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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현 Dec 15. 2021

12.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 홍콩 영화를 떠올리면서

1.

저는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고 많이 보는 편입니다. 왓챠 DB 기준으로 영화는 830편 정도, 드라마는 130개 시리즈를 봤네요. 예전에는 거의 달마다 영화관에 갔었는데 요즘은 OTT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잠드는 편입니다. 평점에는 매우 깐깐한데, 별점 5개를 준 영화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문라이트>, <그랜 토리노>, <사울의 아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시> 등이 있는데 오늘은 여행 이야기 대신 <중경삼림>과 관련한 등단일기를 써볼까 합니다.     


알렉산더 치, <양조위라는 장르>, GQ, 2021.11

https://bit.ly/3m5O3JQ     


위의 링크는 <샹치>에 출연한 후 GQ와 가진 양조위의 인터뷰입니다. 어제는 양조위가 출연한 <샹치>를 보다 잠들었습니다. 양조위의 필모그래피는 어마어마하죠. 당시 홍콩 출신 배우들이 그렇듯 역사물부터 누아르,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에 등장했죠.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해피 투게더> 등으로 90년대 홍콩영화에서 인상을 남겼고 2000년대에는 <화양연화>, <무간도> 시리즈, <색, 계>, <적벽대전> 시리즈를 통해 위의 기사와 같이 하나의 장르로 자신의 연기를 정립했죠. 더없이 인자한 것처럼 보이다가, 허무해 보이기도 하고, 욕망에 들끓는 모습도 보여주는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배우에 대입해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요. 이미지가 좀 다르지만 그 폭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안성기 아저씨가 생각납니다.     



“악인들은 좀 더 복잡한 캐릭터와 동기를 갖고 있어요. 일반적이지 않죠. 그래서 실제 세계에서는 경험하기 어렵겠지만 영화에선 (나쁜 행동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이야기 속을 탐험할 수 있잖아요.”     


주인공에 대립하는 악역으로서의 안티히어로가 입체적 인물로 등장한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보면, 저는 <무간도>가 강렬하게 기억납니다. 여기서 양조위는 사람 좋은 깡패(가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로 등장합니다. 본래 신분은 경찰이지만 언더커버로 조직에 파고드는 진영인 역할을 맡았죠. 이 영화에서 ‘누가 악역인가’는 어느 정도 결이 잡혀있지만, 양조위는 조직에서 자리를 잡아갈수록 경찰이라는 본래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됩니다.     


저는 위의 인터뷰에서 양조위의 마지막 멘트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적어도 “나쁜 행동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이야기 속을 탐험한다”는 말이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양조위가 내년이면 60살이 된다고 하네요. 이 정도 나이가 되면 확고한 자기철학이 생기는 건지, 아니면 이미 젊은 시절부터 왕가위라는 대가 곁에서 좋은 작품에 참여하며 많은 것을 배워왔는지 생각해봅니다.  

    

2.

배우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인간’이 되어본다고 하죠. 좋은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어 어떠한 정서나 주제를 우리에게 쥐어줍니다. 그런 점에서 <중경삼림>이나 <아비정전>은 어쩌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같은 것을 청년들에게 쥐어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두 편의 영화를 모두 대학에 입학한 첫 해 수업에서 교수님과 함께 보았습니다. 학기에 딱 하나 열리는 야간 수업이었는데, 시작 시간은 있어도 끝나는 시간은 없는 이상한 수업이었습니다. 2010년대의 초입이었습니다. 그때는 암암리에 교수님과 함께 강의실에서 담배를 태우고 술을 마셔도 흠이 되지 않는 때였죠.     


맥주를 몇 캔 사서 가끔 담배를 태우며 교수님과 예닐곱 명의 학생과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관과는 달리 암막커튼이 없었기 때문에 창가로 도심의 빛이 간간히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강의실에서 앉아 프로젝터로부터 쏟아지는 빛에 담배연기가 아른거리곤 했죠.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두 편 모두 색감은 다양하지만 흐릿하고 축축한 느낌을 줍니다. 그건 온통 후덥지근하고 종종 비가 쏟아지는 홍콩의 날씨 탓일 수도 있겠지만, 선풍기를 틀어두고 땀을 뻘뻘 흘리는 인물들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이 속해있는 관계 자체가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리는 전화는 통화가 되질 않고


우선은 담배를 태우고 오겠습니다.     


오늘은 12월 15일 수요일입니다. 보통 이번 주가 당선 통보 피크라고 하는데, 이번 주는 그 흔한 스팸 전화도 오질 않네요. 제가 근무하는 건물 옥상에서는 청와대 지붕이 보입니다. 대게 신문사 건물도 근처에 있죠. 청와대는 90년대에도 지금도 외관이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인왕산과 북악산의 산세도 조선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겠죠. 밤에는 그 풍경이 조금 달라집니다. 도로와 주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산과 도시를, 광화문 주변을 밝히고 있으니까요.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해마다 지층은 자연적으로 몇 센티미터씩 높아진다고 합니다. 최근 광화문 공사가 한창인데, 그 아래서 조선시대 건축구조 등이 발굴되고 있는 건 수백 년 동안 쌓인 지층 때문일지 아니면 증축을 통해 묻어버린 층위가 많아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스팔트를 깔고 날마다 살수차가 도로를 씻어내고 청소부 아저씨들이 거리를 쓸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도시에는 지층이 쌓이지 않겠죠.     

영화나 드라마, 문학과 같은 예술작품은 대게 필름과 지면 따위에 고정된 상태로 남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쥐어주는 무엇이 있죠. 누군가는 그것을 아우라라 부르고 누군가는 시대정신이라고 부르지만, 중요한 것은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3.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아비정전>보다는 <중경삼림>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비정전>의 대사가 지금 느끼기에는 너무 느끼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중경삼림>은 특유의 핸드 헬드 기법으로 한 달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촬영이 완료되었다고 하죠. 도시와 인물을 둘러싼 흐릿한 이미지들, 초점을 잃고 어지럽게 흔들거리는 카메라의 구도,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 이런 것들이 제가 <중경삼림>을 더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주인공은 달리고 또 달립니다


빛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죠.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해 우리를 밝힙니다. 어딘가로 숨지 않으면 언제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영어로 계몽(啓蒙)은 ‘enlightenment’라고 표기합니다. 단어의 구조를 살펴보면, 빛-안으로-들어가는 일 정도로 풀어서 쓸 수 있겠네요. 프랑스어로는 ‘lumières'입니다. 이 단어는 빛에서 유래해 지식, 문명 등을 비유하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한자어를 풀이하자면 어둠(蒙)을 여는(啓)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잠시 철학자의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미셸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보들레르의 예를 듭니다. 보들레르는 ‘산책하는 사람’으로, 그 산책의 과정 속에서 발견해낸 이미지를 포착해 비틀며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던 시인이었습니다. 푸코는 근대(Modern)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을 ‘산책하는 태도’ 속에서 ‘현재의 가치를 반성하고 파괴하고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관찰하고, 생각하고,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다시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인으로서 가져야할 ‘계몽’의 과정이며 덕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극장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렇죠 좌석 색깔만 다르겠습니다만 출처는 핀터레스트 EYE Filmmuseum 님의 사진입니다.


아무렇게나 덧붙이자면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나 선사시대에 살았던 먼 조상이나 모든 인간은 자연광이든 인공광이든 빛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밝은 빛에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어두운 공간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좌석에 앉아 우리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같은 공간에 앉은 사람들과 그 ‘느낌’을 공유합니다. 영화 속 이미지와 이야기가 사람마다 느껴지는 게 다르겠지만,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암전된 상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어쩌면 아주 원초적인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침대에서 느끼는 경험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내 사적 공간 속에서, 타인의 갑작스런 침입이 없는 상태에서 경험하는 어둠과, 타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영화관에서 느끼는 어둠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어쩌면 영화관은 그 찰나의 시간을 통해, 스크린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입장시키기 위해 일종의 세계-단절감을 만들어내는 모양입니다.     


4.

보통 우리는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로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쓰지 않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은 백지를 대단히 두렵게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거죠. 저는 중고교 시절 연필 소묘를 좋아했고, 한때 예술학교에 진학하려 준비했을 정도로 열심이었죠. 석고 소묘로는 시대회를 거쳐 도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니 꽤나 열심히 했었습니다.     


요 아저씨의 투턱을 제 아버지의 얼굴보다 오래 들여다보았습죠


소묘를 할 때는 직선을 사용해 틀을 잡고, 그 선의 강약을 조절하며 쌓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입체감을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 빛이 닿는 조절 정도를 얼마나 잘 묘사하는지, 형태나 질감이 얼마나 일정한지에 따라 그 평가를 하게 됩니다. 일종의 테크닉을 보는 과정인 셈이죠. 저는 그렇게 4절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몇 시간이고 석고상을 그리며 나를 잊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잊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은 일종의 도피처였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복제’하는 과정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예술학교를 준비하다보면 ‘발상과 표현’이라는 걸 배우게 되는데, 제시된 주제어에 따라 정물을 배치하고 구도를 잡아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스케치로 구현하게 됩니다. 저는 수채화가 너무 어려웠고, 결국 미대에 진학하지 않았는데, 집이 가난해서 미술학원에서 쓰는 물감이며 학원비를 줄 형편이 되지 못했던 까닭도 있고, 어쩌면 제 자신이 ‘잘할 수 없는 영역’을 느끼고 있어 줄곧 석고상만 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를 얼마나 재현(representation)해내는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복제’의 영역이냐 ‘재창조’의 영역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석고상을 그리는 행위는 ‘복제’와 ‘기술’의 영역에 가깝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글은 사진기술의 발달로 회화적 경험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가를 포착한 글인데, 이전까지의 ‘복제’는 예술과 거리가 멀었지만 사진기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적 경험’의 층위가 달라지게 되었죠. 예술은 기술적 영역에서부터 물질을 구성하는 ‘빛’을 잡아내기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상을 봅니다만 사진사가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결코 온전히 직접 볼 수는 없죠 출처는 unsplash 의 Nijwam님입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행위는 ‘빛’으로부터 얼마나 변화해왔을까요. 여기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자주 ‘빛’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글을 쓰곤 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탓도 있지만, 그 ‘빛’이 드리우는 과정 속에 생겨나는 그림자와 ‘빛’이 비추는 정물을 배치하며 시를 씁니다. 이 과정에서 상상 속 저의 눈은 마치 카메라의 렌즈처럼 작동하게 됩니다.     


5.

우리는 이미 ‘손 안의 영화관’을 가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스크롤을 통해 기사와 정보를 읽는 시대는 90년대에 이미 시작해버렸죠. 따라서 사람들은 이제 ‘글’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유튜브와 웹툰과 뉴스 기사를 통해 자신이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그 해석의 속도마저 조절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영화관에 앉아 동일한 시간 동안 동일한 이미지를 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 읽기를 힘들어하지요.     


이런 시대에 대체 왜 시를 쓰고 있는가, 저는 양조위와 <중경삼림>을 떠올립니다. 지도교수님의 해석을 빌리자면, 『시론』의 저자인 김준오 선생은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시인은 현재에 앉아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영원한 미래 속에 남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시인은 예술가 정도로 대체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오겠습니다. 아직 전화가 걸려오는 곳이 없거든요.     


저는 어떤 뚜렷한 이미지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소설을 썼고 지금은 시를 쓰게 되었죠. 한때 단편영화에 더러 출연하거나 제작진으로 참여하거나 했지만 영화보다는 글쓰기에 더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지도교수님의 해석 때문일 수도 있고, 저는 관객일 때의 영화를 더 사랑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인은 아무 것도 없는 지면을 바라보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상상하게 됩니다. 하얀 지면을 바라보며 손으로 쓰거나, 타자를 치거나, 어쨌거나 세계를 상상하고 그 속에 해와 달을 두고 날씨와 시간을 만들고 정물과 인물을 둡니다. 거기에는 빛이 드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글자는 지면에 조금씩 쌓여갑니다. 때로는 인물이 없을 때도 있고 때로는 의미를 희석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도 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만 알아차릴 수 있는 의미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 속에서 독자를 시 속으로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한 편의 글로 정서를 전합니다. 강렬한 빛이 우리의 앞을 가리게 되는 것처럼 모든 순간에 빛을 전달해 시어를 포착할 수는 없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관조하는 동시에 그 빛을 조절하는 무대 관리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직조된 시의 정서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각기 다른 체험 속에서 다양한 정서를 경험하는 것처럼, 다양한 층위로 전달됩니다. 마치 직선을 쌓아 한 장의 그림이 탄생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입니다.     


<중경삼림>의 인물들은 어지러운 카메라 속에서 어둡고 습한 홍콩의 도심을 빠르게 걷고 또 달립니다. 지금의 제 나이보다 어리지만 '청춘'이라는 한 시절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또 아시아 사람이자 자본주의에 속한 인물로서, 대도시의 구성원으로 우리는 세계를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저는 '달린다'라는 행위와 그 현장감을 전하는 핸드 헬드의 이미지를 지금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와 사진은 빛을 활용하는 예술이지만, 글은 어떨까요. 저는 아직 답을 모르겠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은 시각적인 무엇을 ‘보는’ 게 아니라 ‘상상’하니까요. 글을 읽는 사람은 이 글을 읽으며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글쓴이를 상상할 수도 있고, 제주도의 한적한 시골 바닷가에서 노트북을 펼친 글쓴이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저는 청와대가 보이는 빌딩 어딘가에 앉아 타자를 두드리고 있지만요. LED 조명이 하얗게 머리 위에서 내려오고, 타자를 두드릴 때면 커서가 반짝거립니다. 오늘은 흐린 탓에 해가 잘 들지 않고, 불을 끄면 사무실에서는 모니터만 반짝거리고 있겠죠.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뚜렷한 이미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렌즈가 빛을 포착해 프레임 속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달리 글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체험을 기반으로 ‘상상’의 영역 속에서 작동하고, 앞에서 적은 것처럼 상상 속 이미지를 비추는 광원은 누구에게나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각각의 이미지를 다르게 갖고 있더라도, 시는 ‘정서’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그 정서는 빛 속에 숨은 상태로, 상상 속에서 전달됩니다. 저는 그래서 시를 쓰게 되었죠. 물론 나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의 형태와 모양이 언제까지나 온전히 같을 수 없다는 그 아이러니 때문에 저는 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전화는 걸려오지 않는군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영화 같은 일은 언제 일어나는 걸까요.


양조위는 어디가고 <중경삼림>은 어디로 갔냐고요?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양조위와 <중경삼림>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테니까요. 구름이 가고 빌딩 사이로 해가 들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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