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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Sep 03. 2023

출산율 반등은 힘들지 않을까



올해 2분기 출산율 통계가 발표되면서 또 한 번 저출산 주제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저출산 대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다양한 원인들이 추측되고 또 확인되고 있습니다.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고 또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대책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세워지겠지요. 그 대책들은 크고 작은 정도로 출생률 반등에 기여할 것이고요.


다양한 원인분석과 대책마련들이 지금 시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젊은 세대가 아이를 안 가지는데, 왜일까, 뭘 하면 (해주면) 될까,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살아온 지난 삼십 년의 세월 전체가 이들이 결혼을 잘 안 하고 아이를 가질 생각을 잘 안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출산율 0.7을 보도하는 뉴스 영상의 아래에 달린 댓글 중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옮기진 않고 내용만 얼추 옮겨보자면: "돈 많은 분들이 많이 낳아서 자식들 청소부도 시키고 배달도 시키고 변호사도 시키고 대통령도 시키세요. 왜 안 낳는다는 사람들에게 낳으라고 난립니까."


제가 예전 글들에서 했던 이야기랑 통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젊은 세대는 생존의 문제가 충분히 해결된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다수의 경우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정도는 충분히 공급받으면서 "넌 공부만 열심히 해!" 같은 소릴 들으며 자랐습니다. 부모세대는 '나는 먹고살기 바쁘고 학교 다닐 돈이 없어서 못 배우는 바람에 이렇게 힘든 일 하고 살지만, 내 자식은 잘 먹고 잘 입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학교도 다니고 학원도 다니니까 당연히 명문대 나와서 전문직이나 대기업 사원 정도는 충분히 할게 틀림없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사고에 당연한 전제로서 깔려있는 생각은 직업에는 귀천 내지는 높낮이가 있고, 낮은 직업은 가난하고 높은 직업은 부유하다는 것입니다.



「남들만큼의 고원」

https://brunch.co.kr/@huruk/23


「지방소멸 관련 단상」

https://brunch.co.kr/@huruk/24


「우울증 최적화 사회」

https://brunch.co.kr/@huruk/28


작가가 “좋은 부모” 라 생각하는 이에게도 “저 사람” 은 나와는 다른 계급이고 내 자식이 그 계급이 될 리 없다는 사고방식이 당연하다는 듯 깔려있다.


이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전혀 건드려지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지났고, 아이들은 귀하고 높은 위치에 가기 위한 경쟁을 하면서 자라났고, 그것이 사회의 당연한 형태인 줄로 알았으며, 사람들은 경쟁은 자연적이며 정당하고, 경쟁의 공정성만 최대치로 확보하면 사회는 완벽하게 정의로울 것이라 여겼습니다.


아이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내달려오면 그 끝에 있는 건 경쟁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얼마나 열심히 뛰었든 간에 결국 누구는 패배해서 천하고 낮은 위치에 가고, 누구는 이겨서 귀하고 높은 위치에 가게 된다는 현실이었지요. 물론 대다수는 패배를, 소수만이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 소수의 승리자들마저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는 패배감을 안고 살고 있겠지만요.


2등 고교에 간 학생은 자신을 1등 고교에 못 간 학생으로 여기게 되고, 3등 고교에 간 학생은 자신을 2등 고교에 못 간 학생으로 여기며, 4등학교 학생은 3등학교 못 간 학생, 5등학교생은 4등학교 못 간 학생으로 여기게 됩니다. 모두가 자신을 못난 사람으로, 실패자로 여기게 됩니다.
— 「우울증 최적화 사회」中


좌절감, 패배감, 우울감을 일으키는 삶을 살아온 결과로,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제 결혼할 의욕도, 아이를 갖고자 하는 마음도 잃어버린 상태인 게 아닐까요?


죽기 살기로 경쟁해서 저 높은 곳 위에 올라가 앉는 것만이 가치로운 것으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그런 시선을 습득하며 자라났는데, 자라고 나서 보니 자신은 사회에서 그토록 무가치하게 취급되고 존중받지 못하는 낮은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처질까요? 자기 자신을 만족스러워 할 수도 없겠죠. 나는 무능하고 한심해, 나는 사람들한테 무시받을 거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울 테니까요.


인생이 어차피 이렇게 우울한 거라면, 뭘 해도 어차피 부족하고 못났을 뿐이라면, 결혼과 자식 낳아 기르기 같은 무겁고 어려운 일을 왜 하겠어요? 서두에서 언급한 댓글은 그런 울분을 드러내고 있는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소부, 배달부 무시하지 않았냐. 너희 잘난 사람들이 애 낳아서 청소부 시키고 배달부 시켜라. 니 자식이 그런 거 하는 건 싫어? 그럼 다른 사람한테 낳아달라고 하지도 마.”


평범한 소시민 부모 밑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그 평범한 소시민이 되는 것은 망함이고, 실패라고 여겨지는 걸 보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자신도 그런 시각을 내면화했겠죠. 그랬으니 자신이 평범한 소시민이 되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보통의 삶을 모욕한 대가는 자식의 불안으로 남을 뿐이다.
(…)
아이들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듣고 온갖 자극 글귀를 읽으며 (요즘은 글귀뿐만 아니라 공부 자극 영상, 동기부여 영상 등도 많은 듯 합니다 - 후룩) 당연히 드라마 속의 커리어 우먼이나 비즈니스 맨이 되는 미래만을 그린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이들이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며 평범한 직장에서 을의 삶을 마주한다.
드라마 세트장 같은 곳에서만 살 줄 알았던 이들이 어린 시절 자신이 무시했던 삶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
은근한 차별과 멸시를 품고, 치킨 배달을 하지 않기 위해, 공장에서 미싱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그 속에는 배움에 대한 유희와 호기심은 없다. 무시와 추락에 대한 불안을 동력으로 공부하고, 불안이 줄어들면 자극 글귀를 찾으며 불안을 충전할 뿐이다.
(…)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며 내뱉던 말들이 자식을 만성적인 불안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
그렇게 해서 원하는 곳에 닿으면, 만사가 형통할까? 차별과 멸시에 대한 공포로 얻은 성취에는 '오만'이 뒤따른다. 다른 내면의 힘 없이 오만만 증식되는 건 안전장치 없이 고층빌딩 위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 추락에 대한 공포감만 커질 뿐이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中


작금의 초저출산율은 경제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큰 다른 부분은 우리 사회가 보통의 삶을, 보통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상호 경쟁을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제시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경쟁의 장에 놓인 아이들에게 추락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경쟁 참여를 유도해 온 결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생기를 잃게 된 탓이지 않을까요?


출생률 하락의 다른 원인들은 지금 어떻게 하는 것으로 제거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고 해도, 이 과거, 지금까지 살아온 삶, 그 삶의 경험은 더 이상 손대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출생률 폭락의 원인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라면 현재의 조치들로 출산율을 반등시키는 데에는 어쩌면 이미 정해진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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