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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현 Jul 26. 2019

9. 첫 문장 쓰기

첫 문장을 써내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글쓰기에서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좋은 첫 문장은 글 전체를 함축하게 되고, 글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대표적인 예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첫 문장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스런 벌레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했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이덕형 역, 문예출판사, 2004


쪽수를 표기하지 않은 건, 제가 <밀리의 서재>라는 서비스를 사용해 E-book으로 글을 읽을 때가 많아서, 쪽수 표기를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인용은 책을 펴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마주하는 첫 문장입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이 운영하던 팟캐스트에서 대략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설은 카프카가 첫 문장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계속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초반부에 꼭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소설을 끝까지 읽더라도 독자는 알기 어렵습니다. 『소송』 역시 비슷합니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 『소송』, 홍성광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위의 인용문은 두 문장이지만 기능은 비슷합니다. 『소송』의 첫 장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두 소설 모두, 소설을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변신'과 '소송'이 왜 시작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카프카는 주로 문제의 발생 이후를 다룹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카프카의 소설은 어렵습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사고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은 해당 광고대행사에 있겠으나 저는 무상으로 저의 손가락 노동력을 제공하여 적절한 타이밍에 짤방을 컨텍스트로 활용하고 있으며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간접광고로 활용하고 있으므로 저작권은 괜찮을 겁니다. 이제 여러분은 글이 끝날 때까지 칩수근 성님의 노래를 기억하게 됩니다. 수근 성님은 모델일 뿐 저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는 사실, 알고 계셨읍니까?


전화번호에는 이유가 없을 겁니다. 1577, 1588 등의 번호는 상업용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1577인가 30분을 찾아봤지만 유래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보통 대표번호를 설정하는 까닭이 나름 있을 겁니다. 참고로 112의 유래는 '일일이 알린다'라고 합니다.


90년대 초에는 저런 전화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번호가 있는 다이얼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빙그르르 우측 3시 방향의 쇠까지 시계방향으로 다이얼을 돌립니다. 제가 일하던 대학에 올해 00년생이 입학했습니다. 그 학생들은 위 전화기 사용법을 모를 겁니다. 사용법을 아는 당신은 데헷★ 위 사진은 영리 목적으로 사용 가능한 오픈소스입니다. 미국에 계신 Annalise Batista 님 감사하빈다.


해서 영국의 119는 999이고, 미국은 911입니다. 정확한 유래는 알기 어려우나, 1이 다이얼을 돌리는 거리가 가장 가까워서 들어갔다고 합니다. 긴급시 빨리 걸 수 있게요. 9가 붙은 건 다이얼에서 가장 먼 번호이니 실수로 거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럼 첫 문장의 중요성과 앞뒤가 같은 번호와 112, 119의 유래가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요? 예,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개소리가 이어지는지 궁금하시다면 기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연재는 개소리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식의 흐름을 가급적 착실히 따르기 때문입니다. 위 짤방은 이현민 선생의 <질풍기획>입니다. 최근 손에 마비가 오셨는지, 펜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선생의 블로그에 공지한 내용입니다(...) 시대의 천재가 창작을 할 수 없다는 건 세계에도 더쿠에게도 슬픈 일입니다.


소설, 영화와 다르게 삶은 연결고리가 명확한 기-승-전-결 따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견은 분분합니다. 운명론 신봉하는 사람에게는 심히 불쾌한 말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인생은 '그렇게 계획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라는 말에 익숙하지만 생각보다 삶은 그럴듯한 원인과 적절한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개소리가 참신하면 범죄입니다. 아프면 병원가야죠, 무슨 청춘입니까.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 번 오지게 아프게 만들어 드리면 이것이 청춘이겠다 싶고 막 즐겁고 행복하겠다 그죠? 무기징역 가고싶죠?


1) 문제제기 2) 원인분석 3) 결과도출 4) 문제해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사고방식에 이 익숙합니다. 물론 저는 문장을 쓰는 일도 기-승-전-결을 따르는 편입니다. 이러한 기승전결 사고방식은 한국전쟁 이후 교육제도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해방 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양반이 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거든요, 아마 한 90% 될 겁니다. 논문에서 봤는데 출처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슨샘들 회고록에도 나오는 편인데... 무튼 그러니까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 거의 전부가 북으로 간 겁니다. 전후 한국은 국가 재건이 키워드였습니다. 국가 재건에는 교육도 당근빠따 들어가겠죠.


1945년 당시 문맹률이 70%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제 말기 조선어 금지 정책 탓이기도 했는데, 정부에서는 문맹 퇴치사업을 1960년대까지 유지합니다. 그럼 가나다만 쓰고 읽을 수 있으면 문맹 탈출이냐, 이름 석 자 적는다고 문맹 탈출이 아니겠죠. 글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해서 우리 '글'을 국어 수업에서 가르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문학 교육방식'에 미국 '신비평'을 적용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러니까 신비평이 뭐냐면, 쉽게 말해서 저렇게 XY축을 그려놓고 작품의 정도를 분석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고교 교육까지 받은 '채점식 문학교육'이 신비평식 교육방식의 일종입니다. 정해진 의미가 있고, 상징이 있고, 주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신비평이 100% 그런 건 아닙니다만 문제는 신비평의 교육방식이 한국 교육에서 계속 유지되어왔다는 겁니다. 까닭이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래서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많은 사람이 영원히 문학-독해-비극의 트리니티에 사는 겁니다. 엉엉...


신비평식 교육은 채점이 쉽다는 겁나 큰 장점이 있습니다. 정답이 있거든요. 매뉴얼이 있는 겁니다. 교육에.


왜 신비평의 교육방식을 해방 후 한국에 적용했냐고요? 고교 교육까지를 담당할 '교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가르칠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다양한 방식의 해석이 미덕인 게 문학교육인데, 교사를 가르칠 사람이 없으니,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 레벨의 인재를 키울 방법이 부족합니다. 죄다 북으로 갔으니까. 선생을 가르칠 선생이 부족한 거죠. 그래서 가나다만 쓸 줄 알고 외우는 것만 좀 하면, 평균치만 넘는 선생 취득 자격을 갖추면, 누가 가르쳐도 매뉴얼로 채점하고 등수 세우기 좋은 쉬운 신비평의 접근 방법이 유행합니다. 비약을 좀 해보자면 거의 공장식 매뉴얼이 생기는 거죠. 이후 모든 교육과정으로 확대됩니다. 수학-과학-역사 다 그렇습니다. 


근데, 미국은 60년대 지나면서 이게 실패한 교육방식이라고 인정하고, 수정하게 됩니다. 위의 키팅 선생님이 칠판에 저렇게 적다 책을 다 찢어버립니다. 문학은 그렇게 분석하는 게 아냐!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 즉흥적으로! 자연적으로! 이게 낭만주의인데, 뭐, 넘어갑시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해서 낭만주의 시대가 되면 막 히피처럼 옛날 선비들 하는 것처럼 그냥 노래하는 시인(이들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표현이 그렇다는 겁니다)이 많아집니다. 미국의 문학교육도 각자의 해석을 존중하는, 토론 형태로 변화합니다. 헌데 한국은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 이어지냐면, 2019년 7월 현재까지요. 60년 환갑을 앞두고 계십니다(...) 연구자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한탄합니다. 2010년대에도 1960년대식 문학 교육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이건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교사가 될 준비를 하는 사범대 학생들에게도 매우 큰 딜레마입니다. 다양한 독해방식을 현장에서 가르치라는데, 막상 선생 뽑을 때는 임용고사를 칩니다.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채점식 교육의 '신화'가 '노력'으로 포장됩니다. 노력한 건 맞죠. 다만 기계적으로요. 채점식 교육 방식에는 이해가 특별히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외우면 됩니다. 점수가 잘 나오는 사람은 똑똑한 건 맞지만 현명한 건 아닙니다. 이들은 높은 확률로 '해석 능력'이 부재합니다. 문제 해결능력이 부족하죠. 매뉴얼대로 가니까요. 대한민국 판사 중 일부가 쌍욕을 처먹고 국민 법감정에 위배되는 판결에 익숙한 건 그런 이유입니다. 물론 법이 개판일 수도 있는데 이건 입법부의 문제니까...


거의 모든 고교 교육과정까지, '이해'를 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평가' 같은 게 도입되었지만, 이 '수행평가'를 채점하는 것 역시 같은 역설에 빠집니다. 어디를 어떻게 채점할 것인가? 해서, 매뉴얼이 있죠. 이 매뉴얼을 다양화하는 게 최근 국어교육 방침의 주된 화두인데... 그래서 몇차 몇차 교육과정이 나오는데, 예, 다들 알고 계시는 것처럼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학생들이 신입생 때 대체 왜 성적이 나오지 않냐면, 집으로 쌍권총이 날아오는 게 8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은 게, 술처먹고 놀기 바빠서가 다는 아닙니다.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충격에 빠지는 게, 대학 공부는 많은 경우 이해하는 공부이고 해석하는 공부인 탓입니다. 뭐 괜찮습니다. 성적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건 '신화'니까요.


하늘로 던진 골프채일까요? 아니요, 평범한 순례길의 가로등입니다. 기-승-전-결, 원인과 결과도출 같은 일방향적 사고방식은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예전에 하늘 사진을 찍어서 180도 뒤집으면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유행 처럼 번졌습니다. 단순히 사진을 뒤집는 것, 보는 방식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우주의 시각적 이미지를 감각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구에 서있는 게 아니라, 매달려 있다는 인식도 가능하겠죠. 물리학적으로는 그게 맞겠습니다만 무튼.


한국 사람들은 카프카의 소설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카프카는 원인의 디테일과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문제가 생긴 이후의 일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듭니다. 죄도 없는데 기소를 받는 것,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는 일은 일상에서 일어나기 힘든 사건입니다. 카프카는 문제의 발생 이후를, '진짜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가정하고 문장을 이어 나갑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이러한 설정 이후의 방향성을 '내적 정합성'이라고 부르는 편입니다. 소설에서는 대게 '핍진성+진실성'이라고 하죠. 용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건 학교마다 용어가 다를 수 있겠네요. 저와 일부 교수님과 주변 동료들은 주로 '와꾸'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이 글에서 1577 전화번호, 119와 112의 유래, '아프니까 청춘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썰전> 등을 이용했습니다. 언뜻 이 연결고리는 전혀 연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일들이 이유가 있어서 생기는 건 아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나는 글쓰기의 형식을 파괴하는 연습 중이다"를 말하기 위한 목적에는 다분히 일치하는 편입니다. 


뭐 인생의 아이러니를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문학성을 이 글이 갖춘 건 전혀 아닙니다만, 끼워 맞춰보자면 제 창작 의도는 다분히 의도되었으며, '와꾸'는 맞다는 거죠. 저 농담 아니라 진짜로 레알 마드리드 학교와 동료 사이에서도 글 잘 쓴다고 존중 받는 편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우리는 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모든 시간을 보는 게 아닙니다. 


이야기 속의 시간은 따로 존재합니다. <SKY 캐슬> 이야기의 출발은 시간 순으로 염정아와 이태란의 고교시절 이전까지 올라갑니다. 두 사람은 고등학생 자녀가 있으니 대략 40대 중후반이 되겠네요. 2018년을 드라마의 배경으로 잡고, 두 사람을 1975년생으로 가정하면 두 사람의 고교시절은 1990년대 초반이겠죠. 화면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태란은 어린시절 보육원에서 자란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면 시청자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는 이태란의 유년기까지 있으니, 1980년대 초반이 <SKY 캐슬>의 출발지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SKY 캐슬>의 연대기적 시간 정보는, 1980년대 초반부터 2018년까지 대략 40년치 타임라인이 있는 겁니다.


출처는 임세웅 님의 블로그입니다. https://blog.naver.com/sswlim/70172433156


위의 연보에는 이순신의 주요 행적이 나와있습니다. 이순신의 이야기를 드라마를 본다고 가정합니다. 53세로 돌아가셨으니, 드라마 작가는 위대한 대영웅의 53년치 인생을 모두 보여줘야 할까요? 이순신의 24시간을 모두 보여주는 53년짜리 생방송 드라마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게다가 카메라는 이순신 뒤만 졸졸 따라 다닙니다. 아무리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주인공 1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여주는 53년짜리 24시간 연속 라이브방송을 누가 볼까요?


그래서 작가는 설정한 타임라인 속에서,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사건과 장면을 추출합니다. 똥을 싸는 장면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 아닙니다. 작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 밥 먹고 똥 싸고 샤워하는 장면 따위는 대부분 삭제하는 겁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노인이 바다에 나가 청새치와 분투를 벌이는 소설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노인이 어쩌다 그 바다에서 낚시를 시작했는지, 노인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바다에 나가 청새치를 잡고 그 이후 청새치를 잃어버리는 과정까지를 디테일하게 보여줍니다. 헤밍웨이는 '노인'을 세팅하고, 자신이 주제로 잡은 '인생의 역설'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타임라인을 생략합니다. 이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수준입니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기 위해 대양에 나가 사투를 벌이고도 상어에게 모든 고기를 강탈당하는 이야기" 라고요.


헤밍웨이의 소설은 발표되지 않다고 가정하고, 이런 줄거리의 영화가 개봉했다 가정합니다. 노벨상 뺨 치게 3대 영화제 대상 수상했다고 칩시다. 개봉 후 예상되는 주류적인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헐 뭐임? 그 고생을 했는데 아무 것도 못 가져옴? 2시간 러닝타임 내내 바다만 보여주고, 청새치랑 싸우는 클라이막스는 10분임? 노인 독백만 들어야 함? 이러려고 내 인생 2시간 투자함??? 이게 무슨 명작임? 역시 평론가의 취향 이해 불가. 별점 반 개."


비슷한 영화가 2013년 개봉했습니다. <올 이즈 로스트>입니다. 주인공의 열연으로 전미 비평가 협회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는데, 한국 누적 관객수는 14,000명이었습니다. 처참한 기록이죠. 청새치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혼자 요트를 타던 주인공이 조난을 당해 요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입니다. 2015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만장일치 대상작이었던 <디판>의 국내 관객수는 6,000명이었습니다. 비교적 국내 팬층이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탔을 때, 관객수가 170,000명 정도였습니다. <기생충>은 996만이었죠.


그럼 "평론가 취향 이해 불가, 별점 반 개"가 나쁜 이야기라고 생각하냐고요? 아니요. 인생의 2시간을 투자해 티켓값을 내고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는 것도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책을 사고, 영화를 봅니다. 대상에 대한 평과, 독해는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아래에 있습니다.


고등교육의 독해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 않았나?


바꿔 말하면, 획일화된 독해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9회차인 이 연재는 계속해서 거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나쁜 기법이 아닙니다. 또, 떠오르는 대부분의 정보를 기술하는 글쓰기 방식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재밌습니다. 조회수에 비해 공유수가 많은 편인데, 그런 걸 보면 재밌게 읽는 사람이 꽤 있는 모양입니다.


이순신은 대영웅이 될 운명이라서 몇 척의 배로 왜놈을 때려 잡았을까요? 운이 좋아서? 아닐 겁니다. 한국 사람이 이순신을 좋아하는 건 민족주의 쒸익쒸익 도요토미 개갞끼 아베 개갞끼가 뼛속 깊이 사무쳐서 그런 것도 아니고, 통쾌하게 왜놈을 때려잡아서도 아니고, 드럽고 치사한 왕이었지만 그래도 충성을 바친 장군이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전장에서 물러섰을 때, 고통받을 어머니와 조선의 백성을 (왕놈보다 더) 생각하고, 병사를 독려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전술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인 덕분입니다.


최근 시골 초등학교의 교육현장에는 다문화가정이 큰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2018년 통계청 통계 '등록외국인'이 90만명 정도였습니다. 불법체류자는 20만 내외로 추정됩니다. 2008년 통계청 발표에 따라 2008년 여러 언론에서는 2020년이 되면 체류자 대비 등록외국인이 인구의 5%, 약 200만명을 채우며 다민족 국가가 될 거라고 예측했죠.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120만명 정도이니 예측에 비하면 적은 편입니다만. 


'국민'이라는 범주는 어떻습니까? 국적을 가져야만 국민입니까? 헌데 우리나라는 (제가 알기로) 부모의 국적과 관계 없이 한국에서 태어나면 무조건 '한국국적'을 줍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영국부부가 한국에 여행와서 출산한 아이는, 한국국적을 가지게 되니까 한국인일까요?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는 '단일민족 국가'라는 말이 가능할까요? 시간이 좀 흘렀다고 가정하고, 지금 글을 읽는 분의 손자손녀라면 어떻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이순신에 대해 이런 비판적인 해석도 가능할 겁니다. 고등교육에서는 한국이 '단일민족 국가'라고 가르칩니다. 이순신을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기에, '민족'이라는 말은 국제화 시대, 정책적으로 다민족 국가로의 방향성을 갖추기 시작한 한국의 입장에서 효과적인 주제일까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에게는 이순신을 어떤 사람으로 알려야 할까요?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민족'이라는 가치를 포기하고 폐지해야 할까요?


우리는 <도라에몽>을 보면 진구가 꼭 헛짓거리를 할 거라 예측하게 됩니다. 이건 늘 반복되는 스토리라인입니다. 일본만화는 보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위 만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구를 보는 방식으로 만화를 읽었다는 겁니다. 진구는 왜 항상 약속을 어기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지, 도라에몽은 왜 진구가 실수를 반복할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나 진구의 의미 없는 말을 끝까지 신뢰하는지, 진구는 놀면 인생 조진다는 걸 시간여행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으나 대체 왜 개판으로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어, 제 이야기 같기는 하지만...) 만화니까 그럴 수 있다고요? 


아니요. 만화를 만화로만 읽는 건 어른의 독해방식입니다. 아이들은 질문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질문에 인색한 아이를 어른들이 키운 셈이고, 우리 안에 있는 어른이, 우리 안의 아이들에게 더는 질문하지 않기를 강요한 탓입니다. 


앞서 노을을 무지개로 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대해 말한 적이 있죠. 누구는 도라에몽을 공포물로 볼 수도 있었던 겁니다. 어쩐지 이번 인생회차 살아봤던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죠...? 히치콕의 BGM이 들리는 기분인데...


진구=말썽쟁이, 도라에몽=아낌없이 주는 만능 조력자 라는 독해방식은 모두가 하는 독해입니다. 진구의 부모님이 도라에몽의 등장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건 무서운 부분이지 않나요? 퉁퉁이의 폭력은 반복되지만 만화가 계속 이어질 때까지 퉁퉁이는 계속 아이들을 괴롭힙니다. 진구와 등장인물이 하는 행동 중 적지 않은 부분이, 2019년의 감각에서 보자면 유소년 범죄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모르고 그랬다, 라고 하기에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요.


<크레용 신짱(짱구는 못말려)>은 발간 초기만 하더라도 본래 성인을 타겟으로 한 만화였죠. 그럼 단순히 '만화'들은 위험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시대는 변하고 가치의 기준도 조금씩 바뀌는 탓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우리의 문화를 생각하던 방식으로 우리의 청년과 우리 아이들의 문화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까닭은 모두 정답이 있는 교육방식에 우리가 길들여진 탓이라고 봅니다. 제 모든 질문에 높은 확률로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생각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하고 질문하는데 익숙해지자는 겁니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좋은 예술작품을, 광고를, 게임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간극과 간극 사이를 보는 일입니다. 해석되지 않았던 부분을 읽는 것입니다. 누구도 묻지 않았던 공간에 대해,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인색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와 나쁜 생각을 적겠다고 했으니 늘 여행기를 적어야 할까요? 저는 가급적 의식의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해서 샛길로 가는 생각을 애써 타박해 '이리와 이성놈아 정신줄아 글쓰기의 맥락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너의 글쓰기를 방해하기 위해 <심슨가족>을 틀어버리겠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죠. 저는 <심슨가족>을 좋아합니다. <디스인챈트>는 올해 9월 20일인가 공개된다고 합니다. 행복합니다.


이곳은 제주도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앞은 바다입니다. 저는 여기를 걸어서 건널 수 있을까요? 이건 과거의 사진이니까, 과거의 행위와 결과에 따른 정답은 있으나, 정답을 말하지는 않으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아껴서 무려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성심성의껏 3줄요약 빡세게 얻어가는 거 옴팡지게 열과 성을 다하여 명작을 써야만 하는 것이 작가는 되지 못했더라도 작가지망생의 덕목이지 않은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개뿔, 그냥 읽다 말아도 좋고, 읽다가 피식 웃어도 좋고, 읽다가 생각이 많아져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시면 더 좋고, 세상에 이런 돌아이가 있어서 풍요롭구나, 하면 더더 좋겠습니다. 물론, 저의 개소리는 지금 글을 읽는 사람의 인생에서, 무용할지도 모르는 몇 분, 이 글을 읽는 시간을 훔쳤습니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건 그런 일입니다. 


우리는 일터에서, 나의 시간을 '일'에 투자해 '돈'과 교환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 글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은 인생에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유-투브도 있고 넷플릭스도 있고 왓챠도 있고 스뽀쓰-채널도 있고 웹툰도 있고 뉴스도 있고 세상에 읽을 거리 천지인데,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데 시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언가를 읽고 소비하는 행위는, 사실상 돈을 벌 수 있는 생산활동 시간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기회비용을 소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의 의식의 흐름을 아직도 읽고 있다는 건 당신의 인생 중 소중한 5~10분 정도를 소비 '당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현대문학 작품은 하나의 결로 묶이지 않는 다양한 소재와 장면,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많은 에세이는 고농축 에센스를 담으려 애쓰기 바쁩니다. 그러니 다들 유-투브를 봅니다. 거의 대부분의 글은 재미이가 없그든요. 늘 누군가를 가르쳐주려고 막 안달이 나서 "성공한 보고서를 쓰는 20가지 방법", "20대에는 몰랐던 30가지 이야기", "당신이 모르는 <기생충>의 5가지 디테일", "넷플릭스는 왜 성공을 거뒀는가?" 같은 제목의 글이 됩니다. 목적과 방향과 의도와 실용성을 필두로 쓰여진 글들이죠.


실제 글의 제목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기시감이 듭니다.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2019년의 글쓰기 생존 방식이었죠. 한편 유-투브에는 전문가도 많지만, 워낙 개소리도 많습니다. 필요한 정보만 쏙쏙 볼 수 있는 브런치 같은 플랫폼은 그렇게 생존의 미덕을 갖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브런치를 시작한 유-명한 작가는 못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는 '문학작가'입니다. 애초에 문학이라는 필드는 대부분 야박해서 인터넷에 공개한 글을 잡지에 보내자면 시인과 소설가 등 작가의 입장에서 엄-청 눈치가 보입니다. 브런치는 조회수에 따라 원고료가 나오는 유-투브 같은 시스템이 아니니까, 통계청 통계로 가난한 직업 Top3 중 2자리를 차지한 시인과 소설가 입장에서 브런치 연재는 노동력이 아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거 하면 돈이 나오냐'고 이야기하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비난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쁩니다. 반대로 이들도 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글쓰기가 있고 각자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라고 존중하는 편이거든요. 


이렇게 물을 수 있겠죠. 브런치의 생태계는 작가들에게 열린 형태인가?


이 연재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중구난방한 상상력을 갖추자 으쌰으쌰, 뭐 이런 목적입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가급적 지키려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규칙은 가끔 어긋날 때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기 마련이거든요. 규칙을 늘 지키면서 사는 사람만 조선에 있었다면 우리는 독립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아베아조씨와 극우무리에게 세금내고 있었겠죠. 끔-찍. 어, 근데 지난 10년이 낯설지 않은디?



맷 그로닝의 <디스인챈트>입니다. 심슨보다는 덜 재미있습니다만 저는 이 그림체를 좋아합니다. 뭐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까요. 지난 회차는 비교적 여행글쓰기적 글쓰기에 굉장히 잘 맞는 편이었는데, 이번 회차는 평소보다 물음 던지기도 덜 하고 문학적인 상상력도 부족하고 근데 재미는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쓰는 저는 재미있었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의 반응에 대해서는 괜찮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 글을 쓰는 편이거든요. 첫 문장을 위대하게 시작하지 않았으니 마지막도 흐지부지해도 괜찮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인생은 대부분의 경우에 3줄 요약 빡세게 마른 오징어 짜듯 엑기스 뽑아서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생도 위대하지 않습니다. 제 연재는 제 인생을 닮았습니다. 개판 5분 전이라는 말입니다. 


기회를 주고 모니터링에서 자르지 않으신 브런치 기획팀 감사!


산티아고 이야기를 기대하셨다면 이번 회차는 망한 겁니다. 뭐 이런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제 연재의 미덕이 개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는 무슨 죄라서 판에 끌려 오냐고 물으시면, 고양이판이라고 합시다. 저는 대체로 아무 말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저는 다행이라는 말을 좋아해서 늘 씁니다) 모 회사에 일하게 되었습니다. 백수를 탈출했읍니다. 이 문단은 그러니까, 쿠키영상 같은 겁니다. 근데 계약직입니다. 모든 직원들은 계약을 맺는데 정규직/계약직을 나눈다니 계약직이라는 말은 좀 슬픈 기분입니다. 대신 계약을 채우고 나면 산티아고 포르투갈길을 갈 계획입니다. 다녀오면 또 100회의 연재를 할지, 여기에 더해서 100회에 넣을지는 모르겠으니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내년 7월까지 100회 채우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그든요.


이번에는 글을 쓰면서 가끔씩 문단과 문단 사이에 새 문단을 채워넣기도 했습니다. 가급적 수정과 삽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으나, 이런 원칙도 가끔 스스로 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말이 긴데, 뭐, 그러려니 합시다. 우리에겐 화낼 일이 무척 많으니까요. 사소한 것에 화내지 않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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