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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Oct 06. 2021

떠도는 생각, 추락시키기

글... 쎄,

은폐, 탈은폐, 비은폐...............................


대개 단어라는 것이 양날이 아니라 삼자로 표현될때 생각이 균형잡히게 작동한 것 같아서 일차적인 안심을 준다. 오늘 아침에 떠오른 단어는 은폐.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영감과 같이 머리에 들어왔다?! 어디선가로부터 떠올랐다. 없는 것이 머릿 속에 이미지처럼 혹은 가던 방향을 전환해서 다른 골목길에 들어섰을때 소름끼치는 다른 장면처럼 전이감이라하는 그런 것과 닮게, 아니면 호흡과 같이 들락날락 떠올랐다 바로 두꺼비집 내려가듯 한순간 꺼진다. 텔레비전 전원끄듯 수많은 이미지들 그 생각 그 기억은 까맣게 사실 까만지 하얀지 주장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되버린다.


이러한 현상을 겪고 다듬지 못할 이 적어내림으로 비오는 날 타자를 빨리 치고 싶어서 애꿎게 노트북 부팅시간으로 노트북을 갈아치워버릴까 하는 생각과 털실 꼬이듯 따라오는 올해 가을비는 왜이렇게 장마처럼 길게 내리지 투정까지 가지 전의 스치듯 의문을 갖으며 브런치를 오랜만에 클릭한다.


  쉬고, 은폐에 대한 생각. 하이데거를 경유하면서 탈은폐에 눈이 틔이면서 굉장히 은폐라고 하는  삼각지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사실 어느 지경까지 왔냐면 빛을 묶는 눈을 신봉하던 후기 현상학적 관심에 질문을 던지게됐다. 신격화되어있던 빛에 의문을 갖은 격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빛과 색은 진리를 왜곡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빛과 색은 현혹을 일으키고 어쩌면  현혹으로 말미암은 것이  beaty 출발일 수도 있겠으나, 가령 아침에 날이 화창할때  빛은   속으로 들어와  어디에 있는  모를 마음에 다달아  전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주술을 부린다. 가볍게 표현해보자면  몸이 썬탠이 아닌  샤워,  세례를 받는다. 빛이 마음과 만나는 순간이라고도   있다. 빛은 색을 아바타삼아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기분이 들지만  둘의 관계는 이런 주종관계가 느껴진다. 빛이 진리라면 색은 n-body 라고나 할까 생각의 걸음을 재잘재잘 편하게 걷지 않고 무리해서  다리길이만큼 의식하고 최대로 써서 한발자국을 떼는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말이다.


우리가 빛을 바라볼때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한번 더 생각해보면 빛은 빗물질일 수가 없다. 만질 수 있는 것만 물질인가. 글쎄. 만질 수 없다. 몸과 닿치 못한다. 빛이 몸에 닿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빛이 사물성을 갖지 않았는가. 사물은 아니겠지만 사물성은 갖는 다고 생각한다. 닿을 수 없다고 빛이 분명 보이는데 그 형태가 없다고 누가 끝까지 주장질 할 수 있을까. 그래 과학자들은 과학 세계안에서 논리를 펼칠 수 있겠지만, 예술 세계에서 혹은 인간 활동에서 얘기될 수 있는 영역은 좀 다른 지오그래피를 그리고 있다.


생각의 출발인 은폐, 빛과 색을 의심하면서 은폐에 대해 추적해본다. 빛은 그래서 밝게 비추는 모두 노출시키는 탈은폐인가 아니면 도저히 속성상 은폐일 수 없는 비은폐인가. 은폐는 감추고 있을 뿐 확실함을 지니고 있지만 오히려 탈은폐나 비은폐에 대한 구분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은폐의 반대는 노출이 아닐까. 탈은폐와 비은폐의 단어는 은폐의 반대 개념으로서 균등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은폐는 탈은폐의 같은 선상에서 작동되며, 비은폐만이 은폐와 다른 태생의 것으로 여겨진다. 빛의 몸이 되어주는 것으로서 색에 대한 고찰 또한 깊이 해볼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색 또한 사물성 여부를 의심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진다. 사물은 아니지만 사물성을 띄는 것들.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것들, 혹은 우리 눈을 제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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