가입하기 전 주문이 있었다. 모든 병이 보장되는 빵빵한 보험으로 20년만 보험료를 내면 되는 보험으로 가져오라고. 중복되거나 말도 안 되는 특약을 빼고 20년 납으로 보험을 설계했다. 나중에 친구의 친척 언니도 내게 보험을 가입했다. 그 언니는 압구정 비싼 식당에서 밥도 사줬다.


내가 벌레로 변신했다 해도 쓸쓸하게 죽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내 곁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받기만 하는 나를 항상 챙겨주고 걱정해줬다. 만약 내가 벌레가 되었다면 내게 집을 만들어주고, 먹이도 가장 좋은 걸로 주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세 개의 일과 소소한 부업들을 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들 덕분이었다. 나의 결말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벌레가 된 그녀에게는 아늑한 집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밟힐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유기농 먹이도 항상 집에 가득했습니다. 먹성 좋던 그녀를 생각한 가족과 친구들의 배려였습니다. 그녀는 벌레가 되었지만, 여전히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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