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 그렇다고 영어가 모어도 아니고…
책을 읽다가 종종 '이걸 한국어로 알기 쉽게 옮기려면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오늘은 Öffentlichkeit (영어의 public과 비슷한 말)를 옮길 단어를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공중(公衆)' 보다 더 나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기존 세대가 쓰는 말을 잘 모르는 정도가 심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있어서, 이런 말을 쓰면 상당수 사람들이 잘 이해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중(公衆) 대신 공중(空中),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곳'밖에 떠오르지 않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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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대중을 겨냥해 쓰인 책일지라도, 다소 학술적인 내용을 다루는 책에는 한자어가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적인 학문은 거의 다 서양에서 들어왔고, 기존에 동아시아 문화권에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개념들이 한자를 이용해 번역되었습니다. 바로 앞 문장에 나오는 '근대(近代)'라는 말도 영어로 modern이라 하는 개념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지요. 심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어로 Psychologie, 영어로 psychology 라 하는 것을 번역한 말입니다.
한자 자체는 모르더라도, 한글로 써 놓은 한자어에서 각 글자가 어떤 뜻의 한자인지를 알면 모르는 한자어를 보아도 어느 정도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해, 지중해 등의 단어를 통해 '해'가 바다를 뜻한다는 걸 이해하고, 독립군, 일본군, 군인, 군대 등의 단어를 통해 '군'이라는 글자의 뜻을 이해하면 해군이라는 말을 접했을 때 바다의 군대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흔히 접하는 말일수록 이게 잘 되겠지만, 접하는 빈도가 떨어지는 말일 때는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 세대가 이 부분에 취약한 것 같습니다. 주로 접하는 매체 환경이 변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기껏 한국어로 번역을 해 놓은 출판물이 있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예시로 어느 심리학 책의 한 부분을 살펴봅시다.
대부분, 과학, 핵심, 현상, 원인, 결과… 한자어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부분의 핵심적인 낱말인 "귀인"에 주목해 봅시다. 한자 병기가 되어있지 않지만, 아마 저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귀'가 회귀, 복귀, 귀환 등에 나오는 '귀'와 같은 '귀'이고, '인' 은 원인, 인과 등의 단어에 있는 '인'과 같은 '인' 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귀인이 무슨 뜻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귀인(歸因)'이라고 한자를 병기해 놔 봤자 큰 도움이 안 됩니다. 80년대 극 후반 생인 저만 해도 아는 한자는 얼마 안 됩니다. 중학교 때는 한자반 컴퓨터반 중에 컴퓨터반이었고, 고교생 때는 이과였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병기된 한자를 이해하기 위해 옥편을 봐야만 합니다. 옥편을 일일이 찾아보는 수고를 덜기 위해 한자 병기뿐만 아니라 그 한자의 뜻까지 같이 풀어 써놔야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말까 할 것입니다. 옥편 찾아보는 법을 모르는 이들도 드물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가물가물하여 찾으라 하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attribution이라고 영어를 써 놓는다고 해도, 그게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어를 몰라서 번역본을 보는 거니까요. 난처한 상황입니다. 서양 언어, 대표적으로 영어가 우리말이 아니고, 그래서 그 언어를 터득한 이들에게 번역을 맡기고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읽으려 하는데, 젊은 세대에게는 점차로 이마저 온전히 읽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먼 옛날부터 추상적인 개념을 가리키는 말을 중국에서 들여와 활용해 왔습니다. 근대화 시기 부터는 서양 개념을 일본 학자들이 한자어로 번역한 것들도 밀물처럼 들어왔지요.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많은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자어가 없으면 이야기의 주제가 조금만 추상적이어도 전혀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방금 쓰인 '주제(主題)'만 해도 한자어죠. 한자어가 우리말에서 차지하는 비중(比重)은 너무나 커서, 한자어를 제거(除去)한 한국어는 성립(成立)이 불가능(不可能)합니다. 결국 한자어 어휘력이 확보되거나 영어 실력을 매우 높게 끌어올리지 않으면 어느 정도 지적 수준이 있는 글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는데 현저한 지장이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전에 출판된 지 좀 오래된 퇴계 이황에 관한 책을 산 적이 있는데, 한자로 쓰인 단어가 너무 많아 읽지 못하고 그냥 책장에 꽂아둔 적이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한자어를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한자어가 많은 책을 읽을 때도 '아, 못 읽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지적 활동을 위한 어휘들은 통상 대규모 문명이 생긴 곳, 규모 있는 지역 단위 (예컨대 동아시아라든지 하는 단위) 문명의 중심지에서 만들어지게 되고, 문명의 주변부에 위치한 한반도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중심부에서 만들어져 나온 개념과 어휘들을 수용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 창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정도에 그치겠지요. 옛날엔 그게 중화문명과 중국 언어-한자였고, 지금은 그게 서구 문명과 라틴문자권 언어들, 대표적으로 영어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에는 여러 학술 분야에서 많은 영어 단어를 사용하며 조사만 한국어로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단어가 한자어이고 조사만 한글이던 60-70년대 이전 책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한자에서 영어로 바뀌었을 뿐인 형국이지요. 주변부 문명 사람의 처지란 이렇게 좀 처량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歸因理論은 社會心理學의 主要槪念으로…"에서
"Attribution theory는 social psychology의 주요 concept로…"가 되었을 뿐
"까닭 찾기 얘기는 사람 모여 살이의 마음 배움에 있어 못 빼놓을 생각으로…"처럼은 안 되는 거죠.
물론 꼭 저렇게 '순수 우리말' 같은 걸 고집하려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런 태도야말로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집착으로 문제 삼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요점은, 우리말이 지적 활동을 위한 어휘를 스스로 가진 언어가 아니라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기존에 한자어로 해결하던 지적 세계로의 접근을 더 어린 세대로 갈수록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문제적이고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있고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말도 있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중심부 문명의 언어를 직접 습득해 그 분야를 공부하지만, 한국 대중의 말은 한국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젊은 대중의 말이 제한되면 그들의 지적 지평이 좁아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