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채반의 수준이죠.
윤고은 작가의 <빈틈의 온기>를 읽다 말고 쓴다.
나도 그런데! 맞아 맞아, 그렇지, 이런 일도 있었다? 하고 맞장구를 치고 싶은 마음에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판 앞으로 와버렸다. 저자 버전으로 보자면 기록쟁이 3번의 출현이겠다. 저자의 2번 자아- 착각하는 나-는 내 안에도 상주하는데, 안타깝게도 3번-기록하는 나-은 희귀멸종우려종이라 이렇게 출몰했을 때 재빨리 잡아두지 않으면 영영 기록을 못할 확률이 높으며, 3번은 그대로 멸종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윤고은 작가의 2번처럼 잘못 듣고, 잘못 보기 전문에 성격도 급해 착각한 걸 그대로 믿어버리곤 한다. 인천에서 운전을 하다가 '북항'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북한'으로 잘못 읽어 놓고는 '와, 이제 북한 가는 방향도 표시하네. 이제 우리도 통일을 준비하고 있구나!'라고 혼자 벅차 했다. '스파이용 엘리베이터'라는 표지판을 보고는 남편에게 "오빠, 이 엘리베이터는 스파이만 이용할 수 있나봐."라고 말하면서 '근데 스파이용 엘리베이터를 타면 스파이인 걸 들키는 거잖아. 아니면 이 빌딩에 스파이 양성소가 있나?'라고 생각이 내달리다가 '아 맞다, 우리 지금 스파 하러 왔지...' 라고 뒤늦게 깨닫는다던가, 학창 시절에는 '걸레도구함'을 보고 '음... 빗자루는 있나 보네. 걸레만 구하나 보네.'라고 멍하니 생각한다던가.
방향을 착각한 적도 부지기수. 방향감각은 자신있게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고, 길도 잘 찾는 편인데, 왼쪽과 오른쪽을 헷갈려 말하기 일쑤다. 뭔가 좌우로 딱 양분된 것들에는 모두 오작동이 난다. 우회전해야 하는데 '좌회전!'을 외치고, 좌회전해야 하는데 '우회전!'을 외친다. 엘리베이터 닫힘, 열림 버튼도 자주 반대로 누른다. (그런데 이건 정말 >< , <> 표시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얼핏 봐도 헷갈리기 딱 좋은 모양 아닐까? 내가 엘리베이터 버튼 디자인을 한다면 열림은 0, 닫힘은 / 표시로 바꾸겠다!!) 그래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 얼굴 앞에서 문을 닫아버리기도,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을 다시 열어버려 민망해지기도 한다.
가장 곤란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도 딱 두 개로 양분된 공간이지 않은가. 다행히 10번 중 8번은 아차차, 하고 입구에서 멈추고 다시 확인하는데, 한 번은 그대로 들어가 손을 씻고 양치질을 했다. 양치질을 하는 중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려다 말고, 또 들어오려다 말아서 '응? 왜 그러지?'하고 거울을 보니 내 뒤로 줄을 지어 있는 남자 변기... 흐어억 하고 허둥지둥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갔다. 동행에게 "야 나 방금 엄청난 실수를 하고 왔어~~~"라고 머쓱함을 덜어낼 수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소개팅 자리였기 때문이다...
활자들의 도열에서 빈틈이 나면 생각은 예측할 수 없이 엉뚱한 데로 새어버리곤 한다. '화재 시엔 벽을 집고 이동하시오'라는 오자에 단단한 벽을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이동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그려진다. 이런 '말이 안되는' 오탈자가 글로 자꾸 펼쳐지니 재미있는 세상이 보인다.
이런 내가 편집 일 중에 교정을 볼 때는, '잠깐, 이 글은 이렇게 읽으면 다른 의미가 되잖아, 한 번 읽을 땐 괜찮아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 다른 의미로 보일 수도 있겠는데?' 싶어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전하기 위해 빨간펜이 닳도록 고쳤다가 되돌리기를 반복한다. 교정지는 나의 '이럴지도 몰라'와 '그럴 리가 있냐'의 격렬한 접전지가 된다. 다행히 나를 의심할 줄 아는 자아-윤고은 작가에겐 4번과 가까울까?- 가 있어 이 직업이 천직인 것 같기도 하고, 2번 때문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는 내 안의 3번을 좀더 번식시키고, 양성해야겠다.
내 글을 본 지 270일이 지났다고 브런치가 알려준다... 그래, 그냥, 막 써야겠다.
+ 서랍 안에 변명의 글이 담겨 있다. 그냥 넣어두려 한다.
변명의 기회를 갖는 것도 권력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