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왜 읽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고, 쓰지 않았다.
브런치의 자기소개에는 '미끄러지는 순간을 잡아두고 싶어' 쓰고 그린다고 해놓고는,
순간순간이 미끄러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흘러가도록 두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도 어느 상념들은 머릿속의 뉴런 끝에서 맴돌았다.
그중 하나는 '책은 왜 읽어?'라는 동네 엄마의 질문,
또 하나는 '왜 빨간머리 앤이 인기일까?'라는 맥락의 한 페이스북 글이다.
첫 번째, '책은 왜 읽어?'란 질문의 답은 잠시 미루겠다. 빨간머리 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답이 나오니까.
두 번째, 빨간머리 앤이 왜 인기일까? 란 질문에는 먼저 개인적인 팬심을 잔뜩 늘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이유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다.
너무 좋아하니까!
1989년 7월 26일. 교보문고에서 00와 함께.
엄마가 <빨간머리 앤>의 내지에 써넣은 기록이다. 서울로 이사 온 다음 해, 6학년 때 민서출판사에서 나온 5권짜리 빨간머리 앤 시리즈를 엄마가 사줬다. 혹시 모르는 이들을 위해 말하자면, 앤의 이야기는 퀸 학원을 졸업하고, 길버트와 화해하는 <빨간머리 앤>에서 한참을 더 이어진다. 초록지붕에 온 쌍둥이 남매를 돌보며 애본리에서 선생님으로 지내다가(<젊은 날의 앤>), 레드몬드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고 놀고 첫사랑도 만들고(<보랏빛 첫사랑)>, 길버트와 약혼 후 롱디를 하며 중학교 교장으로 일한 후(<무지개 다리를 건너>), 결혼 후 새로 정착한 동네에서도 자잘한 사건사고를 겪는다(<꿈의 보금자리>). 여기까지가 민서출판사에서 나온 앤 시리즈였고, 그 뒤로 앤의 아이들 이야기와, 이웃 이야기, 옆집 아이들 이야기, 앤의 딸이 성장하며 전쟁을 겪는 이야기 등이 다시 다섯 권으로 엮이는데 국내 다른 출판들이 냈고, 지금도 구해 보긴 어렵지 않다.(하지만... 잘 골라 보자... 어떤 책은 번역이나 책의 모양새가 정말 눈물 나게 아쉽다.)
열세 살에 만난 앤을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읽고 또 읽었다. 몇몇 대사는 거의 외울 정도이다. 앤의 영향으로 난 빨간색은 분홍색보다는 짙은 갈색과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고(매튜가 빨간머리 앤에게 옷을 선물하려 린드 부인에게 상담하자 그녀가 권한 색이다), 부엌은 같이 쓰는 게 아니라고(린드 부인과 함께 살기 위해 마리라는 귀하던 손님방을 치우고 부엌을 하나 더 만든다) 배웠다. 무엇보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이 아닐까 싶다.
몽고메리 작가는 고향인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무척 사랑했다고 들었다. 책의 배경이 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은 캐나다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읽었던 내게 빨간머리 앤의 풍경은 '특출나게 아름다운' 곳이 아닌, '내 고향이라 아름다운' 풍경으로 여겨졌다. 그런 풍경을 만끽하는 앤의 자세가 분명 내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자작나무 길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에요. 마리라!"
앤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구든지 그 길을 거닐어 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길은 좁게 구부러진 긴 언덕을 넘어서 벨 씨네 숲을 통과하는데, 숲 속으로 흘러드는 햇빛은 나뭇잎에 반사하여 그 어떤 보석보다도 찬란하게 빛났다. 길 양옆으로 쭉쭉 뻗은 싱싱한 자작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로는 별꽃, 은방울꽃 등 이름 모를 풀꽃과 열매들이 우거져 있었다. 숲 속에는 언제나 향긋한 공기가 감돌았고 나뭇가지에서는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그 골짜기를 지나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거기에 애본리 학교가 있었다.
작은 정원과 텃밭이 있던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갈대숲을 헤치며 놀다가 초등학생 시절 끄트머리에 서울에 온 나에겐 나무와 숲이, 서정적인 풍경이 절실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살던 아파트 화단에 작은 풀밭과 가녀린 나무 한 그루로 만들어진 고작 다섯 발자국 짜리 산책길도 내겐 아끼는 장소였다. 베란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개나리의 무성한 줄기 아래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상상하곤 했다. 도시 속에서 한 움큼의 햇볕과 한 뼘의 풀밭과 한 아름의 덩굴장미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앤이 담아두었던 풍경이 내 눈에서 서울의 한 조각과 만나 상상으로 더욱 넓게 펼쳐지는 게 책의 힘이 아닐까.
단풍구경을 가라는 인터넷 기사의 평범한 제목이 진리를 다시 일깨운다. "단풍이 그림 같다." 단풍을 그냥 단풍이 아니라 그림으로 연결시키는 것, 우리는 경험을 다른 경험으로 연결하고 확장하고 싶어 한다. 현상에서 보편을, 보편에서 개별성을, 개별성에서 동질감을, 동질감에서 기쁨과 위로를, 확장하고, 상상하고 느끼고 전하고 공감한다.
그래서, "언니, 그래서 난 책을 읽어."
미끄러지는 순간들을 붙잡아 보니,
어쩔 수 없이 조각조각나고 흐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