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한 주 동안 세 분의 지인 영면 소식을 듣게 됐다.
문래의 인연 두 분과 고등학교 때 데생 선생님 소식.
한 분은 일본 분으로 문래 국제 콘퍼런스 담당일 때 발제자로 섭외했었는데 공기관의 행정 처리와 창작공간 2세대 운영 관련해서 가르침을 주신 분이다. 외국인 발제자가 이런 지점들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예외적이다. 뭘 진행할 때 선입견을 갖지 말라고. 미리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미친듯이 시뮬레이션 하는 지금의 나이다. 페스티벌 봄 도쿄 놀러 갔다가도 그 센터 앞 항구의 오래된 버스 술집에서 새벽에 만나 일어로 줄곧 얘기를 하셨다. 세토우치 트리에날레때도 땜빵 난 발제자 대타로 갑자기 오셔서는 뜻밖의 만남을 갖었던 그분. 내게 영어는 많이 안 쓰셨었다 난 일어를 모르지만 그분은 어떻게든 일어로 내게 의사를 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나간 기억들이지만 희한하게 난 제법 알아들었었다. 그러고 보면 우연하게 뵐 때마다 스치듯 대한 건 나였다. 앞으로 예술 일 할 꺼잖아 이리와 이리와 앉히고 얘기를 걸어준 건 그분. 전할 것이 많아 보였다 그땐 그냥 외국이라 별 스케줄 없이 앉아 듣기만 했다.
입시 데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작년에 돌아가신 소식을 문래 인연 교수님의 영면 소식을 올린 페친 댓글에서 알게 되었다. 소식이 내게 일 년 너머 다았다. 선생님은 인간이 바퀴벌레 같은 존재라며 내가 그린 그림을 지우개로 마구마구 두드리며 지워내는 드로잉을 보여주셨었다.. 이과이던 고 3 늦은 여름부터 난 입시학원을 다녔다. 어릴 때부터 입시미술을 시작한 아이들 실력에 기가 죽어 좌절감을 느꼈다.. 당연히 재수를 해야 하는 분위기에 난 어떻게든 합격을 원했고 순수 예술실기과에 넣기에 시간이 부족하니 디자인과를 겨냥해서 색을 만들어 외우라는 학원 권유에 디자인 수업과 기본 데생 수업만 배웠다.. 막상 큐레이터과에 들어가서 시작한 것은 순수 미술이었다. 템페라, 유화, 흙 조소, 도자, 금속공예..
죽음들로 나의 그때 장면들이 소환됐다. 고3 때 데생 화판을 두드리며 '홍사장~'을 부르며 다가오던 그 구부정하고 마른 중년 아저씨 선생님.
그 선생님이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그림을 수정해주면 다 지우지 않고 그림이 멋있어져 내 실력도 아니면서 큰 위로를 받곤 했다. 일산에 미술학원을 따로 차렸다는 소식, 몇 년 후 그림이 문제가 되어 법적 소송에 시달리고 있는 선생님 소식을 뉴스로 몇 차례 접하긴 했었지만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잘 살고 계시길 하는 마음이 다였다. 삶이 종료되기에 너무나 이른 나이에 그분은 더럽다고 한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나셨다. 그림으로 그래도 달래고 있는 가 싶었지만 아무것도 선생님을 채워주진 못했나 보다.. 해가 바뀌었고 해가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