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는 주말이 되면 수제비나 칼국수를 끓이라고 하셨다. 나와 동생들은 당연히 라면을 더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수제비나 칼국수가 버티고 있는 한, 주말 한 끼를 라면으로 때우는 호사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중학생이 겨우 되었을 나이에 칼국수 반죽을 밀 줄 알게 되었고 수제비를 뜨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칼국수나 수제비나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음식이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재료가 같으니, 칼국수를 만들기로 했더라도 반죽이 조금 질어지면 바로 수제비로 둔갑시킬 수 있는 요리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칼국수 주문이 있는 주말이면 나는 반죽을 밀고, 엄마는 반죽을 가늘게 썰어 칼국수를 만들었고, 수제비 주문이 있는 날이면 연탄불 앞에서 끓고 있는 육수에 수제비를 떠 넣느라 엄지손가락이 아팠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밀가루 반죽을 얇게 뜨는 일은 엄지손가락의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한다. 엄지손가락은 아프고 수제비를 얇게 뜨는 지겨운 반복에 지치면, 수제비가 점점 두꺼워진다. 두꺼운 수제비는 맛없다고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들을 때가 되면 반죽 떠 넣기가 끝이 난다.
또 어느 주말이면 아버지의 주문으로 고동을 삶았다. 고동을 삶은 물은 기가 막히게 시원해서 다들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바늘을 이용해 고동 속을 파내는 것은 지겨운 일이었다. 양푼에 가득히 담긴 고동을 한 개씩 집어서 속을 일일이 다 파내려면 여러 사람이 매달려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이 음식 또한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주기적으로 밥상에 올라오는 메뉴 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주문했던 음식들은 모두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맛있게 먹었던, 이름하여 소울푸드이다. 문제는 그 소울푸드가 아버지의 영혼을 울리는 음식이었고 나머지 가족들의 영혼은 울리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소울푸드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음식이 나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나의 소울푸드는 무엇일까? 칼국수와 수제비, 다슬기국은 분명 나의 소울푸드는 아니다. 나는 칼국수와 수제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소울푸드는 우울할 때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음식이고, 누군가가 만들어 준 음식이 아니라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직접 만들었던 음식이다. 세상이 다 조용해진 한밤중에 혼자만 남겨진 것처럼 우울한 기운이 나를 둘러싸면 나는 베이킹을 한다. 나의 소울푸드는 그 옛날 미국 아줌마가 주었던 집안에 내려오는 레시피로 만든 커피케잌, 한 입 먹고 너무 맛있어 레시피를 구해다 만든 초코칩 르뱅쿠키, 알싸한 이국의 향신료 냄새를 풍기는 당근케잌 같은 달달한 것들이다.
달달한 케잌이나 쿠키가 우울한 기분을 정말 바꿔주는지 나는 확실히 모른다. 분명한 것은 베이킹의 여러 단계를 세심하게 집중하면서 케잌과 쿠키를 만들다 보면 기분은 확실히 나아진다. 음식을 먹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도 있지만, 요리하는 과정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울할 때는 무엇을 먹지?”보다 나는 “우울할 때면 뭘 만들어 먹어볼까?” 를 먼저 물어본다. 그 시간을 견디면서 직접 만들어 낸 음식이라면 나에게는 그게 무엇이든 소울푸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