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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May 31. 2023

12년 입은 팬티를 퇴역시키며

얼마 전 12년째 입고 있던 팬티가 뜯어져서 버렸습니다. 12년을 충실히 일해줬으니, 정말 장한 팬티입니다. 이렇게 오래가다니, 정말 질 좋은 제품이죠? 근데 제가 이 팬티를 산 속옷 가게에 가서 주인장께 "지난번에 여기서 산 팬티를 12년이나 잘 썼지 뭐예요! 그래서 또 사러 왔어요!"라고 말하면 주인장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팬티가 너무 오래 가면 많이 팔 수 없으니까요. 


이 상황은 우리 인류가 현행의 경제체제 속에서 겪는 딜레마를 잘 보여줍니다. 기후 위기가 정말로 닥쳐와버린 현시점에서, 인류가 실천해야만 하는 대응책은 궁극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모든 생산활동이 결국은 온실가스 배출과 연관되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산물의 종류마다 온난화 기여 정도는 다릅니다만, 그렇다면 온실효과를 크게 초래하는 생산물부터 서둘러 생산과 소비를 줄여야겠죠. 


뭐든 적게 만들어서 더 오래 쓸 수 있다면 사실 좋은 일일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혼자 산다고 생각해 봅시다.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열심히 움막을 만들었는데, 이 움막이 1년을 버텨주면 한 번 만들면 1년간은 다시 움막 짓느라 고생을 안 해도 되고, 그 시간을 다른데 쓸 수 있지만, 6개월밖에 못 버틴다면 6개월 만에 다시 지어야 하고, 그 시간과 수고를 다른 데 쓸 수 없게 됩니다. 팬티도 하나 만들어서 12년 입는다면 몇 장 만들어서 돌려 입다가 12년 후 그게 해지고 떨어지면 12년 만에 다시 만들면 되지만, 3년밖에 못 버틴다면 3년마다 새로 만들어야겠죠. 


그런데 우리의 현행 경제체제에서는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팔아야 경제가 잘 돌아갑니다. 더 많이 팔려면 당연히 더 많이 소비되어야겠죠. 하지만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우리가 지금 직면한 심각한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사진 출처 


사진 출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팔고 더 많이 소비해야만 하는 경제체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여서 더 튼튼하게 더 오래 가게 만들어서 되도록 적게 생산하고 적게 팔고 적게 소비해도 좋은 그런 경제체제를 만들어 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논의는 대중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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