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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키 Nov 12. 2020

집 밖 200미터

집을 나왔다. 

오늘은 꼭 글을 쓰겠다. 다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써서 올리는 모임 톡방에 글을 올리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그동안 머릿속에는 두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감이 휙휙 지나가곤 했다. 그걸 붙잡아 글로 무럭무럭 키워냈어야 하는데... 실상은 말라버린 뇌주름 사이를 박박 긁어 인터뷰 원고를 5개, 칼럼을 2개, 정보성 원고를 5개, 축사 원고만 3개 썼다. 일기는 3번 썼다. 그 사이 내 문장은 깨발랄한 멍멍이처럼 주름 사이를 즐겁게 뛰어 머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강아지는 언젠가 또 돌아오겠지. 그래서 그냥 이렇게 시작한다.


집에서 고작 200미터나 떨어졌을까 싶은 카페. 심지어 카페 창으로 우리집이 보인다. 아이는 1시 50분에 돌아온다. 카페에서 뭔갈 쓰려면 2시간은 있어야지. 누구더라. 카페에 나오면 그래도 커피값만큼은 뭘 하게 된다고, 그만큼은 눌러 있게 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11시 50분까지는 여길 도착해야 했다. 아이와 남편을 학교와 회사에 내려주고 주유를 하고, 세차를 하고, 집에 돌아와 빨래를 걷고, 다시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가려 하는데 주문해 둔 신선식품이 배송되었다. 냉동 냉장 식품만 정리해야지 하는데 아침을 걸러서인지 허기가 진다. 이대로 나가면 빈 속에 커피를 마시게 되니, 밥을 먹어야지. 대충 냉장고를 뒤져 식탁에 앉으니 같이 일하는 팀장한테 전화가 온다. 전자레인지에 덥힌 밥이 식어가는 걸 안타깝게 보며 통화를 했다. 자, 설거지는 놔두겠다. 양파와 오렌지의 자리도 나중에 찾아줄게. 그래도 옷은 챙겨 입어야지! 고작 3분 거리겠지만 제일 좋아하는 스웨터랑 재킷을 골랐다.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던, 옷에 어울리는 가방도 끙끙대며 꺼냈다. 노트북과 무선 이어폰과 책을 넣고 위풍당당하게 이곳에 왔다!

성공했다. 집 탈출! 약속 없이, 일 없이, 내 의지로 집 앞 카페에 와서 괜찮은 커디션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다. 벌써 글도 두 문단이나 썼어. 아 흐뭇하다.... 


자, 그럼 뭐에 대해 쓰려고 했냐면, 달려 나간 강아지 꼬리가 무엇이었냐면,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서쪽 아침 하늘이 연분홍색으로 아주 예쁘다는 것. 그래서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이 떠오르고 그게 떠올라서 더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왜냐면 예술이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증거가 되니까. 

그리고 또 뭐냐면, 그 풍경을 묘사하고 싶은데 정확하게 할 수 없어 주저하게 된다고. 하지만 그냥 느끼는 대로 부족한 대로 그리면 좀 어떤가 라고 그림책 [느끼는 대로]가 알려주었고, 이렇게 카페에 나와 글을 쓰게 해 주었다는 것. 역시 예술은 익스큐즈에 강하다. 

오늘은 또 앤이 한 마디를 보태었다. 

"제가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다며 비웃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머릿속에 커다란 생각이 들어 있을 때는 과장해서 표현해야지 그런 생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 커다란 생각은 과장해서, 작은 생각은 소소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집 밖 200미터로 나와서야, 4200원의 카페라떼를 먹으면서야 이렇게 끄적끄적할 수 있다니. 참 어렵고도 쉬운 일을 오늘 해냅니다. 


뭔가 좋은 거 하나 넣어야지. 앤의 대사를 또 빌어보자. 
"모든 제라늄을 오로지 제라늄이라고 부른다면 제라늄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요? 아주머니께서도 다른 사람들이 늘 아주머니를 '어떤 여자'라고 부른다면 기분이 좋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쟤를 보니라고 부르겠어요."

다른 페이지에서 마리라가 전하는 '유익하면서 쓸모 있는 진리'도 하나.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중요하지,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단다." 

마지막으로. 마리라가 앤을 맡기로 하면서 속으로 했던 생각. 

'어쨌든 우리 둘 다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고,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앞으로 정신없이 바빠질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고생할 때는 고생해야지요. 여태껏 아주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왔는데, 마침내 고생할 때가 되었나 봐요. 어떻게든 잘 참고 이겨 내야겠지요."

정말 어른스러운 자세이다... 내 머릿속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덩치 큰 검은 개가 바로 '어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마다 '나는 어른이다'를 되뇌었다. 난 어른이니까, 해야 해. 할 수 있어. 


자 여기까지 주절 끝. 카페의 마법이 풀리기 전에 발행 버튼을 눌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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