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을 읽고
몇 년 전 알게 된 친구에겐 눈에 띄는 구석이 있었다. 노란색. 인스타그램 계정 이름에도, 팔에도, 가방에도, 노트북에도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노랑 리본들이 보였다. 궁금했다. 어떤 죽음을 오래도록 기억하려 드는 건 당사자성, 그러니까 나 혹은 나의 주변의 일이라고 느껴야 한다. 타인의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연민하고 애도할 순 있어도 일상에 침투하여 변화를 만들지 못하기에.
친해지고서 넌지시 물었다. 도처에 널린 게 죽음인데 왜 이 사건에 유독 커다란 관심을 가지느냐고. 그는 말했다. 참사가 일어났던 해에는 잘 몰랐다고.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큰 관심이 없었다고. 여러 책을 읽다가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되어 무지함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무관심함이겠다.
접점 하나 없는 타인의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 그 노력은 꽤 다정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두려움이었다.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그들을 기릴 수 있을까. 사려 깊은 사람이나 깨어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어느 정도 이용하려 드는 건 아닐까. 세상의 진전을 위하여 최소한 귀라도 기울였다고 합리화하며.
무엇보다 애도와 소비의 경계선을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테마파크처럼 완전히 놀이에 초점을 맞춘 상업적 시설만 소비되는 게 아니다. 특정 목적을 위해 꾸며진 공간, 특히 기쁨이든 슬픔이든 극적인 요소가 담긴 곳은 그 자체로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다녀온 사실을 SNS에 올리면, 그야말로 종지부를 찍는다고 느꼈다. 인증샷을 찍고 공유하는 행위 전체를 매도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보여주고 전시해야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인지할 가능성이 생김을 분명히 안다. 슬픔을 나누려는 시도이기도 하겠고. 다만 나는 그 의도와 목적보다는 염려가 더 커서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 알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기억하고. 이게 훨씬 진정성 있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다 작년과 올해, 매년 4월 16일경에 기억교실을 찾는다던 그와 동행했다. 기꺼이 기록하고, 보여주고, 알리는 것이 가져오는 힘을 경험하고 싶어서. 작년보다는 올해 더 나아졌다. 복원된 교실을 사진으로 찍어도 괜찮다고 느꼈으니까. 그 이유는 아주 조금이나마 연관성을 찾아서겠다. 생일이 똑같은 희생자의 책상을 발견했어서.
자그마한 교집합. 그 하나만으로도 잊힐 이름은 한 번 더 불리고, 기억에 새로 남음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니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 만 명이 죽은 여섯 사건 각각의 근원지를 열어볼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어가며 깨알 같은 교집합을, 유대감을, 만나게 되리란 걸 알았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고민했다. 여기에 담긴 여행을, 그러니까 집단 학살이 뒤덮은 자리의 흔적을 탐방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연민을 품거나 동정하고 싶진 않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말했듯이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래서 통속적인 처방이 내려지는 법이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기억? 기억한다는 건 말 그대로 그 사건의 경위와 가해자와 피해자와 발생 시기를, 다른 말로는 숫자와 이름들을 외운다는 것인가. 모든 걸 한낱 인간에겐 불가능하다. 그리고 의문이다. 이름과 숫자들을 암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인가? 책의 끝자락에서는 익명의 이름들과 숫자들을 기억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의미 있다고 말하려면 모든 사건 사고에 반응하며 기억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일부 '유명한' 사건들에 반응하는 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일종의 관광지가 된 아이러니함과 비슷하다고 본다. 흔적을 없애야 한다거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것으로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일부에만 적용될 사항을 뜻깊은 의미나 의의, 혹은 깨달음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결국 사건들의 본질을 꿰뚫으면 어떤 사건도 소외되지 않고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점을 책에서는 『타인의 고통』속 일부 문장을 인용한 후에 덧붙인다.
그러한 일들은 어느 날 우주에서 떨어진 미치광이 몇 명이 저지른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p.87-88
우리는 일이 발생하면 원인부터 찾는다. 이것저것 지적하는 건 많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정확히 무엇이 얼마큼의 크기로 영향을 끼쳤는지 정량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책임소재를 물을 누군가들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증거 없이는 아무 효력이 없는 사법체계 안에서는 판결로 사건은 일단락한다.
그러나 내심 우리는 알고 있다. 이건 비슷한 일의 종결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거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은 사건이 언제든 나에게 발생할 수 있다. 타인의 사건과 타인의 고통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곧 잠재적으로 내게 닥쳐 올 고통이다. '나'의 일 앞에서는 사람이 어찌나 적극적인가.
눈에 뻔히 보이는 접점은 없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보이는 대로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굴러가던가. 일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데에서 시작된다. 일면식 없는 존재들과 맞닿은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세상 모든 비극을 엄중히 직시한다. 남의 일이라서 쉽게 입 밖으로 내뱉는 연민을, 단숨에 사그라지는 안타까움을, 이제는 보내야 할 때다.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독서 후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