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
나의 외삼촌은 나와 나이 차이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지는 않는다. 스무 살이 조금 안 되는 정도.
나에게 삼촌의 이미지는 삼촌의 20대 중반, 비쩍 마른 몸으로 러닝셔츠에 트렁크 팬츠만 입은 채 침대 위에서 한껏 게으름을 피우던, 20년도 더 된 그 장면 속 삼촌 그대로이다. 어쩌면 '삼촌'보다 '큰오빠'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말도 삼촌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을 때가 있다. 시시콜콜한 수다부터,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상처까지. 삼촌에게 털어놓으면 그래도 괜찮을 거다 라는 믿음이 있다.
나는 6살 차이의 남동생이 하나 있는, 장손 집의 첫째 딸이다. 맞다. K-장녀다.
여느 K-장녀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자라면서 엄마와 부딪히기 시작했다. 자주 '나도 언니/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쿠션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K-장녀이고 어느 정도 이상은 착하고 혼자서도 척척 잘하는 유능한 딸이어야 했고(아니, 어쩌면 그냥 엄마랑 싸우기 피곤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딸이고 싶어 했다.
나는 우리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랑 가능하면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했고, 엄마 아빠가 그게 좋다면, 밖에 나가서 자랑할 수 있는 건수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 가치관이 허락하는 안에서 내가 정말 너무 힘에 부쳐있는 상태가 아닌 한, 착하고 애교 많은 딸로 살았다. 가끔 화를 내고, 싸우고, 상처받았더라도 몇 시간 후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교 부리고, 먼저 사과하고, 장난치고 하는 게 당연해져 있었다.
그런 게 힘들다고 엄마한테 이야기해봐야, 엄마는 화낼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K-장녀의 삶이 힘들 때에 어딘가 하소연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삼촌은 대나무 숲이 되어주었다. 하루 종일 엄마한테 떠는 수다와는 다른, 진짜 답답할 때의 삼촌과의 수다는 꽤나 든든한 심리적 비빌 언덕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삼촌이 본가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지금은 본가에서 독립해 따로 사는 나였지만, 삼촌도 볼 겸 본가로 향했다. 그날도 엄마와 수다를 떨고, 동생에게도 말을 걸고, 혼자 누워 TV만 보는 아빠한테도 애교를 부리고 헤헤 실실, 뽀르르 뽀르르, 방과 방사 이를 누비고 있었다.
그러다 삼촌의 한마디에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었다. 비슷한 뜻의 '노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감정은 저 말을 들었을 때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엄마가 가끔 나에게 고맙다고 할 때와도 다른 감정이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감정적인 지지를 얻은 느낌이었다.
'애쓴다'는 말이 왜 그렇게 나를 울컥하게 했을까.
'애쓰다'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다 발견한 글에서, 내가 왜 울컥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애를 끊다’는 말 외에도 ‘애타다’, ‘애쓰다’, ‘애먹다’ 등 ‘애’가 들어가는 말이 많다. 애는 창자의 옛말이기도 하고 간이나 쓸개의 옛말이라고도 하다. 나중에는 어느 장기 하나만을 칭하는 말이 아니라 오장육부 전체를 다 칭하는 말로 그 뜻이 확대되어 ‘속’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애가 탄다는 말은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서 온갖 내장 즉 속이 타들어간다는 뜻이다. 속이 끓는다고도 한다
애를 쓴다는 말은 온갖 내장은 물론 마음까지 다하여 뭔가를 이루려고 힘쓰는 것을 이름한다. 내 ‘속’의 모든 역량을 다하고자 하는 것을 애쓴다고 하는 것이다. 애를 먹는다는 것은 애가 타든 애를 쓰든 간에 속이 온통 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꿀꺽꿀꺽 삼키며 견뎌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알쏭語 달쏭思] 애타다 애쓰다 애먹다-이투데이(https://www.etoday.co.kr/)
내 마음과 근육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내 오장육부의 힘을 모두 끌어모아 노력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었나 보다.
가끔은 철이 없는 큰오빠 같은 삼촌이 30년을 같이 산 가족보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내가 바라는걸 더 잘 알아챌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