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았나?

글 쓰는 일을 쫓는 모험 중입니다만

by 심가연

어느 날 통화를 하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잖아."

우리는 스무 살 이전부터 등단을 꿈꾸며 시를 쓰고 소설을 읽었다. 그러나 35살이 되도록 신춘문예나 등단을 하지 못했다. 번듯한 학벌도, 괜찮은 직장도 없었다. 친구와 나는 둘 다 두 아이를 낳고 미취학 아동을 키우고 있었다. 낮 시간에 서로 전화를 하며 속풀이 하는 사이였다.


'열심히 하지 않았나?'

그 말에 가슴이 아팠다.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과거로 돌아가 생각해보았다. 대학 졸업하고 글과 관련된 직장을 잡으면 틈틈이 글을 쓸 계획이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부모님은 내가 글 쓰고 싶어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셨고, 아버지는 내가 원하지 않고 전공에도 맞지 않는 직장을 계속 소개해주셨다.


내가 원하는 곳은 가기에 실력이 부족했고, 아버지가 소개해준 곳에 가지 않을 깡이 내겐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그곳에 가서 천덕꾸러기가 된 적도 있었다. 6개월 자리를 채우고 없어지는 회사였고, 권고사직을 당했지만 철없게도 기뻐하면서 나왔다. 없어진 회사였으니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장을 권하셨다. 나를 위해 아버지가 아쉬운 소리를 하며 구하셨겠지만 아직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다듬기 전에 아버지가 권한 길로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억지로 불려 나간 면접 자리, 면접관도 나도 죽을 맛이었다. 면접을 보고 돌아오니 내 코 밑에는 벌겋게 알레르기가 나 있었다. 평소에 나는 전혀 알레르기를 없었다. 몸도 거부하는 것 같았다. 합격 통보 전화를 받은 날, 나는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글 쓰는 일이면 뭐든지 하겠다는 딸한테 아버지는 인맥으로 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파는 영업부를 알아봐 주신 것이다. 죄송한 마음에 돈을 벌면 그래도 면죄부가 될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논술학원에 가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은 12-6시까지 근무였지만 근무지가 분당이었고 출퇴근만 총 3시간이 걸렸다. 월급은 짰고, 점심시간에는 나갈 수 없고 교실 한 켠에서 가볍게 점심을 때우고 나와야 했다. 출근해서는 학원 청소를 했고, 점심시간에는 틈틈이 미리 오는 아이들을 받아야 했다. 퇴근할 때 첨삭지를 받아서 집에 가서 아이들이 쓴 글을 첨삭해주어야 했다. 첨삭을 마치고 나면 밤 12시였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었지만 놀랍게도 나는 아이들과 글쓰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의 문장을 읽고 첨삭을 하고 별 다섯 개를 그려주고 답장을 쓰면 아이들이 읽고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영세한 논술학원이지만 나름 만족하며 다니고 있었다. 내가 쓴 첨삭지를 읽던 원장님이 내가 즐겁게 일하는 것을 느꼈는지 학원에서 꾸준히 일하면 더 좋은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더 나이가 들고는 이런 기회를 주겠다는 공수표를 더 이상은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때는 꽤나 솔깃했다.)


헌데 점심시간에 나가서 먹을 수 없게 하는 것이 결국 문제가 되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파는 떡을 싸와서 교실에서 먹다가 결국 탈이 났다. 장염이 와서 그야말로 2주간 누워 있게 되었고, 그렇게 학원도 관두게 되었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구나. 자책했다. 분명히 즐겁다고 생각했던 일인데 그렇게 또 직장을 잃었다.


논술학원에서 일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나는 글쓰기를 말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결정에 끌려다니지 않고 일대일 글쓰기 과외 창업을 했다. 정말이지 뭐라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글’과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아는 온갖 커뮤니티에 글쓰기 과외 모집 광고를 올렸고, 한 달에 4회 수업을 하는데 단돈 5만 원으로 시작했다. 카페에서 만나 각자 차를 마시니 차비와 커피값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없었지만 즐거웠다. 점점 사람들이 연락을 주었고 2년이 지나자 점점 금액은 회당 5만 원으로, 한 달에 20만 원에 4회로 운영되는 일대일 글쓰기 수업을 하게 되었다. 점점 사람이 늘어났고, 초등생부터 칠순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만난 사람들이 서른 명 이상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설펐던 내게 기회를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사실 3년 이상 진행된 이 글쓰기 수업을 통해서 가장 성장한 것은 나였다. 수업을 하면서 비로소 제대로 읽고 여러 번 시를 읽고 또 곱씹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사람들과 반복해서 입으로 낭독하며 알 수 있었다. 수정을 입으로 백 번 천 번 고치면, 글맛이 어떻게 살아나는지도 과외를 하면서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을 고쳐주던 여고생은 토지 청소년 문학상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그 친구가 6개월 동안 그 단편 하나만 끌로 파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 작품에 대한 집요함과 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꼈다. 내가 고치는 과정을 돕긴 했지만, 그 태도는 그 여고생에게 내가 배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인내심을 나에게 다시 투입할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일정 수준의 돈을 벌기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불규칙한 일을 하면서 정부 창업자금을 받는 것도 미덥잖아 했다. 없는 형편에 내 앞으로 한 달에 30만 원짜리 각종 보험을 들어, 나에게 내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에게 얻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20만 원씩 10명을 과외하느라, 서울 경기 지역을 매일 두 탕씩 지하철을 타며 뛰어다녔다. 틈틈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내 소식을 아는 선배가 일거리를 소개해주면, 사보기자나 취재기자 일을 했다.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한 채로 프리랜서가 되면, 내가 하는 일이 ‘얼마’ 짜리인지 전혀 감이 없고, 그래서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없다. 얼마 받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지인 소개의 경우는 그래도 알아서 챙겨 주지면 보통의 경우는 알아서 잘 챙겨주는 경우란 절대로 없고, 프리랜서는 책이 나와도 을인 내 갑이 돈이 받고 나에게 붙여주고.. 일한 뒤 꽤 시간이 지나야 내게 돈이 들어왔다.


과외를 뛰면서 각종 일을 하던 나를 주저앉게 했던 것은, 청년 창업지원금이 끊기는 2013년 6월부터였다. 그 당시 청년 지원금은 내 기억에 한 달에 백만 원 정도였는데. 1년의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도 여전히 나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지쳤고 나를 갈아 넣으며 운영하던 모든 일들로부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원하는 부모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통로로 이 모든 상황에서 도망쳤다. 여기서 고백하던데 남편이 완전히 지쳐버린 나를 받아준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지금도 내가 글을 쓰고, 글로 잘 될 거라고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는 그것만으로 이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도망치듯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서는 남편과도 그런 마음 때문에 힘들었다.


그 당시의 나는 무슨 글을 쓰고 싶었던 건지 뚜렷하게 없었다. 다만 스토리텔링 관련된 직장에 가고 싶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기보다는, 직장에 연연하다 보니 막상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것이 없었다는 게 맹점이었다. 그때의 내가 세상에 '할 말'이라고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불평뿐이었다. 그런 태도는 여전히 지금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작년에도 원래 하던 대로 밤을 새우면서 무리한 스케줄로 생활하고 있었다. 단막 대본을 써서 합평을 하는데 한 언니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어휴, 너무 화가 나 있어.”


그 언니의 툭 튀어나온 진심 어린 한 마디에. 나는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글로 화를 내고 있구나. 그런 화내는 사람의 글을 누가 읽을까. 나는 그날로 억지로 쓰던 글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 상태로 글을 쓰자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나는 또 늦은 밤까지 글을 쓰고 있다. 밤을 새우면서라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그 말은, 우리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는 아직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끝낼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친구도 나도, 우리는 그 시절에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며 달려왔을 뿐이라고. 앞으로도 그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르며 달려 나가면 되지 않겠냐고. 날마다 자책하는 것을 멈추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