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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May 12. 2024

허페이 견문록

2일 차

오늘따라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호텔에서 우산을 빌려 쓰고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택시를 길거리에서 잡아 본 지 너무나 오래된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택시를 잡은 게 언제였을까? 10년도 넘은 일 같다. 아무튼 기다리면 택시는 안 오는 법이어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한 대를 얻어 타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 택시 기사가 굉장히 말은 굉장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가 외지 사람이라고 하자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호텔은 말하자면 구시가지라고 한다. 말이 구시가지이지 과거에는 조그만 현청이었던 모양이다. 일화에서의 얘기했듯이 허페이는 1949년이 되어서야 성회가 되었다. 그런데 지도에서 찾아보면 이 허페이 시 중심은 돌아가면서 수로가 만들어져 있어 필자는 당연히 방어용 해자를 파 놓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택시 기사의 말이니 뭐 100% 믿을 수는 없지만은 이 수로는 해자가 아니고 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면에 강이 흐른 것은 삼국시대 그러니까 유비 조조 선권이 싸우던 시절부터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이 허페이 지역, 그리고 안후이 지역은 오나라, 촉나라, 위나라 세력들이 교차하는 점에 있다 보니 항상 주인이 자주 바뀌었던 모양이다. 허페이의 유물 출토를 보면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가며 상나라, 주나라 시대를 거쳐 춘추전국 시대에는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돌아가며 점령했다.(https://www.hefei.gov.cn/mlhf/sq/zjhf/lsyg/index.html) 진한 시대의 군현제를 거쳐 남북조, 오대십국 등을 거치며 열 개가 넘는 작은 국가로 세워졌다 점령당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항상 대 세력에게 병합당했으니 국가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작은 현성으로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금 남아있는 허페이의 구 시가지는 그다지 크지 않다. 조선 시대 한양 보다도 작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허페이의 성문은 지금 남아있지 않고 성벽 또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성벽 밖을 흐르는 강물은 의구하다는 것이 택시 기사의 말인데 필자는 솔직히 믿기 어렵다. 성벽과 성문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의탁하여 세워졌다손 치더라도 강동애는 수많은 물길이 있고 평야 지대라 고도 차이가 크지 않아 물줄기가 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이허(淮河)는 장강으로 합류되어 마치 장강의 지류처럼 보이고 있지만 원래 황허, 장강과 함께 황해로 흘러나가는 독립된 강이었다. 그래서 원래 북방과 남방을 나누는 기준이 서쪽은 친링 산맥, 동쪽은 화이허가 자연스러운 경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물길이 막히면서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고 그 호수는 커져만 갔다. 호수 주변은 당연히 홍수가 빈발하고 홍수가 날 때 넘치는 물길이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어 피해는 커져만 갔다. 이를 수당 시절에 장강으로 이끌고 운하를 파서 장강에서 강동의 식량을 화이허를 통해 운반하여 지금의 허난, 그러니까 당시의 수도인 낙양이나 장안으로 가져올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화이허에서 운하를 파서 만일의 경우 넘치는 물이 직접 바다로 빠질 수 있도록 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작고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와 보면 장강이나 황허를 건널 때는 넓고 큰 강을 건너기 때문에 누구나 인지하지만 화이허의 배수구를 넘어갈 때에는 인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서쪽과 남쪽의 물길은 이름은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호수이다. 그러니 허페이 구 성곽의 둘레 물길이 원래부터 강이었다는 말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허페이는 심지어 중화민국 시절 성회도 아니었다. 당시의 성회는 안후이 성의 남부에 있는 안칭(安庆)이었다. 택시 기사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도시의 크기는 안칭이 더 크다고 한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나중인 1949년 안후이성의 군사적 상항을 고려하여 안후이 중심부 소재 도시인 허페이를 성회로 만들었다고 한다.  북방에서 남방을 향해 공격하려면 난징을 공략해야 하고 난징을 공략하려면 먼저 화이허를 건너 안후이를 장악해서 서쪽으로는 우한 방면의 장강을 이용하여 동진하는 군사력을 견제하고 남쪽으로 장강을 도하하여 난징을 공격해야 한다. 안칭은 비록 장강의 북부이지만 위도 상으로 난징이나 수저우보다도 남쪽이고 너무 장강에 붙어 있어 공격받기 쉬운 위치인 것이다. 

허페이도 평원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하고 있어 방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서북부에서 성곽을 둘러 흐르는 강과 넓은 해자는 방어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공습과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는 아무런 작용을 못하겠지만 재래식 전투 상황에서는 충분히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허페이를 중심으로 하는 안후이는 전략 상으로 경과점에 있는 지점이며 사방으로 자원을 수집하고 지원하는 후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국지의 조조가 손권을 치기 위해 대군을 몰고 남하했을 때 그는 안후이를 거쳐서 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서쪽에 있는 유비 형주의 북쪽 관문인 상양(襄阳)을 공격했다. 상양의 근처에는 제갈공명이 살던 롱중(隆中)이 있다. 제갈공명의 천하삼분 전략으로 유명한 유비와의 대화는 롱중의 대화(隆中對)라고 해서 유명하다. 필자는 당시 유비를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쁘게 한 것은 천하삼분의 전략이 아니라 어떻게 형주를 손에 넣을 것인지를 설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누가 글로벌 시장의 최대 기업이 되는 전략을 알려주는 것보다는 어떻게 따뜻한 중소기업 하나를 가질 수 있게 해 주는지가 더 절실하다.

아무튼 조조가 형주를 먼저 친 것은 만일 안후이, 장쑤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면 화이허와 장강을 넘어야 하고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물길과 적군을 무찔러야 한다. 기마병 위주의 북방 군대인 조조는 그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동쪽으로 남하하면 경우에 따라 유비가 거꾸로 상양으로 나와 허난 평원으로 진입 후방을 교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양을 통해 형주를 먼저 치고 수로를 따라 동진하여 취약한 안후이를 먼저 확보하고 강남을 타격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여기서 조조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에서 대패하여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전략만큼은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허페이 박물관 가는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다음 글에서 안후이 박물관에서 만난 중원 남부의 고대 문명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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