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누구보다 사회에 무관심하게 한 발만 걸치고 살던 사람이었던 내가
요즘 들어 계속해서 생각이란 걸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화가 나게 되고 거지 같다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세상에는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학창 시절 학교 옆 야구장 8회 이후 무료입장을 이용하려면 야자시간이 채 끝나기 전에 몰래 빠져나왔어야 했고
연애를 할 때도 끊임없는 선택과 고민의 연속이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결혼을 할 때에도 결정해야 할 일들은 절대 줄어들지 않았고
매 순간 선택과 만족 또는 후회 사이에서 심한 줄타기를 하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일은 좀 달랐다.
이것은 선택을 함과 동시에 다른 일들과는 공존할 수 없는 일방통행 도로 같았다.
한때 이것을 왕복 4차선 도로쯤으로 생각하고 일도 육아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믿었던 나의 치기는 두 번의 유산으로 그것이 큰 착각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일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나는 아기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기브 앤 테이크 공식에 철저하게 충실한 나의 삶이었다
그리고 아기가 13개월이 된 지금이 되기까지
나는 끊임없이 일방통행 도로의 출구를 찾아 헤매었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고 나도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 중에도 단기 알바라도하고 싶어 면접을 보러 갔었다
면접관은 임신 중이라는 말에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거짓 없이 보여주었다
심지어 그곳은 여성복지에 관한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을 해보았던 것인데
대학원에도 지원을 해보았다
임신 중에 본 토익시험 점수가 있어 다행히 대학원은 합격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그다음부터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대라는 곳이었지만 그곳도 육아 중인 대학원생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교내 어린이집은 교직원 전용이었고 그마저도 시설이 작아서 교직원 자녀들 중에도 못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결국 휴학을 했다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왔다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내가 아기를 낳기 전에 하던 일은 드라마 pd라 숱한 야근과 출장으로 아이를 키우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또다시 선택이었다 아이를 선택해 일을 그만두었던 나에게 이제 일을 선택하지 않겠냐는 물음이 생겨버렸다
이미 임신과 육아를 하는 2년 동안 일에 대한 갈증이 너무나 컸던 나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이를 봐주실 시댁이나 친정 쪽 어머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기댈 곳이 남편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의 아빠이니까
남편은 흔쾌히 육아휴직을 택해주었다
사회분위기도 조금씩 바뀌어 육아 대디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에
남편도 남편 회사도 육아휴직에 대해 관대하게 생각해 주셨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지 한 달
근로기준법 강화로 드라마 현장도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도 집에서 잠을 잘 시간은 보장이 되어
생각만큼 아이를 못 보진 않았다
일을 하고 나니 아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커져 아이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나 태도도 유연해졌고
가장 좋은 것은 아이와 아빠가 아주 많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이다
아빠를 가족이라고 아이가 느끼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비로소 우리 세 사람이 하나의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게 되면
좀 더 일을 선택하기 수월해질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때까지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래서 나의 고민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번 드라마 작업이 끝나고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남편과의 육아 분담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둘 다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뜻밖의 곳에서 기회가 온 것처럼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아이와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자라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막연한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