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님께 드린 보고서 초안에 두 개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나만 알 거라고 생각했던, 문단 정렬이 미세하게 안 맞는 곳에, 큰 파란 별표와 짧은 문구 하나가 적혀 있었다.
‘디테일이 생명이다!!’
사실 인쇄 직전 발견했던 거였다. 에이, 이 정도는 못보겠지, 하는 마음에 귀찮아서 넘어갔을 뿐. 기가 막히게 그걸 보다니. 역시 본부장은 본부장이다. 그 자리에 그냥 올라간 게 아니다. 문단과 입술을 툭 밀어 넣고서 짧은 코멘트를 가만 보고 있다가,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를 바꿨다. “디테일!!” 그게 왜 그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체 업계의 호인이라 불리는 그는 직원들의 자잘한 실수에는 당췌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늘 다정다감한 말투에 별명이 슈가보이일 지경이었다. 그런 그가, 친히 포스트잇에, 왕별표에 느낌표 두개까지 붙이다니… 어쩐지 나만 아는 비밀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다니는 요가원에는 늘 감탄하며 뒤에서 훔쳐보는 두 명의 여자분이 있다. 한 분은 머리가 길고 한 분은 짧다. 두분 다 깡마른 체형은 아니고 선명한 등근육이 아주 멋있고 단단하고 다부진 속근육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짧은 파마 머리를 한 분은 특히 인상깊다. 뭔가 깔끔하고 간결한 인상을 풍기는. 조용히 아주 숙련된 아사나를 척척 해내는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싶어 질 지경이다. 5년은 족히 하셨겠지? 하고 말도 안되는 내 유연성과 실력을 연차 차이로 무마시키곤 했다. 이 분에겐 말을 걸기가 더욱 어려웠다. 원장님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보지 못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아주 조용히 고난도의 자세들을 완벽하게 해내고는 수련이 끝나면 일상복으로 환복을 하고 슥 사라지신다. 그러다 엊그제는 그녀가 요가 매트를 닦는 모습을 봤다. 요가원에서 제공되는 공용매트를 사용하고 나면, 다음 사람을 위해 물티슈로 닦는데 한 시간동안 딱딱한 바닥에 닿지 않게 날 지탱해준 매트에 고마움을 담아, 나도 겉면에 한해서는 나름 정성껏 닦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처음에는 겉면을 꾹꾹 눌러 닦아내더니, 매트를 말아가며 뒷면도 훌훌 훔쳐 닦아내는 게 아닌가. 사실 한 시간가량의 요가 수업이 끝나면 나는 대체로 진이 빠져서 아무렇게나 둥굴둥굴 말아버리는데, 그녀는 면을 뒤로 돌려 최대한 타이트하게, 원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톡톡 가장자리를 넣어가며 말았다.
그 모습이 왠지 몰라도 무척 신기했다. 뒷면을 닦는 건 아무도 모를 텐데, 요가 매트를 뒤로 말든 앞으로 말든 아무도 모를 텐데, 아무리 동그랗고 예쁘게 만대도 아무도 모를 텐데. 남들은 내가 꼼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순전히 그래 보이는 척을 잘 했을 뿐인, 타고난 덜렁이인 나에게, 그 광경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어제는 대신 긴 머리를 한 분께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걸었다.
너무…멋있으세요. 너무 잘하세요.
(사실 요가에는 잘하고 못함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잘한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놀란 눈이 되어, 그리고 아주 신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정말요? 네 정말요!
몇 년이나 하셨어요? 수련한 지, 2년정도 됐어요.
저도 2년이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감사하지만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디테일이 생명이다!!라는 느낌표 2개의 코멘트를 받는 나는, 2년이 아니라 20년이 되어도 그녀들이 디테일을 담아 해내는 아사나는 못해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쩌면 몇 년이 아니라, 한 동작 한 동작에도 저렇게 디테일하게 정성을 담기 때문이겠지. 그게 쌓여 저다지도 어려운 동작을, 이다지도 쉽게 해내는 거겠지. 보이지 않는 디테일도, 쉽게 훔쳐내지 않고 오래도록 신중하게 닦았기 때문에 나는 미처 시도조차 못하는 동작들을 마치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할 수 있겠지.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진가는, 그렇게 나만 아는 디테일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남은 몰라도, 내가 아니까. 그게 오래도록 내 자부심이 될 거니까.
다시는 삐져나온 첫 문단을 본 채로 경솔한 인쇄 버튼을 누르지 않겠다는 바람을 담아, 상태메시지는 아직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