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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Dec 03. 2024

종교재판의 서막

제노사이드

1. 이단의 시작

기독교는 기원후 313년 세계의 중심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공표하면서 정식으로 공인되었고, 325년 처음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수없이 난무하던 교파와 교리들을 하나로 묶어 기본적인 신앙 체계와 제도의 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397년 카르타고 대교구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불굴의 성인 아타나시우시가 목숨을 걸고 주창했던 신약 27권의 경전을 마침내 정경으로 확립하였다. 수십 개의 복음서와 관련 경전 중에서 27권만이 정경이 되었고 나머지는 외경으로 치부되어 분서가 되거나 나그함마디 같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감추어졌다. 이제 외경을 소지하고 있거나 그 내용을 읽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규정되어 파문되거나 추방당했고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오직 하나의 신과 하나의 성경과 그리고 하나의 철학만이 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4세기 당시 새롭게 확립된 로마 그리스도교에 대항하는 세력이 흔히 영지주의하고 부르는 다양한 형태의 종파들이었다. 로마의 국교가 된 가톨릭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영지주의자들에게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고 노골적으로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가 무엇이길래 가톨릭은 그토록 집요하게 그들을 탄압했을까. 당시 영지주의라고 분류된 교파들을 대충 살펴보자면, 먼저 아타나시우스의 종교적 정적이었던 아리우스파,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발원한 세트파의 영향을 받은 발렌티누스파와 바실리데스파, 유럽의 마르키온파, 페르시아의 만다야교와 마니교, 그리고 오피스파와 카르포크라테스파 등 다양한 형태의 영지주의자들이 명멸하였다. 그들 각각의 교리를 보면 플라톤주의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대단히 복잡한 내용으로 짜깁기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 내용들을 설명할 수는 없고 대충 도식적으로 들여다보자면, 먼저 그노시스 즉 영적 지식을 스스로 깨달은 후 그것을 통해 신성에 도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바로 그 그노시스는 필수적인 구원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물질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다분히 신비적이며 밀교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교파에 따라서 이원론을 내세우기도 하는데, 영적세계는 선이고 물질세계는 악이라는 기본 틀 아래, 빛과 어둠, 영과 물질, 영혼과 육체 등이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여 결국 최종 목표는 빛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물질적인 인간은 그노시스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노시스는 불교의 무명과도 맥이 닿을 수 있다. 그리고 가톨릭의 원죄와 회개를 믿지 않고 대신 환영과 깨달음을 믿었고, 예수를 성자로 믿지 않고 그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성한 존재로 믿었으며, 하위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는데 그 신이 야훼이고 상위의 신은 신성이라고 설파했다. 또한 불교의 윤회를 믿었는데, 물질계는 현존하는 하급 세계이며, 악한 행위를 일삼으면 계속 물질계에서 윤회를 하고, 그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으로 그노시스를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분파와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가 중세로 접어들면서 가톨릭의 탄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방으로 쫓겨났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리스에서 발원한 네스토리우스파의 경우는 페르시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 당나라까지 가서 경교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상당한 문헌이 20세기 중엽 이집트 나르함마디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콥트어로 쓴 12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52편의 작품들이 있었는데, 그 문헌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토마스복음 같은 영지주의 문헌도 많았지만, 헤르메스주의와 플라톤의 국가 번역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문헌은 동굴 깊은 곳에 항아리에 담아 보관한 것을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게 분명했다. 나그함마디의 위치가 파코미아 수도원과 가까운 것으로 보아 367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주창한 신약 27권의 경전이 정경으로 확정되면서 수도원장이 불경스러운 외경이 되어버린 이런 문헌을 영원히 감추기 위해 그 동굴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잠들어 흙이 되어야만 했지만 다행히도 흙이 되기 전에 현대인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아마도 더 늦었다면 정말 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사적으로 볼 때 이 발견은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백가쟁명식의 논쟁을 벌였는지 확인할 수 있고 또한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종교적 사유의 확장을 촉발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예수처럼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의 욕망은 예수의 말씀을 편협하게 해석하여 세상을 숨 막힐 정도로 완고하게 만들었고, 그런 와중에서도 또 다른 인간들은 권력욕을 표출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세속 권력이란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종교 욕망과 세속 욕망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화합하기도 하고 때론 대립하기도 하면서 중세의 끝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그런 틈을 노리고 기존 기독교의 교리를 다르게 해석하는 교파들이 끊임없이 발호하였다. 초기 기독교 시절 이미 많은 교파들이 이단으로 몰려 사라지거나 동쪽으로 쫓겨났는데, 이젠 가톨릭의 중심에서 다양한 형태의 이단들이 민중의 삶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신과 하나의 교리만이 세상의 진리이며 법이었던 유럽은 그런 이단들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이단은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해치는 사탄과 같은 존재였고, 영주와 같은 세속 권력들에겐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트리게 하는 매우 불순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은 영합하여 자신들이 이단이라고 규명한 공동체를 해체하고 말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종교재판소는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지되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어기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불러오게 했다. 그것은 의도적이면서 조직적인 종교 학살이었다. 지금 논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종교재판의 시작점 즈음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을 제노사이드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2. 이단 카타르교     

12세기 프랑스는 영국과의 영토 분쟁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영국의 헨리 2세가 혼인과 유산 상속 등으로 선대에 이어 현재 프랑스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서쪽 땅을 봉토로 삼아 일명 앙주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프랑스 카페 왕조가 영토 분쟁을 일으키며 호시탐탐 그 영지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1214년 부빈전투에서 프랑스의 존엄왕이라고 불리던 카페왕조의 필립 2세가 앙주왕국을 물리치면서 땅을 되찾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차후에 100년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3차 십자군 원정에 필립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영국의 리처드 1세와 함께 꿈의 연합군을 만들어 직접 참전하였고, 비록 리처드왕과 불화로 중도에 회군하였지만 그래도 팔레스타인 아크레까지 가서 성을 함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사실 12세기 내내 프랑스를 비룻한 유럽은 2차, 3차 십자군원정이 이어지면서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가톨릭과 이슬람의 대충돌로 인해 잃는 것도 많았지만 얻는 것도 많은 기나긴 전쟁이었고, 그로 인해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을 추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혼돈의 시기에 영지주의를 표방한 다양한 기독교 종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신흥 종파는 800년 동안 유럽의 유일 종교로 고착화되었던 가톨릭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난 일종의 종교 운동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권력화 된 교구의 구조적 문제점과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부정부패 등을 비판하고, 이와 더불어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12세기에 등장한 종파나 개혁 운동가들을 보면, 9세기에 등장한 바오로파의 계승자이면서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은 요세핀파, 사제이면서 가톨릭의 내부 개혁을 주장했던 피에르 드 브루이스와 로잔의 앙리 수사는 개인적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리고 범신론을 내세운 아말리크파(Amalricin), 누구보다 종교개혁을 원했던 아르놀디스트파(Arnoldist), 청빈과 금욕적 삶을 추구한 발도파(Waldenses), 그리고 당시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던 카타르파 등이 있다. 이중에 발도파는 이단이라고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종교재판과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등 숱한 멸종 위기를 겪으면서도 현재까지 살아남아 감리교와 합쳐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감리교와 발도교 교회 연합'이라는 교파가 되었다. 아마도 중세 이후 현재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종파일 것이다.

      

발도파가 프랑스 동부지역에서 은밀하게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면, 카타르교는 남부 랑그독에서 보다 크고 광범위한 교세를 떨치고 있었다. 전반적인 교리를 볼 때 카타르교는 발도교보다 상대적으로 급진적이었다. 무엇보다 발도교가 수용하지 않았던 영지주의 색채가 짙은 이원론을 카타르교는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카타르교는 그노시스적 요소가 다분했던 동방의 종파 중에 하나인 보고밀파와 바오로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십자군 원정에 나섰던 기사들이 복귀하면서 가지고 온 복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아무튼 카타르교는 기존 교회가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영적으로도 타락하였다고 비판하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교회의 불편한 문제점들은 이미 민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어렵지 않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단지 교권이 곧 권력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사제들은 공공연하게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기도 하고, 남색을 즐기기도 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 면제부를 파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귀족들의 자식들을 사제로 키워 자연스럽게 권력과 결탁하기도 하는 등 가톨릭의 기본을 거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비판을 할 수 없었던 민중의 이런 불평불만을 바로 신흥 교파가 대신 해소해 주었던 것이다. 

     

카타르교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원론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영지주의의 핵심인 이원론은 서로마권의 다른 이단종파에서는 채택하고 있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거의 유일하게 카타르교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창조주는 두 개의 존재로서, 영적 창조주와 물질적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 둘은 영원히 화합할 수 없고 평행하며, 혼돈의 세계를 주도하는 물질적인 존재를 버리고 영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설파한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완전성을 부정하고, 예수의 부활은 단지 환생의 상징일 뿐이고, 십자가의 상징성을 부정하며, 세레자 요한을 사악한 존재로 취급하고, 삼위일체도 부정한다. 현재의 가톨릭 교회는 복잡한 교리로 구성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며 오직 성경의 중심과 초기 교회로 회귀하여 사도적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설파한다. 최후의 심판과 성인과 연옥 같은 것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물질을 포기해야 하며, 그에 따라 욕망이 결부된 성관계를 거부하고, 성교의 산물인 고기와 계란과 치즈 같은 동물성 음식도 먹지 않고, 그리고 물욕과 욕망을 버린 청빈과 금욕적인 신앙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지향했다. 또한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사랑으로 자선을 실천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유럽의 천덕꾸러기였던 유대인을 포용하여 사회를 공유하며 섞여 살도록 하였고, 성경도 모국어로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교리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 보다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성 신장 운동이었다. 그에 따라 평생에 두 번 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의 성사의 일종인 콘솔라멘툼을 여성도 받을 수 있었고, 페르페라고 하는 평신도 지도자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그런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었고 때로는 누구라도 보다 깊은 영적인 지도자도 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모든 교리를 실천해야 구원을 받아 환생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들은 설파하였다.

    

가톨릭의 입장에선 이단이 분명한 카타르교는 북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는 로마가톨릭의 탄압을 받아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프랑스 랑그독에서는 굴하지 않고 교세를 확장하였다. 12세기 말경에는 툴루즈, 카르카손, 생펠릭스, 로라케 등 4개 도시에 주교 교구를 설립할 정도였다. 그렇게 각 도시의 민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함께 섞여 살면서 무시할 수 없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카타르교인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적어도 호감 가는 이웃처럼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기본적인 생활이 금욕과 선함을 추구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최소한 불편은 주지는 않았다. 아무튼 로마 교구청의 집요한 이단 탄압에도 불고하고 그렇게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랑그독의 수도인 툴레즈 백작 레몽 6세의 유연한 통치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현상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였다.

     

랑그독은 현재 지중해와 접해 있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지역으로서 툴루즈 백작령이 중심 도시였다. 현재는 프랑스 국토이지만 1229년 이전에는 여전히 로마의 라틴문화가 지배하는 자치주 형식의 봉토로서 제후가 통치하는 백국이었다. 당시는 중세 프랑스 특유의 봉건제도의 원칙이 강력하게 적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12개의 대귀족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도 스페인 카탈루니아에서 사용하는 오크시타니아어와 같아 프랑스 문화권보다는 발렌시아와 모나코와 아라곤 문화에 가까웠다. 따라서 당시 그들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랑그독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 남부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 등 지중해와 접해 있는 영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도 툴루즈의 레몽 4세는 1차 십자군원정 당시 전설적인 고드프루아, 보에몽, 보드앵 등과 참전하여 마지막 예루살렘 함락 당시 고드프루아와 함께 힘을 합쳤고, 함락 후에는 그를 그곳에 남겨두고 툴루즈로 돌아와 영웅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국왕은 물론이고 로마 교황도 쉽게 간섭할 수 없는 영지로 인식되어 있었다.

      

3. 탄압의 서막     

툴루즈는 레몽 4세의 손자 레몽 6세가 제후로 있을 때 인구 35,000명을 보유하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성벽도 낮았고, 백작도 거의 통치를 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고,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아서 유대인에게도 거의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종교적으로도 관용적이어서 다른 영지에서 엄혹한 종교 탄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교는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농업이 중심이었던 북프랑스에 비해 상업이 중심인 남프랑스가 상대적으로 부유했는데 그로 인해 북부와 남부는 지역 강등이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1198년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으로 취임을 하면서 종교적 상황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새 교황은 전임 교황에 비해 이단 척결에 대단 의지가 확고했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발도파를 프랑스 동북쪽에서 거의 섬멸하였고, 카타르교의 일파도 완전히 제거하였지만, 툴루즈의 카타르교는 여전히 철옹성이었다. 교황은 툴루주와 주변 해당 지역의 주교들에게 이단 척결 의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부패와 역량 부족 등의 이유로 나르본 대주교와 툴루즈 주교, 베지에 주교, 비비에 주교를 해임하고 자기 사람을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지역은 카타르교 교세가 가장 강고한 교구들이었다. 이에 교황은 주교가 주관하여 종교재판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그와 더불어 세속 권력인 툴루즈 백작에게도 이단의 형벌에 대해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였다. 전에도 주교들이 종교재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랑그독에서는 레몽 6세의 소극적인 대처로 거의 성과를 보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지역 주교가 주관한 종교재판은 주교가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이단을 색출하여 조사했는데, 그 방법이 설득, 토론. 설교 등이었고 이에도 교화하지 않으면 세속 권력에게 이관하여 물리적인 제재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교황청에서 종교재판을 정의한 것을 보면, 종교적 정통성과 사회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와 시민 당국이 동시에 시행한 일시적 수단과 영적 수단을 포함한 억압적 수단 체계라고 하였다. 이단자들이 본연의 가톨릭으로 회귀하기를 기대했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톨릭 공동체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차원에서 세속권력에게 이관하여 형법으로 집행하도록 했고 그 방법의 마지막은 화형이었다. 이단은 교회법뿐만 아니라 세속법에서도 중요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교가 종교재판을 해서 결정을 하더라도 레몽 6세는 후속 조치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카스티야 출신의 도미니크 데 구스만 사제가 자의적으로 툴루즈 지역에 들어와 이단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는데, 그 결과 특히 카타르교 여성 신도들을 많이 교화시켰고 그것을 기반으로 1206년 툴루즈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1215년 그곳에서 도미니크회를 창설하여 가톨릭 개혁에 앞장을 섰다. 이단의 성지에서 이단을 척결하는 첨병 역할을 할 수도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도미니크회는 종교재판의 대심문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수도회로 기록된다. 그리고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과 결합하여 지금에 이르게 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로 도미니크회 출신이었다. 

    

아무튼, 레몽 6세의 계속된 비협조에 화가 난 교황은 프랑스 국왕 필립 2세에게 레몽 6세를 압박하여 카타르교를 제거하게 하거나 이를 거부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그를 폐위시킬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리고 카타르교 척결 원정대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겐 십자군원정에 상당하는 특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필립 2세는 툴루즈의 카타르교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 듯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왕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현안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앙주가의 영토를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립 2세의 부왕 루이 7세가 레몽 6세의 외삼촌이었다. 그러니까 레몽 6세와는 외사촌 관계였던 것이다. 필립 2세의 입장에서는 레몽 6세를 사사로움을 배제하더라도, 정치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교황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줄 수는 자기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필립 2세는 존엄왕이라고 불리듯이 주관이 강했고 더구나 3차 십자군원정에도 참전한 영웅이었기 때문에 자존감도 하늘을 찔렀고 성격도 강직해서 웬만해선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현실 정치가인 그로서는 종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여러모로 보나 이득 될 게 별로 없는 궂은일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툴루즈의 레몽 6세는 왜 카타르교에게 관대했을까. 자신은 카타르교의 교리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의 영주처럼 내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카타르교 사람들은 이미 선대 때부터 랑그독 지방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톨릭인들과 어울려 살았고 이제는 지방 정부의 공직에도 진출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작의 그런 통치 스타일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도시 공동체의 자유'에 대한 정치철학을 기반한 것으로써 영지에 대한 자율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지만, 백작은 그들이 이미 툴루즈의 시민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내칠 수 없었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부작용이 발생할 게 뻔했을 것이라 판단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백작은 카타르교인들을 교황에게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교황의 거듭된 압력에도 레몽 6세가 말을 듣지 않자 교황은 1205년 5월 그를 파문하는 강수를 두었다. 파문이라고 해야 종교적인 파문이기 때문에 제후로서의 권한에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파문은 프랑스 귀족 사이에서 자격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교황은 이어서 카타르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랑그독으로 보다 많은 수사와 사목자들을 파견하였다. 이젠 교구의 주교들에게 맡기지 않고 교황이 직접 관리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1208월 1월에는 시토회 출신인 피에르 드 카스텔노 수사를 랑그독의 종교재판 조사관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주었다. 처음엔 카스텔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일정한 성과를 보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을 배제한 채 툴루즈에서 노골적으로 개종 활동을 하는 카스텔로 수사를 불편하게 보던 백작은 그와 개인적인 면담을 시도하였다. 자신의 파문에 대한 사면과 카타르교인들에 대한 개종 행위의 과도함에 대해 대화를 했지만 불행하게도 결과는 실패였다. 그리고 다음날, 카스텔노 수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한테 암살을 당한다. 백작은 자신이 사주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교황은 그를 주범으로 지목하였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고 위기감도 고조되었다. 이에 백작은 교황청에 특사를 보내 화해를 시도했다. 백작의 조부가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런 가문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그런 내용을 정상에 참작한 결과 파문을 사면해 주었으나, 교황청의 강경파들이 들고일어나자 교황은 어쩔 수없이 공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과는 사면 기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공의회는 아예 이단을 완전히 박멸하기 위한 십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공의회 결과이니 거부할 명분은 사라졌고,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 최악의 상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랑그독에 암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황청은 1209년 십자군 원정군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원정대에 대해 이교도를 타격하기 위한 원정과 의미와 같다고 해서 알비 십자군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원정대에는 시토회 수도원 원장 아르노 아말릭이 총지휘관 겸 심문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과 신성로마제국 등지에도 지원병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 원정대에 참전하면 예루살렘 십자군 원정대에 준하는 대우가 주어졌기 때문에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중반 10,000여 명이 리옹에 집결하여 출정식을 가졌다. 첫 번째 공격 목표는 랑그독의 수도 툴루즈였다. 그런데 십자군과 싸울 의사가 없었던 레몽 6세는 십자군이 성 앞에 당도하자 타협하기로 작정을 하고 아말릭과 만나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하지만 아말릭은 레몽 6세의 회개 의사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이에 레몽 6세는 교황에게 심문관의 교체를 강력하게 청원하였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이에 아말릭은 지휘관의 임무만 남겨둔 채, 새로 파견온 말로 수사에게 심문관의 권한을 넘겨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말로 수사에게 고해성사를 한 레몽 6세는 교황을 대신하여 정식적으로 회개가 받아들여졌고 그 보속으로 채찍질을 맞아야만 했다. 그렇게 힘없이 굴복한 레몽 6세는 교황청과 관계를 회복하여 툴루즈를 지켜낼 수 있었다. 훗날 그는 십자군에 대항하여 죽음을 불사했지만, 당시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굴함을 감수하고 일단 후퇴를 한 것이었다.

     

아무튼 툴루즈를 패스한 아말릭 원정대는 베지에와 카르카손을 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레몽 6세가 레몽 로지에게 자작 봉토로 하사한 영지였다. 그는 백작의 조카였다. 그도 역시 카타르교 신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자유 시민으로 포용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그의 누이가 독실한 카타르교 신자인 것으로 보아 이미 카타르교와 손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몽 로지에는 아말릭에게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지만 애석하게도 거부당하였다. 아말릭은 냉혹하고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209년 7월 21일 십자군은 베지에 성과 접하고 있는 오르로 강변에 캠프를 설치했다. 아말릭은 베지에 성을 향해 이단의 독에 완전히 감염된 도시, 온갖 종류의 죄로 가득한 도시라고 일갈하였다. 베지에 점령에 대한 의지가 하늘을 찔렀다. 그것은 베지에 성 안에 있던 카타르교인과 가톨릭 시민의 미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군과의 타협을 성사시키지 못한 성주 레몽 로지에는 베지에를 빠져나가 카르카손으로 몰래 도피하였다. 이는 전략적이라고 변명을 했지만 십자군의 위용에 이미 꼬리를 내린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지에 시민군은 성을 버리지 않았다. 십자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지만 그래도 쉽게 백기를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베지에 가톨릭 주교 몽페이루는 유혈 사태를 피하고자 아말릭과 만나 협상을 하고 성안으로 들어와서 아말릭에게 전달할 카타르교 중심인물 222명의 명단을 작성하였고, 성 안의 시민들에게 카타르교인을 남겨두고 모두 성 밖으로 탈출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였던 시민들은 베지에를 버리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주교는 몇 명의 가톨릭 시민만 데리고 성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타르교인들은 가톨릭 시민들에게 이웃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교도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배신을 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카타르교인과 함께 순교를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적어도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무모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죽음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협상은 끝났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성을 방어할 군대가 없던 베지에는 보잘것없는 시민군으로 1만의 십자군 공격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성문이 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민군은 무참히 무너져 결국 하루 만에 성은 함락되었다. 그 과장에서 베지에는 참혹하게 약탈을 당했다. 십자군은 여러 왕국에서 모인 일종의 용병이었기 때문에 공동체적 정서가 부족해서 죄책감 없이 약탈을 한 것이다. 이는 아말릭의 묵인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일종의 성공 보너스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함락 후 기고만장한 아말릭이 성안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그중에 십자군 지휘관 한 명이 안타까운 마음에 그럼 가톨릭 신자와 카타르교인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라, 신께서 자신의 백성을 알아볼 것이다.’ 이 명령에 십자군은 거의 모든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아우성을 치며 그들의 칼바람을 피해 달아났고, 많은 무리들이 그래도 안전하다고 생각한 교회 안으로 숨어들었으나 침략자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굶주린 늑대처럼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으며, 도시도 불태웠다. 심지어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 있던 가톨릭 사제들도 살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생 나지르 대성당이 성전에 참전한 십자군에 의해 불에 타 파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고의인지 우발적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이 머문 성전을 하느님의 피조물이 파괴한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대역 사건이었다. 훗날 전쟁이 끝난 후 그 잔학상을 알리기 위해 파괴된 성당 앞 건물 벽에 북부 귀족이 저지른 도살의 날이라는 문구가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고 하며, 교회는 2백 년 후에나 복원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이런 절멸 수준의 파괴를 자행한 십자군의 수장 아말릭은 자신의 전과를 자랑하기 위해 교황에게 긴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냈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20,000명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그 숫자가 당시 베지에 인구보다 두 배나 많은 것으로 보아 부풀려서 보고한 것이라고 반박하는 역사가들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도시 전체를 멸절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단이란 이유만으로 집단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십자군의 이런 잔혹한 행위는 다른 도시의 가톨릭 시민들로부터도 많은 원성을 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된 1209년 8월, 원정대는 카타르교 교세가 가장 강고한 카르카손을 손쉽게 함락하였다. 카르카손 성은 요새화된 견고한 성으로서 BC3,500년부터 석기인이 거주해 온 유서 깊은 도시였다. 하지만 성은 견고했지만 공성전도 필요 없이 물 공급을 차단한 지 일주일 만에 베지에 성에서 도피하였던 성주 레몽 로지에는 협상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갔다가 도리어 붙잡히는 처지가 되었고 결국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베지에에서 많은 원성을 샀던 탓인지 아말릭은 카타르교인을 살해하지는 않는 대신 팬티 하나만 입힌 채 성 밖으로 추방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레몽 로지에는 함락 후 며칠이 지나 병으로 사망을 했다. 기록에는 이질이라고 하지만 암살되었다는 게 유력하다고 한다. 하지만 십자군을 지휘한 아말릭은 결국 베지에 침공에서 보였던 폭력성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문책성 인사를 받고 지휘관 자리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대신 그 자리에는 4차 십자군 원정 참전 기사이면서 몽포르의 영주인 시몬 드 몽포르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망한 레몽 로지에의 뒤를 이어 카르카손의 자작으로 봉작되어 아예 그 지역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십자군은 나머지 카타르교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카르카손에서 불과 1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카바렛 지역은 레몽 로지에의 가신인 피에르 로제 카바렛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카르카손에서 레몽 로지에가 십자군에 항복하는 것을 보고 몰래 그 성을 빠져나와 자신의 영지에 돌아온 후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베지에와 카르카손과 달리 산악지역에 여러 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새화된 도시였다. 라스트루는 해발 300미터 봉우리와 협곡을 이용해 3개의 조그만 성으로 이루어 있었는데 이곳에 카타르교의 주요 성직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으로 인해 십자군의 첫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의 첫 번째 패배였다. 그리고 겨울이 되었는데 십자군은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해 3월부터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고 11월 난공불락이었던 테르메스 성을 함락하고서야 카바렛을 평정할 수 있었다. 성주인 피에르 로제는 몽포르에게 투항하고 고해성사를 받은 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몽포르는 전임 지휘자와는 달리 체포된 카타르교인들을 개종시키려고 나름 노력하였다. 회개하고 가톨릭으로 돌아오는 자는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3명만 회개를 했고, 나머지 140명은 거부하고 모두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브램과 미네르베가 십자군의 공격에 무너졌다. 1211년 5월~6월에는 몬트리올과 카세와 몽펠랑 성을 함락하면서 랑그독의 대다수 지역을 십자군이 접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몽포르는 개종하지 않은 수백 명의 카타르교인들을 화형으로 처단하였다. 

     

이제 남은 곳은 툴루즈였다. 첫 공격 목표였던 툴루즈의 백작 레몽 6세가 채찍을 맞고 회개한 후 십자군의 공격을 겨우 모면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타르교를 처벌하지 않고 계속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자 교황은 다시 레몽 6세를 파문하였고 이에 십자군은 툴루즈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레몽 6세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랑그독과 접해 있던 푸아의 백작이 우군을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포함한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던 푸아 백국의 제후인 레몽 로저는 레몽 6세의 가까운 친척이면서 동맹국이었다. 그렇게 형제국이 위태로운 처지에 봉착하자 레몽 로저는 군사를 일으켜 랑그독으로 진격했다. 그는 카타르교인이 아니었지만 그의 아내는 카타르교에서 콘솔라멘툼을 성사받고 평신도 지도자(페르페)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녀의 여동생도 평신도 지도자였다. 아무튼 레몽 로저는 현지의 카타르교인과 주민들이 연합한 시민군과 함께 툴루즈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몽제 마을에서 십자군을 공격하여 몰살 수준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툴루즈는 어렵게 십자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교황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은 십자군은 부족한 병력을 증원하여 전세를 가다듬고 다시 툴루즈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1213년이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십자군 전쟁은 기약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툴루즈 백작은 오래전부터 대대로 봉건영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혈연으로 맺어진 주변 왕국과 공국들이 많았다. 이런 인적 네트워크로 인해 툴루즈는 십자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교황의 표적이 된 툴루즈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우군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2세가 전면에 등장했다. 레몽 6세의 지원 요청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무고한 전쟁을 자신이 직접 해결하고 싶었다. 그는 레몽 6세의 처남으로서 바르셀로나 백작을 겸임하고 있었고, 발렌시아와 마르요카 왕국도 속국으로 거느린 강력한 왕국의 통치자였다. 그리고 카스티야 왕국과 쌍벽을 이루어 무슬림 알모하드 제국과 레콩키스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두 왕국은 훗날 1478년 혼인으로 결합하여 스페인이라는 하나의 왕국을 건설한다. 아무튼 페드로 2세는 처음엔 자신의 영향력으로 로마로 특사를 보내 알비 십자군 전쟁을 종식시키 위해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현 상황을 보면 카타르교의 교세도 이제 미미해져서 염려할 상황은 아니고 그동안 가톨릭인들이 십자군에 의해 너무 많이 살상되었고 더 이상 진행할 경우엔 시민들의 원망만 사서 교황의 권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에 십자군이 점령한 지역을 화해의 차원에서 툴루즈 백작에게 돌려주고, 이 병력을 예루살렘 십자군원정에 충원하여 주기를 간곡하게 청원하였다. 사실 교황은 과거부터 페드로 2세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는 이베리아에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레콩키스타를 지켜왔고 근자에는 카스티야 왕국과 함께 라스 나바스 데 툴루사 전투에서 승리하여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던 터라 교황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교황 이노첸시오3세는 그의 청원을 받아주어 이제 십자군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교황청의 강경파 주교들이 들고일어나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넣었고, 결국 그 공의회에서 이단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결정이 나고 말았다. 교황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런 결과가 페드로 2세에게 전해지자 그는 그 결정을 거부하고 툴루즈 백작을 돕기로 작정하였다. 종교와 관련된 전쟁이기 전에 처남매형지간이라는 인척 관계를 저버릴 수 없었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아무런 이득도 없었지만 페드로 2세는 종교와 권력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시하였다.

      

1213년 9월, 그렇게 해서 페드로 2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랑그독으로 들어가 뮤레에서 툴루즈 군과 동맹군을 형성하여 몽포르의 십자군과 맞섰다. 동맹군의 병력이나 기세로 보아 전세가 유리했지만, 십자군의 몽포르 또한 예루살렘 십자군 전쟁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호락호락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 권력의 부당함에 저항한 페드로 2세는 어이없게도 뮤레 전투에서 전사를 한다. 이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은 동맹군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하였다. 이에 몇 개월 후 레몽 6세는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후 십자군은 돔과 카스텔노성을 점령하고 마침내 툴루즈에 입성했다. 그리고 교황은 란테란 공의회를 열어 몽포르를 십자군이 점령한 지역을 전리품으로 주고 백작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216년, 교황이 5차 십자군원정대를 꾸리기 위해 전 유럽의 제후들에게 모집령을 내렸던 터라 몽포르의 부하들도 그 십자군에 차출되어 갔는데, 이렇게 병력이 약화되자 레몽 6세는 이 틈을 노리고 랑그독으로 몰래 잠입하여 반란군을 일으켰다. 과거 자신을 따르던 시민과 카타르교인들을 모아 만든 시민군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교황 인노텐시오3세는 갑자기 선종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몽포르 군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결국 레몽 6세는 손쉽게 툴루즈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18년 봄 재정비를 한 몽포르군이 툴루즈를 공격했지만, 치열한 공성전에서 몽포르 신임 백작은 9년간의 십자군 전쟁을 마감하며 장열하게 전사한다. 툴루즈 성에서 날아온 투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당시 성의 방어군에서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투석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교황의 거듭된 압력에 못 이긴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자신이 직접 참전하지 않고 대신 루이 왕자를 원정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몽포르 백작의 아들 아마우리 몽포드가 교황으로부터 십자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루이 왕자가 이끄는 원정대와 연합군을 형성한 후, 1219년 6월 마리앙디를 함락하고 카타르교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연합군은 이 기세를 타고 툴루즈를 공격하지만 6주간의 치열한 공성전을 펼친 끝에 결국 패퇴하고 루이는 파리로 돌아갔다. 이제 교황의 요구대로 할 만큼 다 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군의 수장인 아마우리 몽포드는 자신의 군대로 툴루즈를 탈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십자군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이용하여 레몽 6세의 아들 레몽 7세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카스텔로다리, 몬트리올, 팬조 등 거의 모든 영토를 1222년에 수복하였다. 그리고 그해, 10년 이상 십자군의 공격을 슬기롭게 방어해 왔던 카타르교의 성인인 레몽 6세가 승하하고 레몽 7세가 툴루즈 백작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아마우리 몽포르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카르카손 영지를 포기하고 떠났고, 랑그독의 나머지 영지도 루이 8세에게 양도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파리 근교의 몽포르 라모리를 새로운 영지로 봉토받았다. 이렇게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2세는 비통해하면서 '비참한 좌절'이라고 토로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카타르교에 대한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지루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카타르교 십자군 전쟁 1세대였던 인노첸시오 3세, 시몽 몽포르, 레몽 6세도 사망하고 1년 후에는 끝끝내 십자군에 참전하지 않은 카페왕조의 필립 2세도 붕어하였다. 그렇게 전쟁은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이제 프랑스 루이 8세는 선대와는 달리 형식적으로 교황과 합의하여 이단을 척결하는데 총대를 맺지만 사실은 영토 확장이 목적이었다. 필립 2세가 영국이 지배했던 앙주가의 영토를 대부분 찾았고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의 땅 툴루즈를 자신이 차지하면 프랑스 전체를 자신이 통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툴루즈 백작은 이런 루이 8세의 야욕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결국 1229년 4월 파리에서 조약을 맺고 자신의 영토와 재산 모두 프랑스 국왕에게 빼앗겼으며 또한 카타르교인도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프랑스 국왕과 직접 대항하기에는 사실상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20년 동안의 알비 십자군 전쟁은 종식이 되었다. 이런 결과는 역설적으로 서유럽에서 프랑스 국왕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상대적으로 로마 교황청 힘이 약화되는 상황까지 발전하였다. 교황의 힘과 프랑스 국왕의 힘의 균형이 교차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 후 교황의 권력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당시 강력한 제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도 무력으로 굴욕을 당하는 사태까지 이어진다. 아무튼 알비 십자군을 계기로 1308년 로마에 있던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의 뜻에 의해 아예 프랑스 령인 아비뇽으로 이전하는 수모까지 당하며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4. 종교재판소     

카타르교 십자군 전쟁의 끝은 전대미문의 이단 척결의 '최종해결'이었다.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을까? 카타르교인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살았던 수많은 시민들도 무고하게 십자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숫자가 얼마인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순수하게 학살된 사람은 20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라고 추정한다. 이 사건은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과 17세기에 유럽을 피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30년 종교전쟁의 원형일 수도 있었다. 종교 권력이 세속 권력까지 통제하는 시대에 이단은 배교로 간주되었고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사탄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것은 사회를 교란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고 그들은 설파했다. 성경 해석의 자유는 사탄의 행위였다. 그런 흑백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에 그 해결책이 비인륜적인 방법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이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악마화시켜 칼과 불로서 멸하지 않았던가. 그런 행위가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시대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락한 천사를 제거하는 죽음의 천사의 당위성을 종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종교적인 심판이기 전에 그런 행위는 인간의 원초적 폭력성이 결부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종교라는 이유로 인간의 폭력성을 은폐시키는 것은 아닐까.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거칠 것이 없었던 13세기 중세의 종교 권력은 이단의 숨통을 더욱 조이기 시작했다. 알비 십자군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종교의 옷을 입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중간계처럼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판타스틱한 광경이 눈앞으로 펼쳐질 것이다.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화려한 문명의 페달을 밟고 있지만 그와 접한 바로 옆에서는 마치 오컬트의 음침함 기운이 지배하는 세계가 상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어느 평범한 상인이 툴레즈의 광장을 지날 때 우연히 이단자의 화형식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이단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랑그독 여러 곳에 종교재판소를 설립했다. 목표는 단 하나였다. 카타르교의 완전한 멸절이었다. 종교재판이란 단어는  Inquisitio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보다 강열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의역한 것이고 실재 직역을 하면 조사 혹은 심문이라고 번역된다. 종교재판소는 이단심문소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한국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단심문제도이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종교재판이다. 뜻은 같지만 단어가 갖는 이미지는 사뭇 다를 뿐이다. 아무튼 단어만 보면 단순하고 깔끔하게 이해가 되지만 실재 과정은 복잡하고 일방적이고 주관적이며 야만적인 형식을 띤다. 종교재판소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종교적 정통성과 사회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와 시민 당국이 동시에 시행하는 일시적 수단과 영적 수단을 포함한 억압적 수단 체계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었다. 처음엔 세속 권력에서 이단을 색출하여 처단했지만 그것이 정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황의 칙서로 각 영지의 주교들이 종교재판을 하도록 결정하였으며, 알비 십자군 전쟁 후에는 아예 교황청에서 훈련된 심문관을 영지로 파견함으로써 이단 정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보다 강력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 심문관은 거의가 1218년에 신설된 수도원인 도미니크회의 수사들이었다. 그들이 선택된 이유는 그 수도회의 설립 취지가 이단에 대한 문제 해결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이단 척결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리고 도미니크회 수사들을 누가 보더라도 적임자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사로서의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이단을 교화시킬 수 있는 설교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그리고 탁발을 원칙으로 하는 청빈과 금욕적인 생활을 핵심적으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도미니크회는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여타의 수도회와는 다른 혁신적인 수도회였기 때문에 심문관으로서의 진정성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일정 부분 성과를 냈다고 전한다.

       

중세의 가톨릭은 개인적인 선호도가 배제된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였다. 하지만 이단은 그 진리의 핵심을 거부하는 배교적인 행위였으며,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의 존재였다. 그들은 집요하고 끊임없이 선량한 사람들은 분열시키고 불안과 반란을 도모했다. 로마법에 의하면 이단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동일시한다. 왕권은 신이 주신 것이며 이단은 왕의 권위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단은 교회법뿐만 아니라 세속법에서도 중대한 범죄였고, 이는 세속 권력이 법을 집행하게 하는 이유였다. 각종 처벌과 화형이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단은 근절되지 않았다. 그들은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았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한 예로 교회는 성경을 신도들에게 읽어주지도 않고, 인쇄물로도 전하지 않고 오직 설교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성경을 읽는 것을 교회에서 원천 봉쇄한 것이다. 카타르교가 성경을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읽었는데, 이는 성경을 다양한 형태로 해석하는 빌미가 되어 이단적 사유를 만드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가 성경의 자국어 번역인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 형태의 프로테스탄트의 발생의 원인이기도 했다.

     

아무튼 심문관들은 교구를 순회하면서 고발된 이단 혐의자들을 조사한 후 처음엔 그들을 가톨릭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고, 때로는 설교와 토론까지 하면서 유화적인 절차를 밟았다. 교황은 이 과정에서 과도한 고문은 가급적 피하고 피치 못할 경우엔 일정 부분의 고문을 허락하였다. 당시 고문 기구 그림을 보면 사실상의 고문 허용이었다. 피치 못할 경우와 고문의 범위는 대심문관의 역량과 인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교화에 응하는 사람들은 고해성사로서 회개를 받아주고, 보속의 일종으로 노란 십자가가 앞뒤로 새겨진 가운을 입고 다니게 하였으며, 성지순례를 보내기도 하고, 십자군원정에 징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기적으로 교회에서 알몸으로 채찍질을 맞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화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영지의 제후에게 이관하여 감옥형을 받게 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예 교화 자체를 거부하는 카타르교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을 집행함으로써 최종해결을 하였다. 화형은 사악한 이단자의 피를 영원히 소멸시키는 성스러운 행위이며, 부활의 날에도 육체를 찾지 못하게 하는 형벌의 의식의 일종이었다. 그래서 죽어서 이단으로 심판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파묘하여 화형으로 부관참시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 화형식에는 항상 사람들이 관람하게끔 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퍼포먼스로 작동되기를 그들은 바랬다. 이런 화형은 500년이 더 지난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수많은 이단과 마녀들을 주검으로 몰아넣었다.

     

심문관 중에는 개종에 중점을 두는 심문관들도 있었지만 게 중에는 로베르트 르 브그르 같은 악명 높은 심문관도 있었다. 카타르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도미니크회의 수사가 된 그는 종교재판소 설립 초기에 랑그독의 순회 심문관으로 첫 임명되었다. 변절자가 더 악독한 법이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이단 색출에 전념했다. 1236년 상파뉴와 플랑드르에서 50명을 화형에 처했을 때 그는 교구의 주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지만 그에 상관하지 않았다. 교화가 목적이 아니라 이단 확신자의 색출이 목적이었다. 그런 편향적인 의식은 웬만하면 애매한 이단자도 확실한 이단자로 만들 수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결정에는 진실 파악을 위한 정교한 심문이 필요했지만 그에겐 그런 절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1239년 다시 그는 몽비메르에서 183명의 카타르교인들을 화형에 처했다. 랑그독에서 악명이 높았던 그에게 사람들은 '이단자의 망치'라고 불렀다. 그의 이런 과격한 심문의 결과는 결국 교황의 노여움을 샀다. 그리하여 교구의 주교들로부터 원성을 샀던 그는 교황 그레고리 3세로부터 해고를 당하고, 그 결과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사실 브그르가 세속의 감옥에 평생 동안 갇혀 지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수도원 어디선가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본다. 브그르 수사의 이런 폭력적인 이단심문은 아마도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다. 이런 '이단자의 망치'들은 심문관 중에 적지 않았다. 이단자로 판결을 내리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여 개인적으로 부를 축척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엔 면죄부를 팔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교황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현지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심문조사들이 횡횡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베르나르 드 코라는 심문관은 공정하다는 평판이 나돌았다. 1245년부터 1년 동안 39개 마을을 순회하며 전수조사를 한 결과 5,471명 조사자 중 207명의 카타르교인을 축출하였고, 이 중에 경중을 따져 23명에게는 징역형을, 184명에게는 십자가 가운을 입고 채찍을 때리는 등의 속죄형을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교화에 진심이었던 뜻이다. 베르나르 드 코의 이런 온정적인 일화는 자신의 심문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전해졌기 때문이기도 한데, 오히려 그런 기록이 진실을 은폐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의심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이단 판명자 중 1% 정도는 화형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기록에는 이런 화형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지향하는 선함과 관대함을 행동으로 실천했노라고 자신의 충만한 사랑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같은 예는 또 있다. 움메르코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주인공 윌리엄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이 바로 베르나르드 기 수사였다. 도미니크회 수사였던 그는 종교재판관을 지낸 후 로데브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툴루즈 대표 심문관 시절 1307년부터 1323년 사이에 그는 940건의 이단을 기소하였고, 이 중에 636명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유죄 판결 중에는 307명은 투옥하고, 143명은 십자가복 착용, 9명은 성지순례형 그리고 45명에게 화형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며 사실은 600명을 화형시켰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는 이후 로마 교황청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기도 하고 출중한 종교 관련 저술 활동도 하여 저명한 인물이 되었고, 수사 출신 중에 특이하게도 주교까지 되는 등 존경을 받은 사제였다. 그의 저술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런 평판으로 인해 그의 심문관 시절을 미화하는 차원에서 기록에 손을 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항상 가려있기 있기 때문에 의심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당위성을 갖춘 주장은 적어도 확신의 영역을 확보할 수는 있다. 

     

이렇게 종교재판이 랑그독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지면서 수많은 카다르교인들이 화형장의 재로 사라지고 있었다. 기존의 교구 주교들도 파견 심문관들과 경쟁하듯이 이단들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억울한 사람들도 속출되는 등 세상은 흉흉해지고 있었다. 어제의 이웃이 갑자기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하거나 이와 관련된 고소 고발들이 난무하였다. 그리고 카타르교인들은 잔혹했던 브그르 심판관의 예처럼 그들을 적으로 삼아 호시탐탐 역습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랑그독에서 피바람이 불고 있을 때, 1242년 5월 아비뇽에서 11명의 가톨릭교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몽세귀르 성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던 카타르교도 피에르 로저가 6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비뇽에 몰래 잠입하여 도미니크회 소속 심문관 기용 아르노와 프란치스코회 소속 심문관 에티엔 드 생티베리와 그리고 그 외의 가톡릭과 관련된 사람 9명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랑그독은 물론이고 로마 교황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후 나르본의 대주교 피에르 아미엘의 주도로 1244년 카타르교의 본거지인 몽세귀르 성을 공격하여 200여 명의 카타르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였다. 그중에는 캬타르교의 수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카타르교는 마지막으로 저항을 한 후 급격하게 약화되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 사건 이후 1252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칙서에서 제한적이라고 하지만 이단 심문에서 고문을 해도 된다는 내용을 공표했다. 공식적인 최초의 고문 허용이었다. 이와 함께 이단에 대한 조사와 심문 방법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체계화하여 작성한 교본도 만들어졌다. 이런 이단 심사 매뉴얼은 여러 지역의 교구나 종교재판소에 교부되어 심문에 활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랑그독의 이단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 북부에 있던 발도교에 대한 탄압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프스 산악지역에서 대부분 은둔하여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문관들이 파견되어 이단 색출에 집중한 결과 정확하지 않지만 수백 명을 적발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일부 발도교는 세상 끝으로 숨어들었고 그렇게 살아남은 소수가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발도교는 중세시대의 야만적인 종교 탄압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기독교 교파일 것이다.

     

1300년 경에 이르러 카타르교는 지속적인 탄압으로 인해 외형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그래도 암암리에 지하 조직처럼 은밀하게 그들만의 기도 장소로 소수의 인원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에 공증인 출신 피에르 오리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 중 북부 룸바르디아에서 카타르교에 귀의한 후 랑그독으로 돌아와 카타르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지하에서 새로운 신자들을 전도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발각되자 그는 체포되어 심문관 제르루아 다블리스에게 이단으로 심판을 받고 결국 화형 당했다. 1310년 4월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마지막 남은 카타르교인들이 야반도주하듯이 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집요한 탄압으로 인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마지막 카타르교인들이 이주한 곳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아라곤이나 카탈로니아 지역이었다. 일종의 종교 망명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 기욤 벨리바스테라는 사람이 있었다. 피에르 오리에의 제자이기도 했던 그는 평신도 지도자이자 설교자 역할을 하던 파르페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발렌시아에 정착한 그는 은밀하게 카타르교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원주민 카타르교인과도 교류를 하였다. 마치 로마제국 시대의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종교를 지켰다. 그 지역에서는 많은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이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카타르교에게는 그런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이단이란 낙인은 치명적이었다. 이단은 가톨릭 교리를 배척한 배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롯 유다처럼 용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15세기 중엽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가 성공할 즈음부터 종교재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 대상이 대부분 유대인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재판의 대상은 가톨릭의 이단들이었다. 아무튼 정통 카타르교의 설교자였던 벨리바스테는 바오로처럼 스페인 남부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푸아백국 출신 목동이었던 피에르 모라가 벨라바스테와 교류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토착 카타르교인이었다. 하지만 그 배교자들을 밀고하는 정보원들이 도시 곳곳에서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에 아르노 바일이라는 구두수선공이 있었다. 그는 과거 가족이 카타르교인이라는 이유로 검거되어 사형을 받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밀정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는 구두수선공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이단 밀고자로 활동하였다. 바일이 밀고한 이단자 중에 바로 벨리바스테와 모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1320년 벨리바스테는 바일의 밀고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불로서 순교하였고, 모리는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이렇게 랑그독에서 망명 온 마지막 카타르교인들과 토착 카타르교인들도 씨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이후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카타르교는 말끔히 청소가 되었지만, 보다 세련된 다른 이단들이 북쪽에서 개혁의 불씨를 태우고 있었다. 15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에서 종교개혁에 대해 피를 토하며 설파했던 얀 후스 같은 이단 신학자와 비텐브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의 반박문이 적힌 전단지를 부착한 루터 같은 개혁 사제가 등장하여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당시 카타르교 종교재판소는 스페인으로 옮겨져 또 다른 차원의 종교재판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보다 발전된 형태의 폭력이 가미된 종교재판이 전 스페인을 휩쓸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상은 가톨릭 이단이 아니라 대다수는 개종한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이었다. 오리려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이나 무슬림은 심문의 대상이 아닌 반면 개종한 그들이 가혹한 신문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온갖 고문 도구들이 난무하고 질곡처럼 한번 물리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심문과정과 그 후 여러 명씩 집단으로 집행되는 화형의 형태는 광기의 굿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그런 광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로마에서도 교황청이 직접 주관하는 종교재판이 무슨 진실 게임처럼 유행하였고, 그것은 잔다르크로 대변되는 마녀사냥이라는 초유의 잔혹사로 연결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형태의 고문을 당하고 마지막엔 뜨거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신은 언제나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몬트리올 대량학살 및 인권연구소는 알비 십자군 전쟁을 "최초의 이념적 대량 학살"이라고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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