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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키 Nov 19. 2020

한 그릇의 단짠, 짜장면

경기도 주부의 삼천포 일기 


오늘의 글값은 5700원, 오늘의 연료는 오몽주스다. 
 2시간 동안 나는 이곳, 집 앞 카페에 앉아 글을 적을 것이다. 
 
 

어제는 동네 언니의 원룸에 가서 짜장면을 먹었다. 


 어린이집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친구가 오래간만에 쉬는 날이라며 놀자고 했다. 
 마침 마감이 끝나가니 시간도 맞겠다, 멋진 카페를 갈까, 대형마트로 쇼핑을 나가볼까 하는데 언니가 “코로나에 무섭지도 않니! 원룸 가서 커피나 마시자.”했다. 동네 언니가 여차저차 하여 근처에 잠시 구해 놓은 원룸이다.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걸어서 10분 거리 작은 방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코로나부터 아이들 진학, 최근 들인 세탁기와 건조기 이야기까지 줄줄줄 주거니 받거니 읊고 있는데 배가 꼬르륵거렸다. 앗 이게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들은 지 오래이다. 아이를 낳은 십여 년 전 이후론 배가 소리를 낼 정도로 비어본 적이 없다. 허기지면 성질이 예민해지고, 그럼 아이에게 그 성질을 부리기 십상이므로 늘 배를 미리 채워두었다. 그러다 요즘, 아이와 일주일에 서너 번 조깅을 하고, 저녁을 가볍게 먹으면서 위장이 자신만의 공간을 조금씩 가지게 된 듯하다. 드디어 꼬르륵 소리를 낸 것이다. 


“아, 배고프다! 우리 뭐 먹자!” 곧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라 빨리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을 시켰다. 맛있기도 하지만 주문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띵똥 도착하는 속도로도 유명한 동네 짜장면집은 배달원 아저씨가 무척 친절하기까지 해서 나무랄 데가 없다. 오늘은 조금 늦는다? 싶었는데 면을 금방 뽑았는지 탱탱하고 더 맛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원룸. “왜 원룸에서 먹으면 짜장면이 더 맛있지?” “맞아, 집 식탁에서 먹는 거보다 맛있네.” “오늘따라 더 맛있는데?”하며 후루룩 촵촵. 
 
정말 왜, 원룸에서 먹는 짜장면이 더 맛있을까? 

배우 남주혁이 삼시세끼에 출연해 만든 유행어 “이 조명, 온도, 습도… ”에서 알 수 있듯, 주변과 타이밍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러니까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도 만드는 거겠지 - 그리고 최고의 맛에 대한 경험들은 종종 겹치곤 한다. 라면은 딱 한 개 끓여먹는 친구 걸 빼앗아 한 입 먹을 때가 진짜 맛있고, 호빵은 질척이는 회색 혹은 고운 은빛으로 반짝이는 눈 사이로 조심조심 걸어가며 먹을 때가 최고다. 연말 모임의 떠들썩한 자리에서 빠져나와 칼바람을 시원하게 맞다가 홀짝거리는 포장마차 어묵 국물은 또 어때. 그런 경험들은 안 먹거나 못 먹던 음식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커피 맛있는 줄 모르던 때였다. 시댁의 이사를 돕느라 새벽까지 청소를 다음날 이사 와중에 지칠 대로 지친 몸과 추리닝의 추레한 차림으로 집 앞 커피숍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이랬을까. 이것이 감로수로구나. '아, 이래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때만큼 맛있는 커피는 이후로 없었지만 다양하게 맛있는 커피를 때때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궁극의 커피 맛이 피로의 해소와 에너지의 빠른 부스트 업 효과로 인상 지어졌다면, 짜장면은 무엇일까. 이삿날의 대표 메뉴. 한 그릇의 단짠. 고된 몸과 피로한 뇌에 스피디한 쉼표. 젓가락 하나로 후루룩 넘길 수 있는 끼니. 식탁보다는 바닥에 가깝고, 여유보다는 초조랑 친한 메뉴. 매주 무비타임 때마다 시키게 되는 메뉴. 그러고 보니 짜장면은 뭐랄까, 먹기 전과 먹은 후 사이에 까만 선 하나 그어주는 느낌이랄까. 자, 이제 다시 시작!을 빠르게 해주는 메뉴. 그래서 형사들이 취조 중에 이걸 그리 먹는 걸까. 자 먹고 다시 하자! 하며. 


그러고 보니 <살인의 추억>에서도 취조하다가, 형사반장 보면서, 짜장면을 먹지. _ 사진_살인의 추억 중. 

그래서 어떨 땐 그 음식이 먹고 싶지 않은데도 분위기 상 찾게 되기도 한다. 샤워하고 나오는 순간에는 잘 못 마시는 맥주도 맛있을 것 같고, 영화관에 가면 팝콘은 꼭 먹어야 하고, 비가 오면 전을 부쳐야 할 것 같고 말이다. 
언니네 원룸은 사정상 잠시 빌렸던 거라 세간을 다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캠핑 테이블과 접이식 의자를 놓고, 예쁜 테이블보를 씌워놓았지만, 이전 세입자에게 눈을 부라리며 온갖 트집을 잡던 부동산 사장 때문에 못 하나 박지 않고 이래저래 솜씨를 부려 내부를 커버해 둔 터였다. 그 임시의 기분이, 캠핑 테이블의 간이성이, 아이들 오기 전의 조각난 시간이 짜장면의 맛을, 기분을 더 고양시킨 거 아닌가 모르겠다. 뭐, 오늘따라 중화루 주방장님이 면을 잘 뽑아서인 덕이 더 크겠지만. 

이상 원룸에서 한 그릇의 짜장면 가지고 삼천포로 빠져 별 생각을 다 하는, 머릿속이 단짠단짠한 경기도의 주부 일기였습니다. 

* 삼천포 일기라고 제목을 박으니 마음 편히 쓰게 되네요. 예스24의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김하나의 측면돌파, 애청자로서 삼천포책방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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