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요리를 한다고? 거짓말~ 라면 잘 끓이는 거 아니야?“
요리가 취미라고 하면 업무를 통해 나를 아는 대부분의 지인들은 말한다. 그렇게까지 반응해야할 일인가, 다소간 욱해서 급진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 올라온다. 이윽고 평소 내 생활을 반추하며 이내 웃어넘기고 만다.
시장의 사이클과 이런저런 국내 경제정책에 민감한 편인 업종에 근무하고 있다보니 소위 말하는 장이 좋을때는, 일주일에 8번은 영업자리를 위해 술을 마셨다. 영업에는 방도가 많지만 미련한 내 방도는 하나였다. 술자리를 갖고 친해지는 것. 최대한 친화력있게, 업무상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거래처가 되는 것. 사람이 응당 그렇지 않은가. 내 경우야 그렇지 않았지만은, 어려운 아버지보다는 편한 엄마에게 속내를 꺼내게 되는 것처럼 말 꺼내기 민망한 어려운 상대보다야 어쨌든 나를 편한 거래상대방으로 느껴야 일을 줄 테니까.
그 결과 30대 초중반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알콜)스케줄이 이어졌다. 점심, 저녁, 주말 그야말로 주야장천 소주잔을 비워냈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지는걸 싫어하는 성향 탓이었다. 선배들이 그렇게 술에는 장사없다는 말을 해줬는데도 들릴 리가 만무했다. 그저 술도 열심히 마시면 되는 줄 알았고, 술로도 지는게 싫었다. 그리고 몹시 서글프게도, 또 잘 먹었다. 그렇게 근 10년간을 생활해왔는데 요리는 커녕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는 사람으로 봐줬다면, 후한 수수료를 쳐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요리를 한다는 것에 지나친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양처감인지를 증명해보이자면, 기억나는 건 예닐곱살 무렵이다. 토요일 아침이면 눈 뜨기가 무섭게 테레비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교육방송을 틀었다. 예나 학창시절이나, 교육방송을 공부의 목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티비 속에서는 그 주의 요리연구가나 대가가 나와서 손이 굼뜬, 그치만 잘생기고 유명한 연예인 MC가 함께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치를 몰아서 방송해줬기 때문에, 오전부터 정오무렵까지 계속 그 앞에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최고의 요리비결‘은 내 흑백요리사였고 냉장고를 부탁해였다. 프로그램 오프닝이 나오면 부리나케 공책을 들고 달려와 쭈구려 앉아서는 간장 3큰술, 설탕 1큰술, 계피가루 1작은술 따위를 받아적었다. 계피가루? 강황가루? 매실청? 당췌 요리에 큰 취미가 없던 엄마가 대장이던 우리집 주방에는 없는 것들이라 저것들이 무슨 맛을 낼까 생각하면서, 한 주동안의 레시피들을 몰아하는 토요일을 기다리며 공책 한 바닥 가득 요리법들을 적어냈다.
나중에 크면 저 프로그램에 나오는, 이름도 낯선 저 향신료들을 모두 구비해놓고 살아야지 했다. 정향, 큐민, 육두구 따위야 먹고 사는데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다. 다 사놓아봐야 기한 내 쓸 수나 있을까 싶고 말이다. 그치만 그게 없어도 있어도 그만인 삶, 설령 기한 내 다 못 쓰고 버리게 된대도 아까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지,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예닐곱 조막만한 키마냥 소박했던 그 꿈을 다 이뤄 버려서는, 찬장 위 넘쳐나는 향신료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까 싶지만 말이다.
내가 왜 요리를 좋아하냐, 장이 안좋아졌기 때문에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김에 곰곰히 생각을 해보자면- 일단 식재료는 나한테 말을 안 건다. 마늘은 가타부타 참견하지 않는다. 오이는 고리타분한 잔소리가 없다. 토마토는 그냥 붉을 뿐이다. 그것들은 그저 고요하게 내가 썰어내고 잘라내고 끓여내고 볶아내기까지, 진득하게 처분만을 기다린다. 나는 오로지 내 생각, 내 자의대로 자유롭게 정형하고 만들어낸다. 이게 섞이면 무슨 맛이 날까. 맛이 있을까.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던 무해함, 그리고 고요함. 그게 내가 요리를 취미로 삼은 주된 요인이지 않을까.
모두가 본인을 증명해보이려, 서럽게도 소란스러운 업계에 살지만 요리를 하는 이 시간만은 나도, 내 앞에 있는 상추도 그저 조용해서 좋다. 하루에도 몇번씩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계량스푼은 그저 든든하고 냄비 바닥이 긁히지 않는 나무 국자는 힘이 된다.
주말이 지나가면 곧 이 꿈결같은 고요함은 사라질 테다. 내 눈엔 미나리, 냉이, 달래처럼 잔잔한 봄의 향과 맛을 내는 재료들은 사라지고 잔뜩 뻑적지근한, 쨍하게 독이 오른 한여름 땡초같은 사람들이 가득해지겠지. 그들과 같이 바짝 독이 올라 또 오늘을 살아내며, 또다시 잔을 부딪힐 거다. 술잔을 기울인다고 성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야채 칸 위에 숙성시켜놓은 제육은 있다. 그러다 운 좋게 계약이 되면 또 제육에 한잔하는 거다. 꽤 괜찮은 거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