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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Oct 28. 2023

이어받을 선대의 의지가 없는 후대

최근 제가 수련과정을 하고 있는 정신분석가 조직의 회원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조직"이라고 하니까 왠지 이런 게 떠오를 것 같습니다만, 이런 건 아닙니다… ^^;

최근 독일의 법 개정 때문에 조직은 대규모의 구조 개편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회의도 잦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회원들이 열정적으로 이런저런 논의들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문득 먼 훗날 제가 더 나이 들었을 때를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 나이 많은 회원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은퇴했거나 심지어 세상을 떠났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조직에 대한 애정과 열의는 전달되어, 저와 같은 세대의 정신분석가들이 회의석을 채우고 앉아 또 무언가에 관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에 열중하고 있겠지, 싶었습니다. 이런 세대를 이은 지속이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선대가 품었던 의지를 후대도 이어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신분석에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품은 이들이 모여, 정신분석이 계속 살아남고 활용되어 그 가치를 세상에 펼치게 하기 위해 함께 애쓰자는 의지를 말이지요. 그 의지가 없다면, 조직은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곧이어 저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는 선대의 어떤 의지를 이어받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저는 그것이 거의 상실된 상태가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지금의 이삼십 대 젊은이들이 자라면서 습득한 삶의 가치(?)는 공부 경쟁에 참여하여, 최대한 공부하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그리하여 최대한의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쟁에서 처졌을 때 감당해야 할 비참한 결과는 덤입니다. 무조건 돈 많은 게 최고이며 돈이면 다 된다는 배금주의는 그 비참함을 구원의 여지가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너 뭐 돼?"라는 유행어가 있지요. 약간 거만하다거나, 뭔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든가, 그런 다수 사람들의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핀잔의 말입니다. 이 유행어는 "뭐 되는" 사람은 건방지게 굴 자격이 있다는 암묵적 전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주로 추구되는 삶의 목표는 「그 "뭐"가 되기」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함께 추구하는 어떤 가치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게 만드는, 그러면서 동시에 각자는 버텨내기 힘든 고통을 짊어지게 되는, 그런 절망적 사고방식입니다. 


함께 추구했던 가치가 만약 있다면,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다시 겪지 않게 위해 지켜내야 할 것으로 여겨진 독립국가의 지위, 부유한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추구했던 나라 산업의 발전, 군부독재를 통한 전체주의화를 막기 위해 지켜내야 할 것으로 여겨진 민주주의 체제, 이 세 가지가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는 현재 젊은 세대의 삶 속에 진짜로 중요한 가치로 넉넉히 스며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개인으로서 경쟁에서 이겨 "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비하면 이러한 집단적 가치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존재감이 희박했습니다. 


살면서 어떤 추구할만한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가치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가정의 아이에게는 부모님이 힘써 일구는 저 밭을 나중에 내가 이어받아 계속 잘 가꾸어야겠다, 이런 마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농사짓는 가정의 아이는 역으로 농사지으며 힘들어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려 애쓰는 부모님을 보며 농사를 그만 지어도 되게 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두 경우는 모두 아이가 부모와 친밀하고 안락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장했을 때에만 생기겠지요. 어느 쪽이든, 후대가 이어받은 것은 어떤 의지입니다. 밭을 잘 가꾸겠다는 의지,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의지. 또, 모두 다 선대의 어떤 긍정적인 열의와 기쁨을 보아야 이뤄질 수 있는 이음이겠고요. 항상 우울한 모습인 선대를 보면 선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선대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없어도, 즉, 의지를 갖고 추구하는 무언가가 없어도 역시 아무것도 이어받을 수 없을 거고요. 


과연 지금 젊은 세대의 선대는 무엇에 기쁨을 보였고, 그리하여 어떤 의지를 물려주었을까요? 저는 여기서 기쁨 대신 고통과 공허를 발견합니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나왔던 유행가 중에서 부모가 등장하는 유명한 노래들을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도 보이고요. 이런 경험은 후대에게 부채감, 죄책감, 우울한 무력감을 유산으로 남깁니다. 또, "다 너 잘 되라는 뜻에서 그러는 거야!"라는 논리에 의해 정당성이 박탈된, 공부하라는 강제와 압력이 남긴 상처는 대중가요에는 등장하지 못했지만 많은 후대 아이들에게서 선대와의 화목하고 애정 어린 유대를 박탈했겠지요. 선대가 후대에게 직접적으로 전하려 했던 지침은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너는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라, 너는 「뭐」가 되어라, 나는 그러지 못해서 불행하고 힘들었으니"였을 겁니다. 이것은 "나는 추구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너도 나처럼 살길 바란다"와는 완전히 정 반대의 메시지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문학적인 비약을 허용하신다면, 이는 압축적으로 말해 선대가 후대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는 말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라 전체의 삶의 다양한 영역에 있는 무수히 많은 선대가 이런 말을 전했다면, 후대는 그 모든 삶들을 다 살지 말아야 할 삶으로 배웠다는 얘기가 됩니다. 즉,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삶 자체가 살지 말아야 할 것으로 전달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천대해 온 것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천대받는 설움을 가슴에 쌓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맺힌 한에 충실하게, 후대에게 보통사람의 삶을 살지 말라고 당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어떡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사람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걸요. 


소멸에 직면했다는 우리나라의 지금은, 보통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그에 걸맞게 대접하는 대신 천대하고, 깔보고, 그리하여 보통사람들을 우울증에 빠트려버린 결과이진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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