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사람의 마음을 끌어내는 힘은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압도한다
‘본방 사수’라는 말이 없던 시대가 있었다. 1990년대만 해도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본방’뿐이었다. 때문에 <모래시계>가 ‘퇴근시계’였던 것처럼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만 방영되는 방송들을 기필코 사수해야 한다는 정서가 당연했다.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바로 녹음하지 못하면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지 몰랐다. 주말 연속극을 놓치면 그다음 주까지 지난 회의 내용을 모른 채 속절없이 기다려야 했다.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는 비디오로 나올 때까지 그리고 동네 비디오 가게에 비디오가 들어올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렇게 아날로그 경험에는 뭔가를 기다리고 안달하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디지털 경험에서는 불필요한 과정과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게 편리하고 쉬워지면서 우리는 오히려 뭔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상의 편리함 덕분에 금세 디지털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점점 사람 냄새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서 복고 열풍이 불더니, 아예 레트로에 ‘뉴 new’를 붙여 ‘뉴트로 New-tro’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뉴트로란 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말로, 옛날에 유행하던 것들을 요즘 시대에 맞게 새롭게 즐기는 방식을 말한다.
아날로그가 중장년층만의 향수가 아니라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밀레니얼 세대에게까지 먹히는,
‘세대를 넘어선 소비 취향’으로 자리매김한것이다.
한 예로 2017년 ‘구닥캠 Gudak Cam’이라는 카메라 앱이 출시 3개월 만에 16개국 애플 앱스토어 유료 앱 전체 카테고리 1위를 차지하며 히트를 쳤다. 실제 돈을 들여 앱을 살 정도로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다. ‘구닥’이라는 이름은 구닥다리라는 단어에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필름 회사로 한 시절을 풍미한 ‘코닥’의 오마주 같기도 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구닥을 이용해 사진을 찍으면 바로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사진관에서 현상해야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하루 최대 24장의 사진만 찍을 수 있고, 72시간 즉 3일 이상을 기다려야 내가 찍은 사진을 볼 수 있다. 기다린다는 불편함을 설렘으로 바꾸는 역발상과 필름 카메라의 아날로그적 매력을 잘 담아낸 것이다.
2018년 12월 ‘ Young Retro, 미래로 후진하는 디자인’을 메인 콘셉트로 한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다. 180여 개 브랜드와 600여 명의 디자이너가 참여했는데, 부스마다 각 디자이너의 개성 넘치는 레트로 감성이 가득했다. 낯선 과거의 모습에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져 관람객들에게 신선함과 친근함이 동시에 전해졌다.
무엇보다 20대 관람객이 압도적으로 많아 놀랐다. 실제로 젊은 세대의 감성과 취향을 놓치지 않은 다양한 시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젊은 세대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영리하게 잘 기획된 전시였다. 특히 레트로 감성을 게임과 접목한 ‘배달의민족’(이하 배민) 부스가 인상적이었다. 배민은 늘 기대감을 주는 브랜드라 더 관심을 가지고 꼼꼼히 챙겨 봤다.
얼핏 보기에는 무슨 실험실이나 연구소 같았는데 들어가보니 추억의 오락실을 현대 버전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배민이 직접 개발한 ‘한나체 프로’를 이용한 타자 게임을 관람객들이 즐길 수 있었다. 게임 방법은 간단하다. 시작과 동시에 여러 단어가 화면 맨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그중 치킨, 골뱅이, 백숙, 가츠동, 웨지감자, 참치회 같은 음식 이름들만 재빨리 가려내 틀리지 않고 타이핑을 하면 각 음식의 칼로리가 점수로 더해진다. 그렇게 총 칼로리가 높은 순서대로 순위가 매겨지는 게임이었다. 음식 이름을 입력하면 해당 음식의 일러스트가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재미도 더했다. 뉴트로 감성을 담은 아날로그 게임 방식으로 아주 쉽게 배민의 매력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최근에는 뉴트로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복고를 최신 유행으로 즐기는 ‘힙트로 Hip-tro’까지 등장했다. 뉴트로가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취향이라면, 힙트로는 아예 촌스러움을 가장 ‘힙’한 스타일로 여긴다. 따라서 오리지널 상품의 클래식 디자인, 스테디셀러를 재해석해 내놓는 제품이 주를 이룬다.* 힙트로 트렌드를 대표하는 아이템인 ‘어글리 슈즈’는 투박한 디자인과 과감한 컬러 조합으로 복고 감성을 재현하며 사랑받고 있다.
발렌시아가에서 시작해 휠라에 이르기까지 1020세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아예 기본 아이템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는 왜 이토록 레트로, 뉴트로, 힙트로에 열광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날로그가 밀레니얼 세대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감성과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듯하다. 이미 웬만한 일상의 불편함은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는 기술의 편리함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럼에도 기술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정서적인 면, 즉 사람의 마음을 끌어내는 힘이다. 단언컨대 사람의 마음을 끌어내는 힘은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압도한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의 수필집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라는 책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다케시는 그토록 동경하던 포르쉐를 뽑는다. 포르쉐를 처음 탄 날, 그는 막상 포르쉐에 타서 운전을 하고 있으니 포르쉐를 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탄식한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내 포르쉐를 몰게 하고는 자신은 택시를 타고 뒤따라가면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택시 기사에게 말한다.
“어이 기사 양반, 저 앞에 가는 포르쉐가 내 포르쉐예요. 어때요, 멋지죠?”*
포르쉐를 타고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포르쉐라는 차가 주는 충족감이라는 정서를 실제로 확인하는 욕구가 더 우선인 것이다. 이런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솔직히 보통 사람이 디지털 음원과 고품질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음원은 LP판보다 가격도 훨씬 싸다. 그런데 최근 LP판 구매량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소비자는 실체를 볼 수 없는 디지털 음원보다 직접 만지고 소유할 수 있는 LP판으로 듣는 음악을 더 값지게 받아들인다. 멜론 앱에서 스트리밍을 켜고 블루투스로 연결해 음악을 들을 때보다 LP판이라는 실체가 내 눈앞에서 돌아가며 노래를 들려 주고 그 앨범 재킷은 턴테이블 옆에 멋지게 세워져 있을 때 정서적인 만족감과 행복감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에 크리에이티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포르쉐에 태워주는 것이 아니라 포르쉐가 주는 충족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서식품의 모카골드는 2015년부터 꾸준히 아날로그 감성과 브랜드를 연결짓는 캠페인을 선보이고 있다. 아무리 전자책 e-book이 보급되어도 서점은 사라지지 않음을 알리고자 했던 모카 책방, 스마트폰 카메라로 편리하게 사진을 찍는 시대를 살지만 필름 카메라의 따스함을 전하고자 했던 모카 사진관,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듣는 세상이지만 레트로 감성을 담은 음반을 틀어주는 모카 라디오까지, 소비자가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경험하게끔 매년 캠페인을 이어가고 있다.
아날로그는 분명 현재에도 귀한 가치를 지닌다. “Old is new 오래된 것이 곧 새로운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오래된 가치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 역시 트렌디해지기 위해 매일같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감성만큼은 되도록 아날로그적인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해외로 여행을 갈 때마다 그곳의 벼룩시장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나라의 아날로그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작동하는 구식 폴라로이드 카메라, 솜씨 좋은 핸드메이드 인형, 클래식한 안경테, 세월이 느껴지는 찻잔 받침, 색 바랜 고서, 할머니의 파스텔톤 식탁보, 꼬질꼬질한 옛날 동전, 내공이 느껴지는 만년필까지, 풍부한 영감의 소재들이자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실체들이다. 내 시간이 미래로 나아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과거로 후진하고 있다. 사실 그래서 나는 뉴트로 열풍이 반갑다.
디지털은 망각을 위한 편리함이지만 아날로그는 기억을 위한 불편함이다. 편리한 것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불편해진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