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기만 하고 끝이라면 오죽 편할까. 패키지가 아닌 "자유"의 맛을 알아버렸고, 이른 살 엄마까지 필수 멤버로 함께 하는 여행에서 가족 중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는 자(그게 바로 나)의 준비는 끝이 없다. 기존의 신분을 내려놓고, 일정 기간 여행자의 신분이 될 삼모녀를 위해, 떠나기 전 준비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두 가지가 아닌 것 중 당당히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음식'이다. 적어도 삼일에 한 번, 한식을 먹지 않으면 위장에 가시가 돋는 엄마를 고려해 캐리어 한 구석에는 비상식량이 자리 잡는다. 컵라면, 고추장, 누룽지, 김치.
한민족의 얼을 담고 있는 위와 같은 식량 외에도, 여행지에서 삼모녀는 보물처럼 숨겨진 한식당을 찾아낸다. 꾹꾹 참다가 터져버리는 풍선처럼, 어딘가 어색한 타지의 음식들을 담다가 더는 안 되겠다는 선언을 한 후, 한식당을 찾아간다.
"정말 안 되겠어서 그래. 소화가 안 돼서 한식을 먹어야 된다니까. 한식당 어디 있는지 좀 찾아봐."
"현지에 왔으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 외국에서 한식이 얼마나 비싼데... 촌스럽게, 엄마 때문에 정말 못살아."
라고 말하며 타박하지만, '나는 참을 수 있는데, 엄마 때문에 가는 거야!'를 핑계로, 한식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설렌다. 한국보다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하지만 그 한 끼로 지금까지 먹은 음식들로부터 구원받는다. 솔직히 말하면, 여행 중 음식으로 힘들어하는 건 내가 더 심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실 더 못 참는 건 너잖아 ㅎㅎㅎ"
"그건 그래 ;;;; 된장찌개 엄청 당기네.."
떠날 곳을 정하는 역할 담당자인 엄마는, 우리가 떠나기 1년 전부터 발트 3국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디를 가던 여행의 첫 시작 의식으로 "여행책 구입하러 서점 가기"를 실행하는 삼모녀이지만, 우리가 발트 3국 여행을 계획하던 때에는 정확히 딱 1권의 책만이 출판되었을 때이다.(물론 지금은 발트 3국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들이 많이 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빌뉴스, 첨탑의 도시 리가,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탈린.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웅장해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한 권의 발트 여행책과,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을 향한다는 이상한 여행객의 자부심을 가지고
발트 3국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무슨 맛인지 이미 알고 먹는 음식에서, 먹는 것 마저 새로움인 여행지에서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익숙함'이라는 맛이 빠져버린 음식은 그 자체가 여행이 된다. 그래서, 오래전 맛본 타지의 음식 사진을 보면 그 맛과 느낌, 식당의 분위기, 그것을 먹으러 가기까지의 여정이 동시에 떠오른다.
작고 소중했던 빌뉴스, 리가, 탈린을 지나 남다른 거대함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삼모녀 여행객이 도착했다. 다른 유럽 국가보다는 낯설지 않았던 음식으로 심각한 어려움은 없었지만, 여행 시간이 길어질수록 짜고 깊고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그리워지는 향수의 시간이 숙명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발견한, 시래깃국!
자유여행을 하며 놓치게 되는 역사지식, 기타 정보에 대한 필요를 가이드 투어를 통해 현지에서 보급한다. 패키지여행에서는 가이드님이 계시니 여행자가 따로 준비할 투어가 없지만, 자유여행에서 현지 가이드 투어는 한정된 여행 기간을 더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귀한 수단이다.
역사적 이야기가 많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삼모녀는 행군에 가까운 거리를 걸으며 알찬 가이드 투어를 경험했고, 현지 유학생이었던 가이드님이 들려주신 수많은 역사적 이야기, 기억해야 할 왕들의 일대기, 러시아정세, 기타 등등에 대한 정보 중 단연 으뜸은 한식집 정보였다.
삼모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식집 '엄마네' 정보를 수집했고, 투어 종료와 동시에 그곳으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인생 최고 한식집 시래깃국이라 추억하는 맛을 먼 타지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시래깃국, 나는 비빔밥, 언니는 김치볶음밥을 주문했고, 이윽고 나의 최애 엄마표 시래깃국 국물 맛을 먼 타지 러시아 북서부 도시에서 만나게 되었다.
맛집을 취급하는 반경이 넓어졌다. 동네 맛집, 지역마다 있다는 유명 맛집, 인스타에서 핫하다는 맛집... 그리고 상트페테르 맛집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