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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근기 Jun 16. 2020

조드푸르에서 신발가게 찾기

나의 청춘 여행기 12  -인도 조드푸르

혹시 "인도 기차를 타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오죽하면 이런 말이 회자될까요? 오늘은 조드푸르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 뉴델리역을 찾았는데요. 벌써 걱정이 앞섭니다.   


빠하르간지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뉴델리역은 늘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는데요. 오늘은 유난한 거 같네요. 뉴델리역 앞 광장에서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온갖 종류의 사기꾼들이 바글거리는 위험지역이거든요. 괜히 여기서 멍하니 서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빨리 플랫폼을 찾아가는 게 상책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뉴델리역은 우리나라 기차역과 달리 타는 곳을 한눈에 찾기 어려워요. 플랫폼이 1,2번 3,4번... 식으로 두 개씩 짝을 지어 떨어져 있는데, 일단 육교처럼 생긴 계단을 올라간 뒤, 각각의 플랫폼을 찾아 내려가는 구조예요. 자칫 플랫폼을 잘못 찾아 내려가면 기차를 놓칠 수도 있지요.  


육교처럼 생긴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전광판을 보고 8번 플랫폼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래도 안심이 안 돼서 역무원에게 물었더니, 8번 플랫폼 맞다네요. 인도 여행 한 달만에 나도 모르게 의심병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요.


어,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조드푸르행 기차가 플랫폼에 미리 와 정차해 있네요. 인도 기차와 연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몇 시간 연착은 기본이고, 안개가 자주 끼는 겨울에는 10시간 정도 연착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요. 그런데 아주 가끔 이렇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기차가 있어요. 차라리 모든 기차가 연착을 하면 그 시간을 고려해서 느긋하게 기차역에 도착하면 될 텐데, 이번처럼 제시간에 출발하는 기차도 종종 있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죠.


인도에서는 기차를 타기 전에 우선 등급부터 확인해야 해요. 등급에 따라 타는 칸이 다 다르거든요. 인도에서 운행되는 기차는 기본적으로 설국열차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기차의 맨 앞칸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2Ac(침대가 두 개), 3AC(침대가 3개) 예요. 유럽의 열차처럼 독립된 구조로 되어 있고, 조금 부담되는 요금이지요. 그리고 그 뒤 칸은 커다란 닭장처럼 생긴 슬리퍼 (SL) 칸이에요. 에어컨은 없지만 누워서 갈 수 있는 SL은 가난한 배낭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칸이에요. 그리고 SL 뒤는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칸으로 누울 순 없고, 앉거나 서서 가야 해요. 이 칸은 따로 좌석을 지정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이 엄청 치열해요. 기차가 정차하기도 전에 창문 안으로 몸을 던지는 현지인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저도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일단 기차에 오르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체인을 꺼내는 거예요. 전 자리를 찾자마자 큰 배낭을 의자 밑으로 밀어 넣고, 체인을 꺼내 배낭을 칭칭 감았어요. 그리고 그 체인을 좌석 다리에 꽁꽁 묶어 놓고 자물쇠를 잠갔지요. 배낭을 통째로 기부할 생각이 없다면, 꼭 이렇게 묶어 놓아야 한답니다.


오늘 제 자리는 '어퍼'예요. 인도 배낭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슬리퍼 칸은 U(어퍼), M(미들), D(다운)으로 나뉘어 있어요. 어퍼 칸은 맨 위의 자리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런저런 방해를 받지 않고 목적지까지 편안게 누워갈 수 있는 어퍼 칸을 선호하지요.


가방을 묶어 놓은 다음, 위로 올라가서 손으로 바닥을 쓰윽 문질러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커멓게 먼지가 묻어나네요. 물티슈를 꺼내 바닥을 대충 닦은 뒤, 작은 배낭을 베고 얼른 자리에 누웠어요. 인도에서는 작은 배낭 관리에도 항상 신경을 써야 해요. 기차 안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고 있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치는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전 항상 작은 배낭을 베개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밤기차라서 그런지 오늘은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 승객들도 없네요. 조드푸르는 델리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도시예요. 아마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조드푸르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

아침 8시, 다음 역은 조드푸르니까 내릴 승객들은 미리 준비하라는 안내방송에 잠에서 깼어요. 창밖을 보니 현지인들이 부지런히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네요. 얼른 침낭을 돌돌 말아 작은 배낭 안에 쑤셔 넣고, 밑으로 내려왔어요.


그,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젯밤에 분명 의자 밑에다 신발을 벗어 놓고 어퍼 칸으로 올라왔는데.... 신발이 없네요. 그래요. 도둑을 맞은 거예요. 끙, 설마 신발을 가져갈 줄이야. 그래도 그 신발 도둑은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는 도둑이었어요. 내 신발이 있던 자리에 자기가 신고 다니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간 거 있죠.


신발 도둑이 벗어 놓고 간 신발은 순도 100% 현지인들의 신발이었어요. 검은색 쪼리였는데, 얼마나 오래 신고 다녔는지 밑창 두께가 두꺼운 도화지 정도였어요. 그 쪼리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쪼리는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을 사이에 끈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끈에 문제가 생겼는지, 못으로 고정을 해 놓은 거 있죠. 못을 기역자 모양으로 구부려 뜨려서 끈이 안 떨어지게 해 놓은 거예요. 신발 도둑도 어지간히 가난한 사람인가 봐요.   

그나저나 이 쪼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차가 조드푸르 역에 도착했으니, 이제 기차에서 내려야 하는데요. 역시 맨발로 다니는 것보다는 이 쪼리라도 신고 다니는 게 나을 거 같지요. 괜히 맨발로 다니다 소똥이나 유리 조각을 밟는 날이면 큰일이니까요.


조드푸르는(Jodhpur)는 인도 북부 라자스탄주의 중심지에 있는 도시로, 구시가지 주택의 벽이 파랗게 칠해져 있어 블루 시티(Blue City)라는 애칭으로도 불려요.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가 많기 때문에 선시티(Sun City)라고도 불린대요. 옛날 마르와 르(Marwar) 왕국의 수도였던 조드푸르에는 많은 궁전들과, 요새, 사원들이 있어 인기 있는 여행지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김종욱 찾기>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도시지요.


조드푸르 역을 빠져나오면서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어요. 이 쪼리를 신고 조드푸르를 구경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요. 발이 아픈 건 둘째치고 못으로 박아 놓은 끈 때문에 너무 불편했거든요. 기역자 모양으로 구부려 놓은 못이 엄지발가락을 살짝살짝 긁는 거예요.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시간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지더라고요.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왔어요. 숙소에서 나와 얼마쯤 걸어가자 조드푸르의 유명한 그 시계탑이 보였어요. 시계탑은 조드푸르의 유명한 랜드마크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시계탑처럼 보였어요. 입구에 경찰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할 일이 없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네요.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아 시계탑은 패스했어요. 그보다 시계탑 근처에 형성되어 있는 시장에 눈길이 갔어요. 이 정도 시장이면 분명 신발가게가 있겠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 까요? 옷, 과일, 꽃, 생필품 등을 파는 가게는 많은데, 어디에도 신발가게는 보이지 않네요.  


지난 한 달 동안 인도 여행을 하면서 신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오늘은 인도인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 밖에 눈에 들어오는 게 없네요. 이곳에서는 구두나 운동화를 신은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닳고 닳은 쪼리를 찍찍 끌고 다녀요.


아무튼 신발가게를 못  찾아서 일단 조드푸르의 상징인 메헤랑가르 성부터 올라가 보기로 했어요. 듣던 대로 조드푸르 구시가지에는 벽을 파란색으로 칠한 집들이 많이 보이네요.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조금 가팔랐어요. 성을 빙 둘러싸고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듣던 대로 파란색을 띤 집들이 꽤 많아요. 원래 파란색은 브라만 계급을 상징하는 색이라고 해요. 브라만들은 다른 카스트 사람들과 차별화하려고, 자신들의 집을 저렇게 파랗게 칠한 거래요. 여행자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는 파란색이 실은 계급을 구분하기 위해 칠해 놓은 거라니,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드네요.

메헤랑가르 성을 대충 둘러보고 다시 구시가지 쪽으로 내려오는데 세상에! 지지리 운도 없지! 쪼리 끈이 툭 끊어져 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못을 기역자로 구부려 뜨려서 끈을 고정시켜 놨다고 했잖아요. 그 못이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리더니, 급기야 쏙 빠져 버린 거예요. 쪼리는 그 순간 신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지요.


그렇다고 해서 맨발로 다닐 순 없잖아요. 길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넙적하게 생긴 돌로 못을 다시 박아 넣었어요.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지나가던 현지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네요. 인도 여행을 하며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지발가락이 빨갛게 부어 있었어요. 어제 고장 난 쪼리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못의 각도가 약간 안쪽으로 더 틀어졌는데, 그 바람에 이런 사이 난 거 같네요. 오늘은 정말 신발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요.


조드푸르의 유명 관광지인 'step well(계단식 우물)'을 구경 가기 전에, 일단 신발가게부터 찾아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조드푸르에서 신발가게를 찾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현지인들을 붙잡고 신발가게가 어디 있냐고 물어봤지만, 모두들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다 우연히 한 아이를 만났는데, '신발 가게는 모르겠고, 신발을 수리하는 곳은 알려줄 수 있다.'며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그 아이가 안내해 준 골목으로 들어가니, 신발 수선공이 거리에 앉아 신발 수선을 하고 있었어요. 몇 가지 색깔의 구두약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이 돗자리 위에 올려져 있었지요. "브로큰"이라고 외치며 쪼리를 벗어 건네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쪼리를 수리해 주었어요. 수리라고 해 봐야 뽄드로 쪼리 끈을 고정시키는 정도였지만, 못으로 끈을 고정했을 때 보단 훨씬 편하더라고요. 수리비는 우리 돈으로 한 100원 정도 했던 거 같아요.   


 'step well(계단식 우물)'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우물이 아니었어요. 사각형의 우물은 무슨 성처럼 생겼는데, 깊고 어두워 보였어요. 크게 볼거리는 없었어요. 쪼리를 신고 하루 종일 힘들게 걸어 다녔더니, 일단 좀 쉬고 싶네요. 그래서 우물 근처에 있는 가페에 들어가서 저녁도 먹고, 맥주도 좀 마셨어요. 조드푸르에서의 일정은 이틀이었는데, 신발가게만 찾아다니다 끝난 것 같네요.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똑같은 장소에서도 눈에 보이는 건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조드푸르 하면 '김종욱 찾기'와 '파란색 담벼락'이 기억에 남는다고 해요. 하지만 난 신발가게를 찾아 쩔뚝거리며 걸어 다니던 그 골목길과 신발 수선공, 그리고 수많은 인도인들의 신발이 생각나요. 내 신발을 훔쳐간 도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신발만 뚫어져라 보고 다녔거든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는 날이에요. 신발을 잃은 사람의 눈에는 신발만 보이 듯, 사랑을 잃은 사람의 눈에는 아픈 사랑의 흔적만 보이겠죠. 세상은 그런 식으로, 마음에 어떤 필터를 끼우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 같아요.

                                                                                                                                      

아무튼 다른 건 다 어찌 돼도 좋으니까 다음 여행지에서는 꼭 신발가게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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