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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근기 Jun 03. 2020

사랑곳 전망대에서 나를 만나다

-나의 청춘 여행기 11- 네팔 포카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포카라에 짐을 풀었다. 일주일 넘게 매일 8시간씩 걸었던 터라, 온몸이 뻐근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성준이가 불쑥 사랑곳에 올라가 보지 않겠냐고 바람을 넣었다. 성준이는 티베트 여행을 하다 만난 친구인데, 일정이 맞아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함께 했다. 그러고 보니 포카라 여행이 벌써 세 번째인데 사랑곳에는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곳은 포카라에서 히말라야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작은 산이다. 해발 1,592m에 위치해 있는데, 이 산에서 보면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아주 가까이 보인다고 한다. 보통 택시를 타고 새벽에 사랑곳 전망대까지 올라가는데, 택시 예약은 호텔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카운터에서 택시 가격을 알아본 성준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시 네팔 루피로 한 500루피쯤 했던 거 같다. 왕복 택시비 치고는 조금 비싼 편이다. 성준이는 걸어서 올라가면 되지 뭐하러 택시를 타고 올라가냐고 나를 설득했다. 성준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사랑곳은 레이크 사이드 바로 옆에 있는 산이라, 굳이 택시를 타고 올라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왜 다른 여행자들은 택시를 이용할까? 거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새벽에 사랑 곳에 오르는 이유는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때문에 일출 시간에 맞춰서 전망대에 도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걸어서 올라가려면 적어도 새벽 3시에는 일어나야 일출 시간에 맞춰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그 새벽에 깜깜한 산길을 혼자 올라가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이제 막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마치고 내려온, 산악인들(?)이 아닌가. 매일 8시간씩 걸어 다녔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 사랑곳을 오르는 것쯤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벌써 아침 7시. 게다가 날씨는 잔뜩 흐려 있다. 지금 사랑곳에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안 보일 게 분명하다. 포기할까? 모레 방콕행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는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야 한다. 언제 포카라에 또 올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사랑곳을 걸어서 올라가 보기로 결정했다. 7시 30분 즈음에 간단하게 짐을 싸서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숙소 앞 등산 용품을 파는 가게의 사장은 가짜 노스페이스 가방에 쌓인 먼지를 열심히 털어내고 있고, 네팔 전통 악기를 파는 장사꾼은 아침부터 '레쌈 삐릴리(네팔의 전통 민요)'를 연주하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러닝에 반바지 차림을 한 서양인 트레커들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전형적인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풍경이다.


레이크 사이드의 끝자락에 있는 사거리인 할란촉을 지날 무렵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비포장 도로가 조금씩 검은색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습기를 머금은 흙먼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나가는 비겠거니, 하고 우리는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사랑곳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현지인들이 사는 마을 입구에 있는 계단으로 여기까지 오는 여행객은 거의 없다)에 도착하자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마을 아낙들이 빨래를 걷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일반적인 여행자라면 분명 이쯤에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사랑곳에 올라가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비 오는 날 산 정상에 올라가 봐야 아무것도 안 보일 게 뻔하데.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서 돌아서지 않았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번 끝까지 올라가 보기로 한다.


얼마나 올랐을까. 문득 성준이가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형, 우리 심심한데 노래 한 곡씩 부르면서 올라가죠.” 성준이는 이선희의 'J에게'를 부르며 앞장을 섰다. 그의 노래가 끝나면 내가 바통을 받아 노래를 불렀다. 숨이 차서 노래는 박자고, 음정이고, 뭐 하나 맞는 게 없었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산속에서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산을 올라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난 숙소에서 챙겨 온 노란 우비를 입고 있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비 안은 이미 습식 사우나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걸까?' 길을 걸을 때는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이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볼거리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사랑곳을 올라가고 있는 걸까?   

사랑곳을 한 8부 능선 정도 올라갔을 때였다. 우연히 산 중턱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만났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들 '아니,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외국인들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는 학생도 있었고, 재미있다는 듯 깔깔깔 웃는 학생들도 있었다. 심지어 함께 사진을 찍자고 조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나저나 학교는 어디에 있는 거지? 이 산꼭대기에 학교가 있을 리 없을 텐데... 아이들은 우리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이런 날 학교를 가기 위해 산속에서 나타난 아이들의 모습이 더 신기해 보였다.


아이들과 헤어지고 한 10여분 더 올라갔을까. 파란색 페인트로 사랑곳 전망대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인다. 당연히 전망대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 전망대에는 네팔리 청년 세 명이 앉아,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보며 기타를 치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퍼붓는 날에 산꼭대기에서 기타를 치고 있다니! 역시 세계 어디를 가나 청춘의 시간은 따로 도나 보다. 청춘은 아직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확실하게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한 시기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은지 나름 고민이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춘은 이런 날 산 정상에서 기타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청춘은 틈만 나면 이렇게 무용해 보이는 일에 시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펙을 쌓고, 알바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유용한 일에만 시간을 쓰기엔 청춘은 너무 짧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사랑곳 전망대에서는 히말라야 산군은커녕 물안개까지 짙게 끼어 있어서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젖은 의자에 앉아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땀범벅이 된 우리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기타를 치는 청년의 노래는 거의 소음에 가까웠지만 희한하게 그 날 그 순간의 분위기와 딱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사랑곳 전망대에 앉아 대책 없이 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산을 오를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도대체 왜 여행을 다니는 걸까?" 관광이나 볼거리를 찾아 여행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힐링을 위해서도 아니고, 견문을 쌓기 위해서도 아니다. 먹방이나 쇼핑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뭘까? 왜 내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일까? 왜 사서 고생을 하고 다니는 걸까? 그러다 불쑥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내 마음속 구멍을 메우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같은 경우, 마음속 그 어두운 구멍 덕분에 책상에 앉아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어찌보면 그 구멍은 내 인생의 엔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멍을 그냥 내버려 둔 채 평생을 살아가는 건 역시 쓸쓸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오래된 그 구멍을 하나 둘 메워오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자 열기가 식으면서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우리는 기타를 내려놓고 수다를 떨고 있는 네팔리 청년들에게 인사를 한 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다시 밟고 사랑곳을 내려왔다. 한번 경험해 본 길이여서일까.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사랑곳을 내려와 버스가 다니는 길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치고, 해가 났다. 하 정말... 할란촉을 지나 레이크 사이드로 걸어오는 동안 성준이는 괜히 올라갔다 왔다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날 비와 함께 한 사랑곳 등반은 나에게는 나름 큰 의미가 있었다.

   

여행이란 것은 지금까지 내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을 이곳에 놓아둔 채, 낯선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나는 작가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다. 여행지에서는 그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다니다 보면 그동안 애써 외면해 온 나와, 우연히 마주하는 순간을 만나곤 하는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시켜 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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