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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기술서_나는 회사에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직장인들이여, 경력기술서를 쓰세요

by 어른이 된 피터팬

경력직 선배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당장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경력기술서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그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경력기술서는 단순히 다음 회사를 위한 준비물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필요한 문서라는 것을.


이직 준비 < 자기 점검


나는 기록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하지 못하면 배움도 감정도 의미도 결국 휘발된다. 그래서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일상을 기록해 왔다. 하지만 정작 내 경력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회사 업무의 절차로서 기획안을 쓰고 결과보고서를 작성했지만 그것은 조직을 위한 보고용이었지 나를 위한 기록은 아니었다.


퇴사할 결심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보다 빠르게 기회가 찾아왔다. 퇴사한 선배가 지인 추천을 제안해 온 것이다. 전에 함께 일한 팀장님이 새로 옮긴 회사의 HRD 포지션이었다. “지금 이 경력이면 그곳에서 충분히 빛을 발할 것”이라는 응원과 함께 다음 주까지 서류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한 기회는 부담스러웠지만, 이번 기회에 나의 6년을 제대로 정리해 보자는 마음으로 MS 워드를 켰다.


막상 쓰려고 하니 막막했다. 분명 많은 일을 해왔는데 숫자로 딱 떨어지는 임팩트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변명을 해보자면 HRD 업무의 특성상 결과는 숫자로 환산되기 어렵다. 만족도, 참여율, 주관식 피드백. 그동안은 이것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내가 만든 성과의 가치를 설명하기에 충분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만족도가 나타내는 진짜 가치는 무엇인가?

참가자들의 피드백 속 워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직과 구성원에게 나타난 작더라도 실질적인 변화는 무엇인가?

질문이 바뀌자 비로소 단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장이 아니라 사고방식


처음 쓰는 경력기술서는 어려웠다. 그래서 방법부터 찾았다. 유튜브를 보고, 블로그 등에 올라온 다른 사람들의 경력기술서를 참고했다. 대부분의 콘텐츠는 AI를 활용한 작성법을 다루고 있었다. 좋은 프롬프트만 있다면 내 경력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니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원자들의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모두가 AI를 잘 활용하게 되면서 문장은 점점 더 비슷해졌고 차별화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우리 회사에서도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비슷한 고민을 했다. 좋은 프롬프트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이른바 ‘있어빌리티’ 능력이 뛰어난 지원자들. 상향평준화된 지원서 속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그래서 AI 사용 비율을 탐지하는 도구까지 도입했지만 또 다른 딜레마가 생겼다. 이것은 성의의 부족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대의 역량일까? 결국 채용 담당자가 들여다보는 것은 문장의 유려함이 아니라, 그 문장 뒤에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어떤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사람인지.


나 역시 신입 시절, 자기소개서를 꽤 잘 쓰는 사람이었다. 서류 합격률 90%를 기록하며 1년 동안 후배들의 자소서를 첨삭해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던졌던 질문이 있다. “비슷한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했는지보다 어떻게 했고, 왜 그렇게 했는지가 더 중요해요.” 그때는 당연하게 알고 있던 말이었지만, 막상 내가 경력기술서를 쓰는 입장이 되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요구였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자꾸만 나열하고 싶어졌다. 내가 해온 일들을 최대한 많이 보여줌으로써 열심히 살아왔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글은 힘을 잃었다. 메시지는 흐려졌고 읽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경력직 채용은 신입 채용보다 더 냉정하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 큰 영향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어떤 사고과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어떤 역량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 우리 조직에 맞는 사람인지 강력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과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


고민 끝에 지인 추천 자리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직을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이 충분히 여물지 않았고, 단순히 좋은 기회라는 이유로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제대로 된 경력기술서를 써보기로 결심했다. 퇴근 후와 주말을 활용해 2주 동안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몸은 피곤하고 눈과 허리가 아팠지만 마음은 오히려 충만해졌다.


내가 해온 일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을 만들어가면서 묘하게 자존감이 차올랐다. ‘나 꽤 잘해왔구나. 정말 고생 많았구나.’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느끼던 안정감과 성취감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결과 위에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퇴사한 선배들에게 받은 첨삭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앞에 배치해야 하는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피드백은 혼자서는 보지 못했던 관점을 열어주었다.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서 설계하는 사람으로


경렵기술서를 쓰면서 크게 달라진 것은 관점이었다. 그전까지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 일이 시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까지 연결해서 보게 되었다. 시장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고, 앞으로 무엇을 더 쌓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단순히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커리어에 필요한 일을 선택하고 설계하게 되었다. 관련 업무가 있다면 먼저 손을 들었고, 권한이 없다면 기존 업무 안에 새로운 시도를 덧붙였다. 필요하다면 협업을 통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조금 더 일찍 이 관점을 가졌더라면 더 선명한 의미를 느끼며 즐겁게 일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다행이다.


경력기술서를 쓰기 시작할 때는 ‘나는 회사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있었는데, 다 쓰고 나니 ‘나는 어떤 가치를 만들고 싶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이 남았다. 즉, 직장인은 수동적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결과물을 내더라도, 내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일의 문법과 밀도는 달라진다.


덜 억울하게 일하는 방법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덜 억울하게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회사를 위한 노동이면서,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확장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존재 가치는 본질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회사와의 계약 관계 안에서는 나의 기여를 설명하고 입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력기술서는 그 과정을 가장 정직하게 담아내는 도구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모든 직장인에게 권하고 싶다. “경력기술서를 쓰세요!”라고(마치 내 경력직 선배님들이 내게 말씀해 주셨듯이). 단순히 이직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해온 일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자, 동시에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가치를 기준으로 일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나의 경력을 기록해 나갈 것이다. 꼭 그렇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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