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금호영아티스트 배헤윰 개인전《 플롯탈주 PLOTLESS 》
생존은 모든 생명체의 목표이지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은 그 미션에 조금 더 복잡한 반응을 보인다. 미지의 세계는 두렵다. 게다가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낯섦이라면 생존의 위협까지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이 상황에 대비할 방법이 있다. 바로 ‘라벨링’이다. 인간은 예부터 알 수 없는 것이 등장하면 이름을 붙였다.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형상이 없는 생각, 느낌 따위에 이름을 입히면 불확실함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지울 수 있다.
실체가 없어도 언어는 존재한다. 덕분에 나 혹은 타인의 상태를 진단하고 적절한 대처 방식을 찾는다. 이때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한다. 실체의 환영을 실체의 본질이라고 여겨, 대상을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플롯도 같은 속임수를 만든다. 사건이나 흐름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는 스토리텔링과 달리 플롯은 논리적 구조가 있다. 전자가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라면, 후자는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씩 얻어 전체를 완성한다. 영화, 소설, 미술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재미에 앞서 ‘안정감’이 존재하는 셈이다.
다만 구분 선이 필요하다. 추상회화는 결이 다르다. 캔버스 안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감상자는 갈피를 잃는다. 이 선과 면이 어떤 사물을, 어떤 감정을, 어떤 상태를 가리킨단 말인가? 느낌을 따라 어느 하나를 짚어본다. 아마 기쁨을 형상화한 것 아닐까? 확신은 없다. 실체가 보여도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탓이다. 불확실함과 안정감, 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혼란스러움. 배헤윰 작가의 《플롯탈주 PLOTLESS》 전시를 예로 들어 그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전시는 2021년 4월 30일부터 6월 6일까지 개최될 《2021 금호영아티스트》 2부를 바탕에 둔다. 금호미술관은 매년 공모 프로그램을 통해 신진 작가의 개인전 개최를 지원한다. 이번 금호영아티스트는 네 명의 작가를 1 부와 2 부, 각각 두 명씩 선보인다. 배헤윰 작가의 전시는 미술관 3 층에서 만날 수 있다. 리플렛을 들여다보면, 공간은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 공간은 1부터 7까지, 안쪽은 8부터 16까지, 작품 수는 총 열여섯 점이다. 첫 번째 공간으로 들어선다. 코팅된 나무 바닥과 흰 벽. 고개를 들면 천장 가운데에 정렬된 조명들이 보인다. 작품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고 공간 자체를 밝게 조성했다. 덕분에 전시장의 크기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다. 천장이 낮아서인지 2m 에 가까운 캔버스의 크기가 놀랍지 않다.
걸음을 옮겨 작품 번호를 순차적으로 따라가 본다. 캔버스의 크기는 아주 크고, 작고, 조금 크고, 아주 크다. 위치도 제각각이다. 어느 것은 바닥에 가까운 곳에, 또 다른 것은 정중앙에 자리한다. 그림의 옆면에 다가가자 차이점을 발견한다. 어느 그림은 옆면까지 빼곡히 채워냈고, 또 어느 그림은 완성 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제작연도가 뒤죽박죽이다. 즉 스토리가 아닌 플롯을 이룬다.
다만 이야기의 발화방식은 언어가 아니다. 선, 색, 면 등 어떤 형상들의 조합이다. 캔버스 안팎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잘대지만, 감상자가 파악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 <혼밸>, <혼류>, <전-울가미>. 작품의 제목에서도 힌트를 얻기 어렵다. 이러한 환경에 맞춰 전시장에 부유하는 언어가 바뀐다. 명확함 대신 모호함, 직설 대신 비유, 글자 대신 이미지. 이쯤에서 전시회명을 다시 들여다본다. PLOTLESS. 플롯 없음이 아닌 플롯 탈주. 플롯의 부재가 아니다. 존재를 인정하되 그 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몇 작품을 통해 그 ‘탈주’를 확인해본다.
작품 번호 4, <글 모르기 모험 II>는 전시장 입구를 마주한 곳에 걸려있다. 천장보다는 바닥과 가까운 작품이다. 감상자는 자연스럽게 위쪽의 분홍과 파랑을 먼저 눈에 담는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건물의 아치와 기둥 형상이 보인다. 작품이 걸린 위치도 한몫하지만, 붓의 흔적도 하나의 작품을 두 공간으로 분리하도록 돕는다. 중앙의 가로선을 기준으로 새파란 바다와 분홍 모래를 닮은 위는 수평의 필체가, 건물의 기둥 같은 아래는 수직의 필체가 보인다.
기둥 사이를 자세히 보면, 어딘가 낯익다. 분홍색, 산맥, 건물의 실루엣. 위쪽에서 보았던 대로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색이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둘로 쪼개진 작품 간의 연결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순서를 모른다. 선후 관계를 파악하고자 형상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핀다. 아랫부분은 건물의 기둥이 아니라 벽지를 뜯어냈다고 봐야 할까. 위쪽 파란 산맥에 두터운 붓 터치가 뭉쳐있으니 여기를 시작점으로 봐야 할까. 혹은 두 공간이 동시에 펼쳐진 것인가. 말할 거리는 풍성하지만, 순번을 매기지 못한다. 이 같은 닮음과 변형은 작품들 사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글 모르기 모험II>에서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이동하면 <전-울가미>를 마주한다. 분홍과 파랑으로 이루어진 산맥과 노란색 위의 둥근 아치가 낯익다. 앞서 보았던 작품의 조형 요소가 조금씩 바뀌었다. 두 개의 작품을 포함한 다른 다섯 점도 비슷하게 변주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전에 보았던 작품이 청사진처럼 그려진다. 특히 산맥 같으면서도 아이스크림 같은 뾰족한 뿔 모양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공간에서 7 개의 작품을 순번대로 보고, 감상자는 깨닫는다. 작가가 끊임없이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알 수 없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이미지는 발화자마다 다른 해석을 내세운다.
안쪽 전시장도 같은 전개 방식일까. 호기심을 품으며 이제 조금 더 넓은 공간으로 들어선다. 천장이 이전보다 1.5 배는 높고, 전시장 세로도 훨씬 길다. 캔버스의 크기는 비슷하다. 높이와 너비 모두 100~200cm 안팎을 오간다. 전시장은 앞서 말했듯 문자, 글, 확실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지로 말한다. 작품 밖 여백도 작품의 연장선이 되는 것이다. 해석의 자유도가 시각적으로 늘어났다. 남은 8점의 작품 중 전시의 끝과 맞닿은 14, 15, 16번째 작품으로 플롯의 결말을 살펴본다.
<쵸키>와 <쫓기>는 각각 14, 15 번째 작품이다. 제목을 연달아 보자, 당장에라도 입을 열어 소리 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의 유사성이 보인다. 이전까지는 캔버스를 헤쳐 다니면서도 머릿속을 떠다니는 느낌을 모호한 언어로 추측하는 것에 그쳤다. 적어도 지금은 작품 간의 유기성을 눈으로 인지하며 안도한다. 연두색 언덕과 까만 길, 둥근 아치 속 파란 주둥이 같은 형상 하나, 그와 조금 떨어져 있는 형상 둘. 배치와 질서가 연작이라고 느낄 만큼 닮았다. 색채의 쓰임은 어떠한가. 마치 <쵸키>에서 쓴 물감만 팔레트에 얹어 <쫓기>를 그린 것 같다. 감상자는 내내 불확실한 세계에서 구체화할 수 없는 플롯을 따라가다가 언어를 마음껏 발화할 기회를 얻는다.
마지막 작품은 이전의 모든 형상을 색과 면으로 구성하여 수평으로 눕히기도, 수직으로 세워두기도 한다. 문득 첫 번째 공간의 분홍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응집된 이야기가 아니라 공간마다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었음을 깨닫는다. 전시 동선에서도 분리의 흔적이 있다. 첫 번째 공간을 반시계방향으로 구성하여,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때 이동 통로를 마주한 벽에서부터 걷게 한다. 감상자가 작품 간 거리보다 긴 구간을 걸으며 새 플롯을 만날 준비를 마치도록 말이다.
두 개의 플롯, 언어와 형태, 분명함과 불분명함. 키워드는 모두 파악했다. 이제 전시를 나가며 우리가 얻은 것, 혹은 잃은 것을 살펴볼 때다.
관념이나 추상처럼 불분명한 것들은 어렵다. 형태를 지닌 추상은 더욱더 어렵다. 감상자는 무언가 알 것 같은 느낌에 이런저런 말을 던진다. 그리고 확인을 받고 싶어 한다. 맞는지, 아닌지. 묻는 자도, 답하는 자도 희미한 확신이 최선이다. 추상의 힘은 바로 그 모호함에서 나온다. 누구도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기에 어떤 이야기든 포용할 수 있다. 이와 정반대인 언어는 확실하다. 우리의 감각으로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안정과 안주는 한 끗 차이다. 인간은 안정을 느끼면, 그 자리에 머물기를 택한다. 확실한 것에 익숙해진 몸은 불확실한 세계를 들여다볼 시도조차 잊는다. 우리가 잊었던 감각은 딱 들어맞는 퍼즐 조각이 하나도 없을 때 돌아온다. 불안, 집중, 번뜩이는 눈과 기민함. 정형화된 틀 밖으로 나가야만 살아있는 감각을 깨닫는 우리 인간. 비로소 추상과 똑 닮은 형상이 된다.
2021년 학교 평론 과제로 제출했던 글.
오렌지 라벨을 칠해둔 파일 뭉치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글의 서문이 라벨링으로 시작한다.
3년 전. 2021이라는 숫자가 까마득하게 낯설다. 하지만 이 날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마스크로 꽁꽁 막힌 입. 바짓단을 끈적하게 적신 비. 기분이 썩 꿉꿉했다. 그런 내 옆엔 그애가 있었다. 항상 그랬다. 내가 무얼 하자, 가자, 보자 말했고 그애는 군말 없이 좋다고 했다. 좋아하지 않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나에 관한 것이라면 그냥 좋아해줬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시장 전경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글에 담긴 첫번째 사진. 바닥, 벽, 작품, 조명 따위가 보이는 평범한 전시장. 다른 하나는 이것저것 찍기 바쁜 카메라, 화면 정가운데에 쏙 들어와 나를 물끄러미 보는 얼굴. 그애는 영영 모를 테다. 그애가 보고 싶을 떄마다 그 사진을 들여다 봤던 것을.
이제 시간이 꽤 흘렀다. 나는 그애의 목소리가 흐릿하고, 말투도 가물가물하고, 얼굴을 떠올리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날, 그애의 머리칼은 기억에 남는다. 축 가라앉은 머리가 유난히 곱실댔다. 아마 비가 와서 그랬을 테고. 그애는 가장 좋아하던 셔츠를 입었다. 아이보리도, 레몬도, 화이트도 아닌 오묘한 색. 사부작대는 소리를 그애가 자랑하듯 들려줬다. 언젠가는 칙칙, 제가 좋아하는 셔츠에 제가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더니 칙칙 칙, 내게도 향수를 뿌려댔다.
나는 꼭 에프킬라를 뒤집어 쓴 것처럼 질색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향수는 돈 낭비라고 생각했다. 낭비 뿐이랴. 세상 많은 게 불만스러웠고,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많았고, 삶이 징글맞다고 느꼈다. 비판과 비관 사이를 헤매다가 절망에 허덕이고, 희망을 잠시간 맛봤다가 다시 비관하고. 홀로 요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다 지나간 일.
내가 기억하는 건 지금의 내가 보는 그때의 나, 그때의 그애, 그때의 우리이다. 지금의 내가 변한 만큼, 혹은 그 이상 달라졌겠지.
생각은 파도 같은 거랬다. 기억도 그 일부니까 비슷하리라. 잠시 밀려왔다가 서서히 쓸려가고, 그렇게 끝없이 무언가가 오고 가고. 내게 찾아온 순간을 가벼이 맞이하다 보면 눈치도 못 챌 틈에 이전 것은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이 차오른다. 이렇게, 얽매임 없이 그저 흐르게만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