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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May 21. 2024

악!(樂)소리 나는 육아

2.대환장 쌍둥이 육아

2018년 11월 5일, 오전 9시 34분, 35분. 1분 간격으로 봄이와 샘이가 태어났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 2주 전부터 조산기가 있어 만삭의 몸으로 입원 생활을 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간절하게 아이들이 태어날 날만을 기다렸다.

2주 동안 24시간 내내 맞고 있어야 하는 수축 억제제 부작용 탓에 온 몸은 두드러기 투성이었고, 눈과 코와 입은 건조함에 말라 비틀어져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사바늘로 멍투성이가 된 양쪽 손목을 바라보며, 어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나 병원을 나가 조리원으로 들어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이제 겨우 2킬로그램이 된 작디 작은 아이 두 명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딸 아이 봄이는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곧장 신생아 중환자실로 들어가야 했고, 조리원에는 아들인 샘이와 함께 들어갔다.

봄이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임신 중 나의 로망이었던, 신생아실 두 아기 투샷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런 아쉬움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봄이는 매일 매일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고, 나는 샘이와 조리원에 있으면서도 하룻밤도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몸조리가 채 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병원을 찾아 봄이를 들여다봤고, 봄이는 중환자실에서 2주를 꽉 채우고 태어난 몸무게 그대로 내 품에 돌아왔다.

두 아이와 함께 돌아온 집에서는 또다른 사투가 벌어졌다.

새벽 5시까지 울어 대는 봄이를 끌어안고 나도 울었다. 봄이와 샘이가 함께 울 때면 남편과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 될 대로 되라며 두 아이의 우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남겼다.

바쁘신 시어머니도, 아프신 친정어머니도 우리의 육아에 손을 보태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오직 남편과 나, 우리 둘이 치뤄야 할 힘겨운 전투였다.

2시간 간격 새벽 수유는 쌍둥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두 아이가 같은 시간에 깨어 분유를 먹을 리 만무했다.

남편과 나는 많이 자면 한시간.. 거의 30분에 한번씩 잠에서 깨어가며 아이들을 먹이고 달래고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단태아의 평균 출생 몸무게에도 못 미치는 작은 아기,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에 2주를 입원해 있다가 퇴원해서 언제 어떤 문제가 다시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약한 아기, 잠투정이 너무 심한 샘이와, 잠을 안자고 밤새 울기만 하는 봄이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남편과 나는 지칠대로 지쳐갔다.

남편은 신경정신과에 가서 우울증 약을 타 먹기 시작했고, 너무 힘들어 저절로 젖이 말라버린 나는 남편을 책망하고 의지하고 원망하고 토닥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쌍둥이 신생아 시절 육아가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100일 전까지는 지옥, 100일 이후에는 전쟁이었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아기의 100일은 우리의 상태 값을 지옥에서 전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아이들이 통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다.

밤에 아기와 함께 잠을 잘 수 있다니.. 아기가 잠들면 좋아하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니.. 야식을 먹을 수 있다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물론 전쟁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지옥은 아니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예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고 어려웠던 존재에서 벗어나,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나의 아이로 봄이와 샘이를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옹알이가 늘었고, 예쁜 옷을 사 입히는 재미에 빠졌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어왔고, 둘이 마주보고 까르르 웃는 모습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돌이 지나니, 아기띠에 안고 힘겹게 재우지 않아도,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슬며시 잠이 들었다. 누워만 있어도 아이가 잠을 잔다니… 12개월동안 아이를 안고 잠들 때까지 온 집안을 서성거리며 어르고 달래던 노고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초보 엄마 아빠에게 매일 매일 눈에 띄게 자라주는 남매 쌍둥이를 키운다는 것은, 매 순간 새로운 행복과 지리한 고단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아이들은 서고, 걷고, 뛰었다. 노래하고 춤췄다. 끊임없이 움직였고, 쉴 틈없이 먹고 쌌다

똥 치우기 담당이었던 남편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오늘 하루 아기 똥을 여덟 번 닦아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다. 둘이 합쳐 열 번인 날도 있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만삭의 임산부가 가장 부러웠던 그 시절, 지나가는 유모차 속 작은 아가를 보며 기도를 심었던 내 연약함들이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25개월까지 가정보육을 했다.

맞벌이도 아니었고, 남편도 프리랜서라 상대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은 이유도 있었다.

적어도 의사표현을 어느정도 하기 전까지는 기관에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26개월, 생일이 11월이라 억울한 한 살을 먹은 탓에 한국 나이로 4살이 된 직후, 봄이와 샘이는 가정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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