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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키 Jun 24. 2020

뽕이 필요하다

천진하거나 달관했거나 

음악을 자주 듣는다. 

윗집 아이가 뛰는 층간소음을 가리기 위해 음악 앱을 켠다. 여러 소리가 중첩되는 웅장한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고른다. 아침, 말라 버석거리는 몸과 정신머리에 부싯돌로 음악을 갖다 댄다. <베란다 프로젝트>의 곡들은 아침에 잘 어울려서 자주 듣는다. 친구들과 집에서 티타임을 가질 때는 부드러운 라운지 음악을 고른다. 오래전 친구가 추천해 샀던 베이루트의 CD <RIP TIDE>도 단골 리스트이다. 햇빛 아래 빛바랜 풀 사이로 지나가는 음악대를 구경하는 기분이다.

베이루트 <산타페> 뮤비. 앞부분이 딱 상상한 풍경인데. 3초 후부터 전혀 다른 전개 ㅎ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JRCTLJQBRC


혼자 이동할 때는 이어폰을 꽂고 '좋아요' 리스트의 음악을 뒤죽박죽 듣는다. 몇 달 전에는 우효의 <민들레>를 100번 들었다. 첫사랑에게 팔 벌려 뛰어가는 듯 풋풋하고도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또 100번 들었다. 연주를 들으며 폭풍 오열했던 경험이 겹치는 영화였다. 박보검의 <별 보러 가자>, 아그네스 오벨, 드라마 <리버>의 <I love to Love>, 브루노 마스, <if you rescue me>, 러브홀릭스, 선우정아, 브로콜리너마저, 에피톤 프로젝트가 두서없이 흘러나온다. 아들이 '좋아요'를 누른 곡도 섞인다. 주로 <주만지>, <스파이더맨>, <토이 스토리>, <업> 등 영화 OST이다. 일상에 BGM을 깔아 두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음악이 없으면 허전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 삽입되어 알게 된 아그네스 오벨. 

 

출산 후 거의 일 년 가까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지 못했다. 청각은 아기 울음소리 유무에만 반응했다. 그러다 좋아하는 선배가 음악 파일을 보내줬다. 가뭄에 단비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부은 물이 흘러가 버리는 쩍쩍 갈라진 논밭이 한참 후에야 조금씩 젖어드는 것처럼 마음이 천천히 채워졌던 기억이 난다. 건조해져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의 기억 탓인지 음악이 없으면 때론 공간이 부풀어 오르는 듯 압박을 느낄 때가 있다. 대화가 끊겼을 때의 침묵처럼. 그러다가 또 어쩔 땐 그 공백이 안심되어 한동안 조용히 지낸다. 가지고 있는 리스트가 한정적이라 같은 노래를 계속 듣다 보니 지겨울 때도 있다. 맘에 드는 곡을 우연히 알게 되는 행운이 자주 있진 않다. 


최근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귀찮았다. 재택근무와 재택학습을 하는 모자가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쓰기 싫은 원고가 쌓여 있다. 미루자.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 내일 돌리지 뭐. 우유와 계란을 주문해 놔야 한다. 귀찮다. 당장 아들에게 밥을 줘야 한다. 그래 미룰 수 없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밥은 뭐해주지.. 진짜 하기 싫다. 어차피 잘 먹지도 않는데. 매일 똑같은 내 손으로 만든 밥... 나도 지겹다. 음악을 들으면 기운이 날까. 쉴 새 없이 떠드는 아들 목소리 사이로 들리기나 할까.


그러다가 읽던 책에서 '아모르파티'란 단어를 봤다. 니체의 철학 개념이란다. 라틴어로 아모르Amor는 사랑, 파티Fati는 운명.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라고. 잠깐, 이거 예능에 많이 나오던 노래 제목 아니야? 박나래랑 한혜진이 춤췄던 곡. 귓가에는 여러 번 스쳤는데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지. 앱에서 검색해 재생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 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노래 가사가 귀에 쏙쏙 박혔다. 그래, 내가 어떻게 다 잘해. 일도 잘하고 원고도 잘 쓰고 애도 잘 키우면 그게 나니. 일단 밥이나 하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면 되지 머.. 오늘은 라면 먹이지 말아야지... 조금은 활력이 솟아났다. 내내 반복 재생하며 쌀을 씻고 멸치 육수를 냈다. 이게 뽕짝의 기운인가. 이래서 어르신들이 트로트를 듣나 보다. 내친김에 알고 있는 최고의 촐싹쏭을 몇 개 떠올려 리스트를 만들었다. 리스트의 이름은 '난리부르스'. 아모르파티 다음으로 오렌지 캐러멜의 '아잉'을 추가했다. 
"좋아서 미쳐 미쳐, 빠져 빠져, 온몸이 저려, 뼛속까지 저려, 찌릿찌릿찌릿하게~" 듣다 보면 정말 온몸에 닭살이 쫙 퍼지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가사는 또 적나라하면서 어쩜 이래 싶다. 휘성이 작사했다는데 정말 엄청난 재능인 것 같다. 이제 감자 껍질을 벗기고 호박을 잘랐다. 또 한 곡이 떠올랐다. 노라조의 <카레>.

"양파 넣고, 감자 넣고, 소고기는 넣지 않아 나마스떼~" 숙제하던 아이도 달려와 합창을 한다. "카레 카레 카레 카레야~ 완전 조아~" 두부 넣어 된장국이 완성됐다. 세 곡을 반복재생하다 하나 더 추가. <달의 요정 세일러 문>과 <카드 캡터 체리>로 스팸을 굽고 오이를 썰었다. 천진하거나 달관했거나 웃기는 노래들이 시간을 빠르게 돌렸다. 

미스트롯에도 나오셨군요. 가슴이 뛰는 대로 가자. 뽕짝으로. 


뽕짝의 기운을 받아 한 끼를 차렸다. 그 뒤로 몇 끼니를 '난리부르스' 리스트와 함께했다. 서울훼미리의 <이제는>과 정수라의 <환희>가 추가됐고 팝송 <Mickey>도 들어왔다. 숙취에 숙취해소약을 먹고 몸이 허할 때 보약을 먹듯 의욕이 쇠할 때의 내겐 뽕짝이 빠른 효과를 낸다는 걸 알았다. 젊었을 때도 이랬을까? 이건 나이 탓인가 체력 탓인가 취향 덕인가. 모르겠다. 다만 새로운 리스트가 추가되어 좋을 뿐이다. 그리고 더 추가해 가고 싶다.
그러니 혹시 기운이 솟아나는 곡을 아신다면 추천해 주실래요? 물론 라운지 음악도, 인디 음악도, 클래식도 모두 모두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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