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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Sep 17. 2019

태풍의 눈.

[일상에서 낚아올린 통찰]  09.

어린 시절, 태풍의 눈에 대해 알게 되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가로수를 뽑고, 전봇대를 쓰러뜨리고, 집을 날려 버리는 강력한 태풍의 한가운데가, 그토록  화창하고 더없이 고요하다니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차 커버려 나이들기 시작한 저는, 태풍의 눈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2년 전쯤부터 제 주변에서 강력한 태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나를 한 가운데 둔 채, 주변 친구들의 삶이 쓰나미 급의 격랑 속에 휘말립니다.


친구 1은 직장암 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개복을 해보니 4기 판정, 두 달을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그 친구가 수술 받기 전에 제가 함께 살자 제안했습니다. 단, 나는 병간호 할 의향이 없다. 네 건강은 스스로 챙겨라. 그냥 혼자 있는 것보다 나을 거다, 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친구 2는, 사업이 안되며 큰 손해를 보게 되고, 그 분노를 같이 사업했던 사람에 대한 소송으로 표출하니다. 싸우고 또 싸우면서 삶의 전반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기어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즈음 친구 3은, 스물 한살 외아들을 자살로 보냅니다. 장례식장에서 심장을 조여내듯 소리치며 우는 친구 옆에서 나는 조용히 앉아, 때마다 물을 먹였습니다. 탈진하지 말라고요.


아들이 죽은 것을 믿을 수 없다며 기어이 얼굴을 봐야겠다고 난리치는 친구를 부축하고, 시체 안치실에 들어가 보랏빛 꽃이 핀 녀석의 얼굴을 같이 보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내 친구의 삶은 죽은 아들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친구 4는 연예인 만큼 예쁜 아이였습니다. 그 친구는 우울증이 심하다 못해, 피해망상으로 번져,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조직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전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자신을 믿어주지 않냐며 울다가, 화내다가, 소리치기를 반복했습니다. 병이 깊었습니다.


유일하게 나는 이 친구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2년 전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겁니다. 그때 나는 평온하고 고요하고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휘몰아치는 광풍을 목도하면서, 태풍의 눈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태풍의 눈 같았습니다.

내 고요함 주변은 말 그대로 미친듯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앗아가고 침몰해 갔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고요하게 목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했습니다. 그 태풍은 나의 평화를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성장했습니다.


그 사이 식물인간처럼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16년 동안 키우던 개가 노환으로 내  품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몇년 전에 아버지도 일찍 가셨기 때문에, 나는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모든 과정도 역시 평온하고 고요함 속에서 담담히 치뤄냈습니다. 모든 죽음을 진심으로 축복하면서요.


이제 지금,

내 주변의 태풍은 여전하지만 조금씩 양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두 달 살거라는 친구 1은 염즌 수치가 1도 안 보이는 기적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와 살면서 영성 서적을 읽었습니다. 이제 가족들에게 영성적으로 얘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친구 2는 많이 아픈 상태입니다. 몸과 마음이 다요.

얼마전 그녀의 아들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녀석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은 거의 처음입니다. 엄마 상태가 심각하다며, 전화를 걸자말자 울음부터 터뜨렸습니다.


그 녀석의 전화를 받고, 1년 만에 만난 그녀는 바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오도 제대로 입을 수 없는 상태...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당차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요. 눈에 초점이 사라졌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를 집에 데려와, 영양식을 먹이고 억지로 산책을 시키고 이틀을 재웠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야 하는 아들에게 비행기 표를 연기하게 했습니다. 너희 엄마는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그 녀석도 이제 겨우 스무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


아들에게 모든 절차와ㅗ 진행에 대해 주지시키고, 마지막으로 내 친구를 설득했습니다.


너 아파. 치료가 필요해. 입원하자.


나와 있는 이틀 동안이 상태가 좋았더 거라고, 아들 녀석이 말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만나, 에전의 생생했던 자신을 기억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다행입니다.

친정부모님께 보낸 것으로 내 할일은 마쳤습니다. 이제 가족들과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아들을 잃은 친구 3은 여전히 침묵한 채 지옥에 삽니다.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는 지옥을 견디기로 했나 봅니다.


그 와중에 우리 엄마 장례식에 왔더군요. 제 아들 장례식장을 지켜준 나에 대한 보답이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감사합니다. 그 정도 정신을 챙기며 살아 있어 주는 것으로요.


친구 4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릅니다.


이 친구들이 모두 친한 친구들입니다.

대충 아는 지인들이 아닙니다.


소소하게, 갱년기 우울증으로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지 않고 모아둔 언니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에서 두 달 머물다 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인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 똑똑히 봤습니다. 점차 자신의 정신을 갉아 먹는 상태를 지켜봤습니다. 그것이 한 인간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드는지 목격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지켜봤습니다.

나와 그녀들이 다른 점은 오로지 하나 입니다.


나는 깨어있는 상태로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신성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삶의 질곡과 고통은 나를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나에게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온통 두려움을 끌어 안고 살았습니다. 두려움으로 파생된 모든 불안, 미움, 분노, 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들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말입니다.


암을 이겨내고 있는 친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암과 죽음에 대한 상식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건강은 기적처럼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의 기적이고 사랑입니다. 나 자신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때, 삶의 기적은 펼쳐집니다.


인간의 태풍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삽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자신이 만든 격랑 속에서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태풍의 눈 속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곳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충만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작은 인간 존재로 한정짓지 않을 때, 우리는 신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는 열쇠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행위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모두는 태풍의 눈이 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바로 그 자리를 태풍의 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풍 속에서 괴로워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빛과 고요를 선물하는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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