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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윤 Feb 19. 2019

내뱉음의 중요성

<폴링 인 폴> 백수린 




<감자의 실종> '나'는 왜 감자를 잃었나 




 백수린 작가의 첫 단편집을 여는 글은 '감자'라는 단어를 잃은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어느날부턴가 '나'의 언어체계 속에서는 '감자'가 '개'가 되고, '개'는 '신념'이 된다. 피부에 좋은 감자팩을 한다는 사람들의 잡담에 주인공이 어쩜 그렇게 잔인할 수 있냐며 반문하는 장면은 잠시 주인공의 고통을 잊고 독자로 하여금 웃게 만들기도 한다. 독자뿐만이 아니다. '나'의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들은 주인공이 시덥잖은 농담이라도 건넨 것처럼 반응한다. 이 상황의 심각성은 오로지 주인공의 몫으로 남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마주한 주인공은 입을 닫기로 한다.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생계가 위협받을까봐, 무엇보다 또 어떤 단어를 잃어버렸을지 두려워서 사람들과의 대화를 포기한다. 주인공은 점점 자신의 언어체계에 확신을 잃는다. 자신과 타인이 서로 다른 외국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글의 주인공은 자신의 어려움을 결코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는 기이한 현상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만한 용기는 없다. '나'는 '감자의 실종'으로 철저히 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다. 



 나는 언니에게 내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무엇이 나를 무섭게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사소한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언니를 깨울 수가 없었다. (22) 



 '나'가 고립되는 이유는 '나'가 소통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나'가 겪는 기이한 현상 탓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나'가 타인과의 대화를 포기했기 때문에 나는 혼자가 된다. 



 때문에 이 글은 우화처럼 읽힌다. 자신의 생각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하게 언어로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감자'와 '개'와 '신념'을 잃지 않아도, 사람은 타인과 완벽한 소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대부분은 '다시 말하기'를 통하여 수정될 수 있다. 언어가 완벽하게 생각을 전달할 수 없기에, 오히려 소통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고립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한 온라인 카페에 가입한다. 그곳에는 '나'와 같이 단어를 잃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는 그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리며 일종의 해방감을 얻는다. 주인공은 결국 그토록 두려워했던 '말하기'를 통해 고립감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백수린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다. 수많은 오류와 오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말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말로 표현되어야만 하고, 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발화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한다. 이 글에서 백수린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간 주장을 하고 있다. '사람은 언어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거짓말 연습> 프랑스에서 한국어로 말하기  

 



  프랑스어가 서툰 한국인이 프랑스에 유학길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이 글은, 백수린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하다. 등단작이어서일까, 이 작품은 백수린 작가의 실제 경험도 어느정도 녹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수린 작가는 프랑스어를 전공하였고, 해외 거주경험도 있으며, 현재는 그 경력을 살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마 처음 유학길에 올랐을 당시 새로운 언어를 접하던 작가의 심정이 주인공의 '나'에게 많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유학길에 올랐지만 파업으로 합격 여부조차 알지 못하고, 어학원에 다니면서도 아직 프랑스어가 서툴기만 하다. 설상가상 남편과 이혼을 한 뒤 반은 충동적으로 프랑스에 이주해 온 상태이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고, '나'는 우울감에 휩싸여 있다. 


 

 '나'는 유학생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동의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과도 거리를 둔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말상대는 유학원에서 프랑스어 연습 상대로 붙여준 프랑스인 노파가 전부다. 노파는 나이가 들어 청력이 좋지 않고, 딱히 '나'에게 관심이 없어보인다. 노파와 '나'는 주기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만나고 있지만, 언어 문제로 피상적인 대화만 겨우 이어가는 게 전부다. 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노파의 집을  나서는 날도 잦다.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는 장벽은 다름 아닌 프랑스어이다. '나'가 프랑스어에 서툰 탓에 "오늘은 무엇을 했니?", "오늘 기분은 어떠니?" 와 같이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대화만 주고 받을 수 있다. '나'는 굳이 솔직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아는 단어로 조립할 수 있는 문장으로만 짧게 대답을 이어간다. 물론, 아는 단어에 한정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거짓말도 하게 된다. 



 어디서 왔니, 왜 왔니, 무슨 일을 하니? 이곳에 온 이래로 내게 돌아오는 질문은 늘 비슷한 것들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국의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칠 떄까지 걷다가 멈춘 채 카페나 레스토랑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발아되지 못한 말의 씨앗들이 천천히 내 안에서 번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188)



  '나'는 언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190)


 언어를 바라보는 회의적 시선은 '나'의 고립을 더욱 가속화한다. 마치 <감자의 실종> 속 주인공처럼, 소통을 포기한 '나'는 한없이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변화의 기회는 찾아온다. 기숙사동에서 송별회가 열리면서,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이 그녀를 파티에 초대한다. 그녀는 쭈뼛거리다가 송별회에 참여한다. 그들은 모두 프랑스어가 서툴다. 그들이 만드는 문장은 형편없고, 문법에 어긋나기도 하며, 단어만 나열한 형태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말한다. '나'는 송별회 파티장의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어쩐지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나'는 노파에게 다시 찾아가 노파에게 다짜고짜 한국어로 말한다. 남편과의 이혼, 파업으로 인한 합격 통보 지연과 같이 프랑스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말을 줄줄 늘어놓는다. 노파는 불평없이 '나'가 한국어로 내뱉는 말들을 가만히 듣는다. '나'는 그 오랜 시간동안 노파와 만나며 찾을 수 없던 유대감이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백수린 작가는 첫 글에서부터 꾸준히, 말하기 자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써내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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