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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Oct 29. 2024

마파, 노예무역 잔혹사

제노사이드

1. 대서양 노예무역의 시작     


마파(Maafa)라는 단어가 있다. 마파는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로서 대재앙을 뜻한다고 한다. 혹은 아프리카 홀로코스트라고 좀 더 강하게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16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유럽인에 의해 자행된 노예무역 과정에서 발생한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잔학한 행위와 그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한 단어로 마파라고 부른다. 좀 더 구제적으로 말하자면 아프리카인을 노예화 한 유럽인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다. 대항해의 시대로 인해 지구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유럽인은 설파하지만 그 근저에는 아프리카인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정복 과정에서도 원주민 수천만 명이 유럽인의 탐욕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의 주검은 당시 가톨릭 교황과 유럽의 국왕들이 합작한 역사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연유한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가 이성적으로 불가해하듯 유럽인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학살 또한 불가해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의 광기와 유럽 근대인의 광기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인이 이 지구상에서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그 광기의 역사적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노예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구 문명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구약이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기록을 보더라도 노예는 어디서든 존재해 왔다. 특히 전쟁에 승리하고 포로들을 약탈품이나 전리품으로 가져와 귀족들의 노예로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로마제국의 노예제도는 정책적으로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현재까지도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있고 영화나 문학의 주요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AD 4세기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로 등장하면서 교리상 노예제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중상류층에서는 하인을 두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급 노동자 같은 지위였다. 노예는 재화의 일종으로서 무급 노동 인력을 말한다. 따라서 4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노예는 사라진 반면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는 여전히 노예 제도가 횡횡하고 있었다. 무슬림 노예상들은 사하라 이남에서 흑인 노예를 확보한 후 사막을 횡단하여 북아프리카로 운송하였다. 그리고 알제리나 모로코 같은 이슬람 제후국에 판매를 하였고 일부는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반출하였다. 또한 중동 레반트의 노예상들도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노예를 구입하여 중동의 여러 왕국에 비싼 가격에 되팔았다. 흔히 말하는 중세까지만 해도 유럽의 백인들도 북아프리카 노예상의 타깃이 되어, 남녀 가길 것 없이 중동지역을 여행하던 그들을 납치한 후 노예로 신분을 바꾸어 무슬림에게 팔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의 노예 시장은 중동에서 장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에서도 노예산업이 성행하였다.     


유럽에서 대항해의 시대, 혹은 정복의 시대를 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아시아로 가는 동쪽 무역 루트를 적대적인 관계였던 오스만제국이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대안적 선택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도와 남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가는 머나먼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항해 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이 지구의 지도를 바꾼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육지인을 바다로 내몬 이 대 사건은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중세 내내 무슬림의 식민 지배와 스페인 왕국들의 피지배적 영향력을 받아 경제가 바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콩키스타가 성공할 무렵 포르투갈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바다에서 미래를 발견했다. 동쪽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천 킬로미터가 넘는 사이가 좋지 않은 스페인이란 장애물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미래는 밝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가장 변방에 속하는 지리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약점이 그들을 바다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망망대해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었다, 그것도 대서양 보다 더 먼 인도양까지 항해를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모하게 바다로 나간 포르투갈은 성공적 결과를 얻었다. 15세기 중엽, 엘리케 왕자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노예무역의 시작도 그 시점과 맞물린다. 돛을 여러 개 설치하여 항해 능력을 일취월장시킨 캐랙 형태의 범선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노예무역도 뒤따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몇 백 명의 노예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발전이 절대적이었다. 지중해에서만 항해하던 노로 젓는 갤리선 같은 선박으론 대서양의 거센 파도와 조류를 이겨낼 수 없었다. 보다 멀리 그리고 더 많은 화물을 선적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으로 항해 능력이 뛰어난 범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운 범선을 만든 포르투갈은 엔리케 왕자로 대변되는 대항해의 시대를 열었고 이에 대서양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많은 섬을 공짜로 확보할 수 있었다. 섬들은 크지도 않고 사람이 살기에 편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에겐 매우 소중했다. 이 별 볼일 없는 섬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궁리를 하던 그들은 당시 중동 레반트에서 재배하던 사탕수수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의 결정체인 설탕은 당시 유럽의 상류층이나 먹을 수 있는 값비싼 기호 식품이었다. 설탕의 달콤함은 마약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혀를 중독시켰다. 아무튼 사탕수수에서 미래를 본 포르투갈인들은 무인도인 마데이라 섬을 개간하여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섬 전체가 대체적으로 경사가 심하고 척박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대재앙의 시작은 이렇게 소소하게 시작되었다.

     

사탕수수는 이미 선사시대 때부터 남아시아와 인도 등에서 재배해 온 작물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00년 경, 인도에서 어떤 천재적인 농부가 착압기를 발명하면서 인간의 미각을 욕망화시켰다. 이전에는 그저 수수대를 잘라 씹어 먹는 정도의 기호 작물에 불과했는데, 소나 말을 이용해 착압기를 작동시켜 즙을 낸 후 가열해 황갈색 설탕을 만들어냄으로써 차원이 다른 혁명적 맛의 세계가 탄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정체는 유럽으로 전파되기까지는 거의 1500년 이상이 걸렸다. 인더스강까지 진출했던 알렉산드로스도 몰랐던 것을 보면 그저 지역적인 토속 식품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로마 제국도 인지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시간을 흘러 12세기가 되었을 때도 설탕 맛을 본 유럽인은 많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9세기 경에 시칠리아나 스페인 남부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규모가 작아서 지협적인 작물에 머물러 있었다. 설탕 소출은 아직까지 미미해서 타산을 맞출 수 없었다. 설탕산업은 규모의 경제이기 때문에 좁은 유럽에서는 극히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설탕의 존재는 중동지역을 여행하고 온 일부의 상인이나 예루살렘 순례자들의 경험담으로 전해지는 정도였다.

     

십자군전쟁은 인류 문명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중에 설탕의 발견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 레반트 사람들이 알주커라고 부르던 설탕을 처음 맛본 부용과 레몽과 그리고 십자군 기사들은 맛의 신천지를 경험하였고 그 후 설탕은 빠르게 유럽으로 전해졌다.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이 인도에서 어렵게 수입했던 후추의 존귀함처럼 설탕도 보석 같은 존재로 귀족들의 미각을 자극했다. 그들은 ‘극한의 즐거움을 주는 것’, ‘쾌락과 황홀경’ 등의 수사를 남발하며 중독되어 갔다. 이후 이탈리아 상인들은 발 빠르게 키프로스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어 본격적인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아프리카 노예상들에 의해 동아프리카 노예 1,000명 정도가 키프로스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규모적인 측면이나 1 모작을 해야 하는 기후적인 한계와 플랜테이션 생산 공정의 미숙함으로 인해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상인들의 욕망을 부추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설탕의 시장성을 확신한 포르투갈인들은 1440년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가운데 처음 마데이라에 사탕수수를 심기 시작했던 것이다. 섬의 지형이 농사를 지을 형편이 되지 못했지만 경사면을 개간하면서 힘겹게 사탕수수를 재배하였고 드디어 고진감래 끝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에 아조레스 제도, 카보베르데 제도, 상투메 섬 등에도 플랜테이션을 만들었고, 스페인도 이에 뒤질세라 자신의 영토인 카나리아 제도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아프리카 섬에서 생산된 설탕은 거의 독점적 지위에 올라 두 왕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설탕 생산량이 처음보다 1,000배나 증가한다.

      

하지만 보다 많은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설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경작과 수확을 하는 과정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사탕수수의 특성상 수확 후 즉시 즙을 짜야하고 그리고 거대한 용기에 끓여서 결정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공정에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탕수수는 하루만 지나면 변질되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여러 공정을 거쳐야 하며, 그렇게 결정체가 되면 보관성이 우수해져서 유럽까지 운송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경작, 파종, 생산 공정을 거쳐 완성품을 만든 후 운송까지 하는 것을 플랜테이션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품목이 담뱃잎, 라텍스, 올리브 오일, 커피콩 등이다. 아무튼 이런 공정은 노동 집약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베리아 왕국은 항상 노동력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자국인의 노동력으론 한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놀랍게도 노예 사용에 대한 발상을 하기에 이른다. 수익성을 담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노예를 선택한 것이다. 처음엔 섬의 원주민을 노예화시켰고 그도 부족하면 대륙에서 노예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노예들의 부류를 보면 북아프리카의 베르메르인들이나, 사라하 사막 이남의 흑인, 노예상에게 포섭된 이베리아 반도의 장기 수감자 등이었다. 당시 아프리카 노예 시장은 아랍인과 무어인을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대상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현재의 노예 수급으론 부족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차츰 바특이 있는 서아프리카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포르투갈인들이 마음대로 무지스럽게 노예를 구한 것은 아니다. 당시 유럽은 교황과 국왕 그리고 국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 마음대로 대놓고 노예사업을 할 수 없었다. 노예는 기독교 사회에서 인륜적인 문제와 대립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의 이름으로 노예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아라곤의 국왕 알폰소 5세는 교황인 니콜라스 5세에게 종교적인 입장을 표해 줄 것을 청원한다. 이에 1452년 교황은 비기독교인이라면 노예화할 수 있다는 취지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제 노예무역은 세속법과 신법으로 합법화된 것이다. 물론 당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어 이를 따르지 않는 영주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이름으로 완벽한 합법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칙서를 시작으로 교황이 교체되면서도 수정 보완 등 발전된 칙서들이 계속 발표되었고, 이는 노예무역은 물론이고 식민지 개척의 합법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리고 사제들도 교황의 칙서에 논리적 근거를 만들었다.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저명한 저술가인 비테르보 아니우스는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함의 저주를 인용하여 아랍인에게 조차 노예화되어 있는 흑인은 그것만으로 열등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들은 저주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노예화의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논리를 개진한 것이다. 이런 흑인 노예의 정당성은 칙서의 이론적 토대가 되어 노예상들의 탐욕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노예화할 수 있다는 이런 발상은 묵과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년 가까이 노예무역의 광기의 허리케인이 대서양을 덮친 근본적 요인으로 작동되었다. 그런 비인륜적인 발상은 20세기에 벌어진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낳게 한 사회적 의식 구조로 진화한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노예무역을 이끈 인물은 누누 트리스탄이었다. 엔리케 왕자의 뜻을 앞장서서 따랐던 그는 1444년 경 흑인 노예 12명을 왕자에게 진상했는데 바로 서아프리카 모리타니를 탐험하면서 포획한 흑인 노예였다. 그렇게 왕실의 승인을 받은 그는 모리타니 아르귄 만에 노예 전초 기지를 구축하고 흑인 노예를 포획하여 본격적으로 이베리아에 팔기 시작했다. 이에 재미를 본 그는 1460년까지 매년 700~800명을 매매하였고 이후 그의 후배 노예상들에 의해  1,500년에는 누계로 5만 명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처음엔 노예들은 포르투갈 본토에 가서 상류층의 가정부나 농장에서 노동을 하였으나 15세기 후반 사탕수수 사업이 활황을 맡자 대부분의 노예들은 카나리아와 아조레스와 카보베르데 같은 섬으로 팔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포르투갈인들의 피부색이 다른 서유럽인 보다 검은 이유가 이런 흑인의 유입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와 더불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인들은 800년 동안의 무슬림의 식민지로 인해 자연스럽게 혼종이 일어나 여타의 서유럽인과 조금 다른 형태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혼혈에 대한 인식이 자유로웠던 이베리아 반도인은 아메리카 정복 후에도 혼혈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포르투갈이 대서양 노예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특히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후 스페인은 피를 묻히지 않고 과거 자신들의 영지에 불과했던 포르투갈에게 노예무역의 전권을 주었다. 1494년에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서아프리카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 통치에 집중하느라 노예무역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시엔토 규정을 만들어 자신들은 노예 수급자로서는 유지를 하지만 노예 사업에는 직접 손을 데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마치 특허권 같은 권한을 확보한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일구어놓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휘졌고 다니며 노예들을 직접 포획을 했다. 처음엔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직접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 흑인들을 무력으로 납치했고, 수요가 늘어나자 내륙 더 깊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위험천만한 짓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곳은 원주민들의 저항을 불러온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유럽인이 경험해보지 않은 열악한 환경과 전염병이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것이다. 특히 말라리아와 학질 같은 풍토 전염병에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그들에겐 치명적이었다. 아프리카 내륙은 해안의 비경과는 달리 죽음의 묵시록이 숨 쉬는 ‘어둠의 심연’이었다. 이런 직접적인 방법은 오히려 손실만 가져올 뿐이었다.

     

이에 노예상들은 내륙으로 들어가지 않고 해안가 곳곳에 전초 기지를 구축하고, 지역의 부족장이나 국왕을 중심으로 한 현지 노예상들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노예 제도가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부족에 따라서는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잉여노예들도 많았다. 부족 간의 전쟁에서 전리품의 일종으로 노예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이나, 채무 관계에 얽힌 사람이나, 혹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 받고 팔려가는 경우의 사람들도 노예가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곡절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귀족의 소유물이 되었고 농사나 목축에 동원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착취당하고 제의의 제물이 되기도 했지만 항상 노예는 풍족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잉여의 노예들이 포르투갈 노예상들에 의해 거래된 것이다.      


2. 삼각무역     


흔히 말하는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이후,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엔코미엔다 시스템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경제적 상황은 급속도록 변한다. 처음엔 히스파이올라와 쿠바 등에 카나리아섬에서 가져온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농장들이 들어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페인(현재의 멕시코)에도 규모가 훨씬 큰 플랜테이션 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뉴스페인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처음 운영한 사람이 바로 아즈텍을 멸망시킨 그 코르테스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노동력 확보가 관건인데 당시 뉴스페인을 비룻한 아메리카에는 그만한 노동력이 없었다. 신대륙의 수많은 원주민들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에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자들도 금광과 은광에서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주검이 되었고, 무엇보다 천연두와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짐으로써 불과 20년도 안된 사이에 인구의 80~90%가 사라졌던 것이다. 이 경이로운 인구 감소로 인해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에 포르투갈인들이 나타나 서아프리카에서 운영하던 노예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처음엔 농장주들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몇 십 명 단위로 노예상들에게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520년 경에는 카리브해로 가는 모든 배는 카나리아 섬을 거쳐 가게끔  되어 있었는데, 신대륙 엔코멘데로들은 이런 불합리한 점에 대해 노예 수입 만은 직항해 줄 것을 국왕에게 청원하여 허가받았고, 그와 더불어 노예 수입 쿼터도 한 번에 200~300명으로 증원하는 건도 윤허를 받았다.

      

초창기 아프리카 노예 수요처는 히스파니올라와 뉴스페인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 전역과 북미 일부를 정복한 후 그곳에 정착하면서 노예 수요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에 노예무역에 대한 프로세스를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은 노예화할 수 없다는 것을 법으로 규정을 한 스페인은 아프리카 노예를 체계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네그로스 아시엔토(Negros Asiento)란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엔 느슨한 형태여서 귀족이나 그와 연관된 개인이 라이선스를 받고 그 권리를 다시 전문적인 상인에게 매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점차 수요가 드러나자 1595년에는 공식적으로 법제화시켰다. 내용은 간단하다. 노예를 아메리카의 자국 영토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그 공급업자는 스페인 당국과 공급 수량에 대해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쿼터제 계약인 것이다. 처음엔 포르투갈 상인이나 무역의 달인인 제노바 상인들이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확장되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중요한 거래처가 된다. 조금 더 얘기하자면, 네덜란드는 1648년 유럽 왕국들의 정치 지형과 질서를 새롭게 정립한 뮌스터 조약 이후 서인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엔토 시스템에 뛰어들었고, 영국은 18세기 중엽부터 1713년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의 노예무역권을 빼앗는다. 하지만 스페인의 정복 열정에 감명을 받은 포르투갈은 뒤늦은 1560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토인 브라질을 개척하면서 아시엔토 시스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이미 상파울루 정착지에 반데이란테스(포르투갈 정착민)들이 원주민을 제압하고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자체 수요만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시엔토 초창기에는 노예를 일반 화물선에 함께 선적했지만 1525년 포르투갈에서 최초로 노예선을 만들고부터는 공급이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몇 십 명 수준이 아니라 백 명이상의 노예를 상투메에서 직접 카리브해로 직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시엔토의 수혜자는 뉴스페인의 코르테스 후작이었다. 그는 정복을 다 끝내고 말년에는 6개 영주에 2만 평방 킬로미터에 상당하는 토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불굴의 정복자이면서도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던 코르테스는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기도 하고, 태평양 해안에 조선소를 설립하여 태평양 항해의 기틀을 만들기도 하고 그리고 플랜테이션 같은 대규모 농장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에 필요한 노동인력이 매년 2만 명에 상당하였기 때문에 항상 노동력이 절실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1542년 제노바 상인과 노예 납품 계약을 맺었다. 당시는 뉴스페인 원주민의 인구가 전염병으로 인해 바닥을 찍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라스 카사스 수사가 서인도에서 자행된 원주민 학살을 보고서 형식으로 출간하는 등 원주민 노예 폐지 운동이 결실을 보아 결국 국왕의 결재를 받아내면서 엔코멘데로들의 원성을 샀는데, 라스 카사스는 그 대안으로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하면 된다고 역설하여 그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었다. 그런 라스 카사스의 논리는 추기경과 국왕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선포되었고 이에 뉴스페인 사업가들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코르테스가 주문한 1차분 노예 100여 명이 1544년 베라쿠르즈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를 정복한 후 수십 차례에 거쳐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였다. 그 후에도 아메리카에는 대형 플랜테이션이 곳곳에 세워져 16세기 후반 생산량이 3배나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노예 공급자 포르투갈과 노예 수급자 스페인의 밀월 관계는 17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당시 노예무역을 주도한 상인들은 콘베르소 즉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다. 이베리아 왕국에서는 레콩키스타를 성공시킨 후 자국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은 모두 추방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이에 개종한 유대인에게 상업적 기회를 제공하고자 더러운 노예무역을 맡긴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페인 국왕의 어명을 거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노예 밀수와 프리랜서 노예상들이 지하 상권을 형성하였고, 아시엔토의 할당을 초과하여 판매되는 등의 불법이 횡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영국 상인 윌리엄 호킨스가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노예 몇 명을 사서 히스파니올라에 되팔기도 했는데, 그의 아들 존 호킨스는 아버지보다 스케일이 더 커서 수백 명의 노예를 다루는 대상이 되었다. 해군 고급장교 출신인 그는 1564년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 경영 성공에 경도되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 무역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베리아 왕국이 이루어 놓은 대서양 노예 시장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에 해군 제대 후 사략선을 몰기도 했던 그는 포르투갈 노예선을 나포하여 300여 명의 노예를 탈취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저지른다. 바로 해적질인 것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사략선이란 애매모호한 항선제도를 만들어 해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17세기에 대서양을 횡횡하던 해적들은 그래서 거의가 영국 출신들이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해적산업이라고 주장하는 식자들도 많다. 아무튼 해적질로 돈을 번 존 호킨스는 기발한 창안을 한다. 바로 삼각무역이다. 삼각무역의 형태를 호킨스가 최초로 설계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가 처음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새로운 교역 형태인 삼각무역이 탄생했다. 삼각 무역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거대 자본가가 아메리카의 설탕을 수입하기 위해서 직선 루트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총기류와 면직물 같은 물품을 가지고 서아프리카에 가서 물물교환으로 흑인 노예를 구입하고, 그 노예를 대서양이란 중간 통로를 거쳐 아메리카에 가지고 가서 현지 노예상에 팔고, 다시 설탕과 담뱃잎 같은 상품을 구입한 후 시작점인 유럽에 가서 현금으로 판매를 하는 것이다. 설탕이 필요한 유럽과 노동력이 필요한 아메리카와 그리고 잉여의 노예를 팔아 부를 축척한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브로맨스가 바로 삼각무역이었다, 결국 이 거래 과정에서의 유일한 피해자는 흑인 노예였다는 점이다. 아무튼 설탕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크가 크더라도 수익 측면에서는 이보다 확실한 장사는 없었다. 이 신박한 노예무역은, 품질 좋고 싼 노예를 구하여 사고 없이 운송된다면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확실한 장사였던 것이다.

      

이런 노예무역의 발전은 17세기에 들어서자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그만큼 유럽의 많은 자본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방증이다. 기나긴 80년 전쟁과 30년 전쟁이 종결되고 뮌스터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유럽의 질서는 재편되었다. 합스부르크가와 스페인 왕조의 힘이 약화되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영국이 해양산업에 선두에 나선 것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한 네덜란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동인도회사에 이어 서인도회사를 만들어 대서양 무역에 뛰어들었다. 기존의 이베리아 반도 왕국이 차지한 아메리카를 기웃거리며 약한 곳을 침략하여 당시 포르투갈 영토였던 브라질 대서양 연안의 레시페와 세아라 지역과 수리남 그리고 퀴라소 같은 섬들도 점령하고 심지어 북아메리카에도 현재의 뉴욕과 뉴저지를 중심으로 뉴네덜란드라고 명명된 식민지도 구축하였고 이에 따른 해상무역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의 시작이었다. 그중에서도 노예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리고 영국도 거의 같은 시기에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과 스튜어트 가문이 중심이 되어 왕립아프리카 회사를 설립하여 대서양 무역에 참전하였다. 물론 왕립아프리카 회사도 본연의 교역보다는 수익률이 좋은 노예무역에 치중했다. 그리고 영국은 본격적으로 신대륙 식민지 개척이 뛰어들어 북미 동부와 카리브해의 자메이카와 윈드워드 제도 등을 장악하여 대영제국의 발판을 만들었다. 서인도회사와 왕립아프리카회사는 모두 국가의 독점 사업이었다. 특히 서인도회사 같은 경우는 영국의 유명한 동인도회사처럼 식민지의 행정 사법 군사력 등의 행사를 보장받고 있어서 기업이 군사조직을 운영하여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식민지는 본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일개 회사에 식민 정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전권을 준 것이다. 스페인의 콩키스타와 엔코미에다의 보다 발전된 제도였다. 또한 위의 두 국가의 경제적 성장을 볼 수만 없었던 프랑스도 세네갈 회사를 만들어 당초 포르투갈 영토였던 고레섬을 빼앗아 그곳에 노예 수용소를 만들었고, 북아메리카 중부에 거대한 땅도 줄을 긋고 차지하였다. 만약 그 땅을 나폴레옹이 미국에 팔지 않았다면 아마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가 황금시장으로 거듭나고 있을 때 삼각무역의 중요한 한 축인 노예산업도 동반성장을 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를 지나면서 왕립아프리카회사의 노예 판매 실적은 네덜란드를 따돌리고 정점을 찍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에는 영국은 왕립아프리카 대신 남해회사를 만들어 노예무역의 전권을 주었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영토로 가는 거의 모든 중간통로의 노예 운송은 남해회사가 전담하기에 이른다. 영국 사략선이 카리브해와 대서양에서 스페인 상선을 약탈했듯이 이제는 스페인의 아시엔토 시스템을 정복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적 탐욕 앞에 결국 서인도회사는 노예무역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는 노예상들은 다국자였지만  중간통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남해회사를 통해서만 대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삼각무역의 메커니즘은 사라지고 순수한 노예산업으로 발전하여 차세대 산업으로 성장한다. 이런 독점 거래는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비룻한 대서양 무역과 관계된 국가들의 원성을 사면서 갈등을 초래하였고 이에 18세기 중반 다시 영국의 브리스톨과 리버플의 노예무역 신디케이트 같은 민간단체에게 사업권을 넘기고 자신들은 한발 뒤로 빠진다. 이런 영국의 선택은 자본주의를 극대화시켜 이후 노예무역의 정점을 찍었고 그와 함께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자 19세기 초에 노예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하지만 노예무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세기 중엽까지 독립 전후의 브라질에서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한다.

       

3. 노예 해안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시선을 다시 서아프리카로 돌리겠다. 서아프리카에서 중점적으로 노예가 거래된 지역을 일명 노예해안이라고 일컫는다. 현재의 세네갈에서 시작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넹,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봉, 콩고를 거쳐 앙골라에서 끝난다. 경도 15도에서 시작해 적도를 지나 -10도까지 대략 5500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지역이다. 그곳은 크게 세네감비아, 시에라리온, 윈드워드 코스트, 골드 코스트, 베닝만, 비아프리만, 서부중앙아프리카 등 7개 구역으로 나눈다. 주요 항구로는 세네갈의 고레섬, 베넹의 우이다와 그랑포포,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와 바다르리, 앙골라의 로앙고와 루안다 등이 있다. 그리고 그 해안에 노예 요새라고도 하고 노예 성이라고 부르는 노예무역소가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처음 노예요새가 자리 잡은 곳은 세네갈에 위치한 고레섬이다. 1444년 포르투갈에 의해 세워진 고레섬은 세네갈 지역의 부족과 상업적 거래를 하기 위해 건설된 무역소의 일종이었다. 상아와 가죽 같은 특산품 거래도 했지만 노예도 취급을 했는데, 신대륙 발견 후 노예 수요가 급증하자 네덜란드가 점령을 했고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렸으며 17세기 후반부터는 노예시장이 윈드워드 코스트로 넘어가자 쇠퇴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인은 1482년 윈드워드 코스트 동쪽 골드코스트 구역에 거대한 엘미나 요새를 세웠다. 이미 10년 전 현재의 가나로 불리는 내륙에서 노다지를 발견한 그들은 해변가에 요새를 짓고 그 지역을 골드 코스트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1493년 그들은 동남쪽으로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상투메 섬에 3번의 상륙 도전 끝에 정착에 성공한 후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었다. 현재의 가봉 해안에서 2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곳은 제주도 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섬으로 원주민이 살았지만 숫자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아직 노예무역이 확산되기 전의 포르투갈인들은 사탕수수에 진심이어서 섬의 35%를 사탕수수 밭으로 만들었는데 처음 시작했던 마데이라 섬보다 4배나 많이 수확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애환이 많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말라리아와 황열병이 창궐하여 포르투갈인과 유대인과 그리고 원주민 노예들이 75%가 죽었다. 이에 이 섬은 죽의 섬으로 불리어 파문된 성직자들의 유형지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사탕수수에 매달려 성과를 낸 것은 아프리카 노예의 수많은 주검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포르투갈인들은 노예 해안에 전념하여 케이프 코스트 요새와 현재 나이지리아에 위치한 라고스 바다그리와 보니와 듀크다운 요새들을 건설하였다. 처음엔 일반적인 무역품을 취급했지만 곧이어 노예를 전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곳 또한 영국에게 빼앗긴다. 자신들이 개척한 노예 거점들이 계속해서 신흥 강대국에게 빼앗기자 포르투갈인들은 아예 그들을 피해 멀리 상투메 섬이 있는 앙골라에 가서 루안다와 상미겔 같은 노예 요새를 여러 개 만들었다. 현재 앙골라의 통용어가 포르투갈어인 것을 보면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앙골라 만큼은 다른 나라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인도양으로 가는 중간 거점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거래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당시 초기 노예해안을 주름잡았던 포르투갈 상인을 란카도스(lancados)라고 부른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났던 레콩키스타 이후 개종한 유대인들이 서아프리카에 정착하여 원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중계무역을 하였고, 노예무역의 네트워크도 형성하며 노예상의 거간꾼 노릇도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혼혈 후손들도 선조들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폼베이로스(Pombeiros)라고 불리는 전문적인 노예상도 대단한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앙골라인과 뮬라토인들이 섞인 이 그룹은 겁에 질려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을 대신해 내륙 깊이 잠입하여 노예들을 수집 사냥한 후 벵갈라나 루안다 요새로 끌고 와 그들에게 팔았다. 한번 원정을 가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캐러밴을 조직했는데, 1~2년 동안 아프리카 정글지대를 뒤져서 400~600명의 노예들 잡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포르투갈이 온몸을 바쳐 개척한 노예 해안에 신흥 강자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뛰어들자 노예 요새들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기 시작했다. 오수 요새 같은 경우는 생뚱맞게도 덴마크가 건축주였다. 특히 골드코스트 즉 현재의 가나와 베냉 해안가를 따라 요새들이 중세 유럽의 견고한 성처럼 세워졌는데, 선별된 노예들을 바로 배에 선적하기 위해 바닷가 코앞에 건설된 것이다. 그 요새의 숫자는 골드코스트 구역에만 60여 개가 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30개 정도이며 거의 본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15개이다. 그 건축물들은 유럽에서 직접 자재를 가져와서 지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그 건축물들을 보면 말 그대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요새를 보는 듯하다. 엘미나 요새를 보면 원 주인인 포르투갈에게서 빼앗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을 하고, 21세기에는 가나에서 다시 보완공사를 했지만, 17세기 당시 조감도를 보면 빠삐용에 나오는 기아나의 감옥처럼 위용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73년 서인도회사가 지은 어셔 요새는 200년 전에 지은 엘미나에 비해 실용적으로 설계되어 마치 형무소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다 효율적으로 노예를 관리할 수 있게 건축되었다는 말이다. 현재 가장 유명한 곳은 케이프 코스트 요새이다. 2000년대 초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방문하여 유명해진 그 요새는 처음 1555년 포르투갈로부터 시작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직원인 헨드릭 칼로프가 증축을 한 후,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마지막엔 프랑스와 영국이 개입한 노예무역의 복마전이었고, 무엇보다도 영국이 주인일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그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튼 그렇게 규모가 커진 원인은 15세부터 가나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고, 그와 함께 가나와 베냉 지역에서 많은 노예들이 양산되어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1664년 영국에 편입된 후 케이프 코스트로 이름을 바꾼 그 요새는 영국의 서아프리카 무역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고 지역의 형사 사건의 집행도 이루어지는 행정기관이기도 했다. 1689년과 1722년에는 영국 해군이 대서양에서 노략질을 하던 해적들을 잡아와 재판을 하였고 그중에 수십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유럽의 웬만한 성처럼 크고 견고한 그곳은 높게 망루가 솟아 있고, 옥상에는 십여 개의 화포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요새 내부에는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큰 정원도 있었고, 무역과 행정 사무실, 주거시설, 식당, 무기 창고, 우체국, 의료시설, 기타 각종 편의시설이 구획되어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노예를 관리하는 수용소도 지하에 구축되어 있었다.

     

그 요새로 몇 명에서 수십 명 단위로 노예들이 수시로 입고되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역마다 시기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노예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전쟁에서 체포한 적군이나 아녀자들을 전리품의 일종으로 취득하여 노예로 삼았고,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이나, 채무 관계에 얽힌 사람이나, 혹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 받고 팔려가는 경우의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곡절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대게 왕족이나 귀족의 소유물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시중이나 농사나 목축에 동원되기도 하고 이런 과정에서 차별을 받기도 했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부두교 같은 종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아메리카에서처럼 탐욕의 재물이 되지는 않았다. 대게는 자유 원주민과 섞여 살았다. 어느 때는 과잉 현상이 나타나 놀고먹는 노예도 많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잉여의 노예들이 처음엔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이 대서양 무역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잔잔했던 파고에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런 양상은 16세기 한 세기 동안 아메리카 전 지역을 유럽인이 정복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바로 제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에 따라 노예의 수요는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노예해안에 접한 60여 개의 부족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노예를 확보하여 유럽인에게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노예상들은 더 많은 노예들을 원했다. 18세기, 서중부 아프리카에서 콩고 내전이 일어나자 생각지도 않은 노예가 급증하였고, 골드코스트에서는 다호메이 왕국, 오요 왕국, 아샨티 왕국 등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 수많은 노예가 양산되었다, 이제 노예 사냥꾼 폼베이로스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 다오메이 왕국은 노골적으로 노예를 사냥하여 수십만 명을 유럽 노예상에게 팔아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오히려 노예가 과잉 생산되는 지경에 이르러 노예 인플레이션 현상까지 발생했다. 그것은 유럽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아프리카의 비극이었다. 정상적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그나마 사람대접을 받았지만, 전쟁 포로로 잡힌 노예들은 부족 간의 원한 관계 등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잡힌 노예들은 목과 발목에 쇠사슬로 묶인 채 노예 요새로 줄줄이 끌려갔다. 그 이동 과정에서 수백만의 노예들이 죽었다. 해안과 가까운 지역에서 출발하면 그래도 덜했지만 내륙 깊은 곳에서 이동하는 경우는 많은 사망자를 양산해야만 했다. 특히 콩고 내전 중에는 내륙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곳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 죽음의 행진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전쟁 포로가 대다수여서 이미 정상적인 육체가 아니었고, 이동 중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여 아사나 질병 그리고 폭행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행진을 한 후 노예 요새의 수용 시설에 감금이 된 그들은 또다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선 노예 품질 검사에서 불합격된 노예들은 폐기 처분되었고, 합격된 노예는 지하 감옥에서 노예선이 기항하기를 기다렸다. 노예선의 입항은 일정하지 않아 기약이 없었다. 한 배에 300~500여 명을 선적할 수 있었는데, 그보다 많은 노예들이 서있기도 좁은 지하 공간에서 웅크린 채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하루 한 끼의 옥수수죽과 한 모금의 물로 생명을 지탱했으며 배설할 내용물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생리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오배수로가 있었지만 배설물은 흐르지 않아 그 자리에 쌓였다. 손바닥만 한 창구멍 밖에 없는 공간에 암모니아 냄새와 악취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때론 전염병과 폭력으로 주검이 되어 요새 밖으로 버려졌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들을 불안과 공포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지상에서는 유럽인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하 감옥에서는 저주의 울음소리가 차디찬 회벽을 할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노예선이 입항하면 지하에서 연결된 ‘돌아오지 못할 문’을 통과해 바다내음을 맡으며 또 다른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다. 이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바다냄새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서 잠깐 16세기와 19세기, 약 350년 동안 아메리카로 팔려간 지역별 노예 집계 현황을 보고 가겠다. (출처 위키피아) 서중부 아프리카 지역(콩고, 로앙고, 앙골라) 5,694,000명 39.4% / 베냉만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1,999,000명 20.2% / 비아프라만 지역 (나이지리아, 카메룬, 적도기니, 가봉) 1,594,000명 14.6% / 골드코스트 (가나, 코트디부아르) 1,209,000명 10.4% / 세네감비아, 기니, 동아프리카 기타 4.7%     

그 현황을 수입 국가로 보면, 포르투갈(브라질) 480만 명, 영국(북미, 카리브해 자메이카, 바하마 등) 230만 명, 프랑스(아이티, 도미니카 연방, 가니아 등) 110만 명, 스페인(멕시코 외 중남미) 106만 명 나머지는 네덜란드와 미국과 덴마트 등이다. 이 통계를 보면 포르투갈이 노예무역의 지존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거의 400년 동안 이루진 것이고 영국은 150년 사이에 발생한 숫자이다, 결국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합하면 1200만여 명이고 이중에 약 180만여 명이 노예선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200만 명이 아프리카를 떠났는데 도착한 인원은 1020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에서 이동 중에 400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고 한다. 또한 어떤 통계에서는 노예 요새에서도 80만 명 이상 죽었다고 한다. 이런 중간통로에서 학살된 사람은 광범위하게 400만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3만 건 이상의 노예선 항해 기록을 조사한 결과 나온 1200만 명, 180만 명 설이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한다. 사실 밀수 같은 불법적인 거래까지 감안한다면 기록에 남아있지 않는 실제 사건의 숫자는 가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00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넓은 의미의 포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4. 노예선     


이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노예선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 위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처음 노예 전문 선박이 항해한 것은 1525년 상투메 뉴스페인 항로였다.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은 혁명적인 캐릭터선을 개발하고, 그리고 더 많은 돛을 달고 항법장치까지 장착한 범선을 만들어 항해기술을 발전시켰다. 현재 포르투갈 국기에 혼천의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항해 기술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7세기에 네덜란드가 가세하여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고 18세기엔 영국이 노예무역에 가담하면서 갤리온이 등장하는 범선시대의 정점을 찍었다. 영국은 노예 선적에 최적화된 범선을 제작하여 리스크가 큰 노예무역에 있어 혁신적인 이익을 남기게 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한 척 기준 선원 30~40명에 노예 300~500을 실을 수 있었고, 항해 시간도 3개월 정도에서 6~8주로 앞당겼다. 선적량은 물론이고 짧아진 항해 시간은 노예 사망률을 낮추는 결과를 만들어 노예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노예무역 초창기의 선주는 다양하다. 삼각무역을 총괄 경영하는 무역상, 금융투자자, 귀족 등으로 구성된 투자 신디케이트가 소유주일 수 있고, 해운회사가 소유주일 수도 있고 혹은 부유한 자본가나 귀족의 소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국가 주도로 바뀌었고, 포르투갈도 상대적으로 식민지 브라질의 경제 규모가 더 커지면서 무역 루트가 다양해졌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자본가든 노예선의 구조와 운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상선이나 노예선이나 모두 선박을 운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선장이다. 항상 위험이 도사린 망망대해에서 정확하게 목적지로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항법이나 항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해박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선원 조직의 리더로서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선박에서의 감독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또한 책임도 그에 따른다. 특히 노예선의 선장은 다른 선박의 선장보다 더 많은 카리스마가 요구된다. 노예선 선장은 법적으로도 권한이 막강하여 선상 반란이 일어날 경우 교수형에 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터의 야전사령관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반란은 곧 전체 선원의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에 용인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감독자나 조정자이자 관리자였다. 무엇보다 위계질서와 규율을 통제하는 심판자로의 역할도 중요했다.

     

선장은 일정한 소득을 보장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노예선 선장은 원양어선처럼 수익금을 분배받는 형식의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선장은 과거 노예상 출신이기도 하고, 후에 노예상인이 되기도 하고, 많은 경우는 투자자이기도 하다. 실제 선장들은 상인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 노예 요새 해변에 정박한 후 그곳에서 유럽 각지에서 온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노예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상들과 거래를 하여 싼 가격에 퀄리티가 뛰어난 노예를 구하는 것도 선장이 해야 할 중요한 몫이었다. 항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상인으로서의 기질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이 쌓여 아예 노예상이 되기도 한다. 선장들은 그렇게 노예선을 서너 번 타면 평생 풍족하게 먹고살만한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사실 항해 중 선장의 사망률은 10%가 넘었다.

               

회사와 계약을 체결한 선장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항해 준비를 한다. 가능하면 우선 과거에 자신과 함께 배를 탔던 항해사와 갑판장이 먼저 구하고, 의사도 섭외하고, 그리고 그들과 합의가 되면 함께 선원들을 찾아 나선다. 일반적인 상선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노예선의 경우는 지원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선원을 구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이에 선장은 숙련된 위선자가 되어야 했다. 천사와 악마를 겸비한 선장과 항해사는 여러 가지 술수를 통해 선원을 유혹해야 했던 것이다. 자발적 구직자의 경우라도 정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면담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입에 바른 달콤한 유혹과 감언이설이 필요하고, 때론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들이나 불량배들을 협박하거나, 빚을 진 백수의 채무를 갚아주기도 하고 심지어 주정뱅이나 걸인들을 납치하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게가 불가촉천민 같은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감옥에 가는 대신 배를 타는 게 더 나았다. 어렵게 모집한 선원 중에는 각자 기구한 서사를 가진 흑인들도 꽤 있었다. 그렇게 인원을 확보한 선장은 선상에서 필요할 여러 가지 물품을 구하는데, 그중에는 노예에게 사용할 신체 구속 기구와 여러 종류의 고문기구도 포함되었다. 노예들이 하갑판에 적재해 있을 때 사용하는 족쇄의 일종인 빌보, 이동할 때 사용하는 족쇄와 사슬, 수갑 그리고 칼, 채찍의 일종인 구교묘,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는 스팩큘럼오리스, 엄지 손가락을 고문하는 나비나사 등이 필수적으로 선적을 했던 것이다.

     

노예선에서의 위험요소는 노예들의 반란이나 폭동 같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 선장과 선원 간의 갈등과 다툼과 폭력 등이 항시 상존했던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노예선에서의 선장은 상선에 비해 거친 환경일 수밖에 없는 선상 생활에서 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야 오합지졸인 선원을 다스릴 수 있었다. 선장의 권한은 절대적이지만 사람에 따라 선상에게의 분위기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보다 극단적인 권위를 추구하여 횡포한 지도력을 발휘한다거나, 혹은 성격적으로 잔혹하고나, 소시오패스적인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선장의 경우는 선상 반란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악랄한 선장은 만난다면 선상생활은 고달프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선원을 괴롭히는 경우는 여러 가지다. 선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에 반항을 하는 경우 혹독한 형벌이 뒤따르기도 하고, 의류나 장구류, 담배, 럼주 같은 물품을 강매한 후 급여에서 공제하기도 하고, 정도가 지나친 경우엔 부채 노동자가 되어 오히려 빚쟁이로 전락하는 선원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 실패하면 돛대에 걸어 교수형을 당하기도 하고, 성공하면 대부분 해적에 합류했다고 한다.      


사실 선원들의 선상 생활은 3D 노동의 전형이었다. 노예선의 특성상 배의 구조는 노예나 화물에 맞추어 설계가 되어 있어 정작 선원들이 두 다리를 뻗고 쉴 편의 공간이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선실이 좁아 갑판에서 잠을 자는 선원도 많았다고 한다. 더구나 노예들이 빼곡히 들어찬 하갑판을 청소하고 소독을 하는 것은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하루에 한 번 한두 시간씩 노예들을 상갑으로 이동시켜 운동을 시켰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 하갑판에 내려가 수백 명의 노예들이 내질러놓은 온갖 배설물을 청소해야 했던 것이다. 역겨운 냄새들이 진동을 했지만 참아야만 했다. 노예들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족쇄를 풀어줄 경우 난동을 부릴 염려가 있었다. 그리고 노예들을 취급하는 것 또한 엄청난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더구나 폭동이라도 일어날 경우엔 목숨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고단한 노동과 더불어 말라리아와 천연두 같은 전염병에 항상 노출되어 있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망한 선원이 20% 이상이었다고 한다.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선원은 10명 중에 8명이라는 것이다. 영국 노예선의 항해일지를 보면 사망자 숫자가 빠지지 않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배를 탄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혹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상 노동자들의 급여는 박했다. 선장과 오너는 상당한 이득을 챙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돈은 처음 약속과 달리 항상 부족했다. 항해 중 선원 사망자가 많이 발생할 경우엔 수익 할당량이 높아지는데, 산자들은 그것을 오히려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노예선은 선원들에겐 노동지옥이었지만 노예 당사자들에겐 삶과 죽음의 전쟁터이었다. 노예 요새에서 엄격한 선별 과정을 거쳐 배에 선적된 노예들은 중요한 부분만 가린 채 하갑판에 순서대로 들어가 침상 안쪽 끝에서부터 차곡차곡 누웠다. 틈도 없이 어깨를 맞대고 누우면 두 사람의 발목 하나에 일일이 빌보가 채워졌다. 과적을 한 경우엔 모로 뉘어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재였다. 그렇게 빌보로 엮으면 수십 명 단위로 체인처럼 연결이 되었다. 발을 딛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배가 클 경우엔 바닥에 노예들을 채운 후 이층 침상에도 그런 순서로 촘촘히 적재하였다. 하갑판의 구조는 남자 여자 칸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수백 명의 남녀 노예들이 빈틈없이 그렇게 적재가 끝나면 죽음처럼 차디찬 침묵이 흘렀고 이어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갑판 바닥 판재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하갑판 공간은 찜통 같았다. 습기 찬 뜨거운 공기가 하갑판 틈으로 침투했고,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뿜어져 나온 땀과 열기가 더해져 하갑판은 항상 수증기가 가득했다. 숨도 제대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배설을 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취가 진동을 했다. 그런 날이 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그들은 하루에 한 번씩 상갑판으로 옮겨졌다. 족쇄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래도 선원들이 휘두른 구교묘를 맞으며 상갑판으로 난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선장은 노예들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한두 시간씩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했고, 각자 돌아가면서 춤을 추게 했다. 하지만 처음엔 춤을 추는 사람은 없었지만, 등짝에 난자가 나도록 채찍을 맞은 뒤에야 어설프게  춤을 추었다. 그 지옥 같은 배에서 어떻게 춤을 추겠는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선장이라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갑판을 걷게 했지만 대부분 많은 선장들은 폭력적으로 노예들을 다루었다. 그런 웃푼 시간이 지나가면 그들은 다시 지하 감옥으로 차곡차곡 적재된다. 그리고 선장들은 여자 노예를 자신의 선실로 불러 성노예로 삼았다. 물론 항해사나 갑판장들도 그랬다,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선원들이 몰래 그렇게 했다가 걸리면 혹독한 대가를 받았다.      


지옥 같은 생활이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하지만 전염병이 하갑판에 창궐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 환자들이 증가했다. 특히 이질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점차 우울 증세를 가진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 사람 두 사람씩 쓰러진다. 선의의 판단에 따라 사망한 노예는 바다에 던져지고, 가망이 없는 사람들도 예방 차원에서 산 채로 바다에 수장한다. 그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한다. 선원들도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하갑판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아예 거부하는 경우도 생겼다.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은 하갑판은 이제 등골이 송연해지는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선원들도 각종 전염병에 걸려 지독한 병치레를 겪기도 하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졌다. 그리고 이런 극악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노예들은 기회를 노려 바다로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자살이 빈번할 경우엔 선체 밖으로 그물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처음부터 노예가 아니었던 사람들 많았는데, 이런 가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여름, 태풍의 눈처럼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에 사로잡힌 노예선 위로 타는 듯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속도도 거의 내지 못하는 노예선의 갑판 아래에서는 찌는 듯한 열기가 가득 차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그 열기는 상갑판 위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바다 바람에 이내 사라지고 있었다. 나무판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당과 지옥이 갈렸다. 선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쉼 없이 아래 하갑판으로 내려와 공명했다. 때로는 죽음의 발자국처럼 때로는 자유의 소리처럼 무겁게 그들의 땀에 절은 몸을 짓눌렀다. 이제 질곡에 매인 몸이라 바다에 뛰어들 수 없을 때는 어느 누군가는 곡기를 끊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경우엔 선원들이 컴퍼스 모양처럼 생긴 스펙큘럼오버스로 그들의 입을 강제로 벌려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부었다. 수십 명의 노예들이 온갖 질병과 폭행으로 죽은 뒤였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폭동을 일으킨다. 몇몇 여자 노예들은 선장과 항해사들의 성노리개나 하인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도움으로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폭동의 주범 중에는 투쟁심이 강한 전쟁 포로들도 있었고, 월래 호전적인 부족 출신도 많았다. 하지만 족쇄를 풀고 선원들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상갑판 헤치를 열고 선상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더라도 대부분 진압이 되었다. 용맹하게 싸우지만 맨주먹으론 총과 칼 앞에서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도리어 역습을 받고 무참하게 쓰러졌다. 더구나 폭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선단을 성처럼 높여서 폭도의 진압을 제어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폭도들은 정신승리만으로 반란을 성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반란에 참여한 노예들은 본보기로 살이 찢기는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 바다에 던져졌다. 부상을 당한 산자도 시름시름 앓다가 주검을 맞이했다.

      

사실 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성공하더라도 항해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반란을 시도하는 것 또한 노예들의 부족 구성이 달라 규합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설령 행동으로 이행된다 하더라도 성공 확률은 더욱 낮았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던 노예들이 항해 중에 폭동을 일으킨 것은 자유를 찾고 장렬하게 죽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그들의 폭동은 정당방위였다. 1785년 어느 상선이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유령선처럼 떠돌던 범선을 발견하여 조사를 하였는데, 그 배에는 흑인 15명이 기아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선원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노예 반란은 성공했지만 항해를 하지 못하고 바지선처럼 부유하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선의 규모로 모아 적어도 4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반란은 무모한 짓이지만 그래도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대게는 정박 중이거나 육지와 가까운 해안이었다. 최소한 지평선 상에 육지가 보일 때 시도해야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1753년 감비아 강 하류에 정박 중이던 토마스호에서 87명이 반란을 일으켜 노예선을 접수한 후 탈주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종종 발생하였다. 특히 비아프만의 이비비오족은 호전적이어서 폭동을 자주 일으켰는데 이에 요주의 부족으로 분류하여 그들을 분리 감금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네감비아와 골드코스트와 베냉만 같은 지역의 부족 출신들은 노예 수에 비해 폭동률이 높았지만, 상대적으로 앙골라와 콩고 지역의 부족들은 전체 노예의 40% 가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동률은 11%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선상 반란이나 폭동은 리스크를 높여서 노예시장을 위축시켰다. 18세기에 선상 폭동사고는 485번이 발생했다고 하며, 비율로는 대략 10% 정도가 되어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 손실은 다른 부분에서 더 많이 발생했다. 1738년 서인도회사 소속 류스덴호는 성공적으로 중간통로를 통과했지만 도착지인 수리남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전복되는 사고가 났는데, 이 와중에서 선장과 선원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702명의 노예는 배와 함께 침몰했다고 한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서인도회사에서 이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였는데, 놀랍게도 의도적으로 선장의 지시로 하갑판 헤치를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노예가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폭풍이 몰아쳐 오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노예의 반란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선장은 강변했는데 이 논리에 놀랍게도 조사자들은 설득되었다. 한꺼번에 700명의 노예들을 풀어주었다가 혼란이 가중되어 도리어 자신들의 신체가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고, 이런 판단으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그대로 둔 채 탈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타당성이 인정된다고 중론을 모은 것이다. 그렇게  네덜란드 법원은 선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1695년 영국 왕립아프리카회사 소속 하니발호에서는 이질, 천연두 같은 전염병과 기아, 탈수, 자살과 그리고 폭력 등으로 700명 중 328명이 사망했고 선원 중 상당수인 36명도 질병 등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노예선 자체가 아비귀환이었다. 항해가 조금만 더 지체되었다면 유령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선박 사고는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학대와 학살과 더불어, 자연재해에 의한 난파나, 심각한 전염병이나, 화재 같은 사고나, 해적선의 공격이나, 이유가 불분명한 실종 등의 사고로 인해 노예들은 대서양 깊은 바다로 속절없이 사라졌다. 특히 난파된 노예선도 상당수여서 20세기에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현재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난파 노예선의 잔해를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찾은 노예선이 크로틸다호, 크리스티아누스 퀸투스호, 프레데리쿠스 콰르투스호 등 여러 척이라고 한다. 평균적으로 12%, 적게는 2~3%에서 많게는 50%에 육박하는 노예들이 대서양 중간통로에서 주검이 되었다.

      

대표적인 노예 운송사건 중에 종학살(Zong massacre)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다. 글자대로 많은 노예들이 학살된 사건이다. 1781년 11월이었다. 110톤급 노예선인 영국 리버플 무역연합 소속 종호는 192명이 적재량인 데도 불구하고 두 배가 넘는 442명을 싣고 1781년 8월 18일 자메이카를 향해 골드코스트를 출항했다. 톤당 1.75명을 넘지 말라는 선박협회의 규칙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노예선은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호의 과적 정도는 너무 심했다. 그것도 모자라 선원은 고작 17명에 불과했다. 종호는 무거운 짐을 싣고 가나의 아라크를 출발해 상투메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로 접어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종착지인 자메이카였다. 하지만 종호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식수를 보충해야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 자메이카로 직접 향했다. 당시 선장은 콜링우드였는데 초보에다 그 항해 당시 열병을 앓고 있어서 키를 승객인 스터브슨이 대신 잡고 있는 기형적인 상황이 벌이지고 있었다. 선장 자리가 공석일 경우 1등 항해사가 대리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 항해에서는 항해사 켈샐이 어떤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선장으로부터 직위해제를 당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침 선장 경험이 있던 스터브슨이 선장 자리를 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게 종호는 항해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종착지인 자메이카를 지나져 엉뚱한 곳에서 마치 링반데룽 현상처럼 헤매게 된다. 출항 후 지원을 받지 못하고 3개월이 가까워지자 질병과 영양부족 등으로 노예 62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1월 29일 54명, 12월 1일 42명 그리고 며칠 후 36명을 산 채로 바다에 수장하였고, 이를 목도한 노예 10명이 지옥 같은 세상을 스스로 벗어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 살육이 자행된 후 종호는 12월 22일 자메이카에 태연히 입항했다. 4개월 4일 만이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노예 1명당 36파운드에 팔았고 선장 콜링우드는 며칠 후 병사했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2년 후 소송으로 이어졌다. 무역상인 리버플 노예무역연합은 종호에서 벌어졌던 노예 손실에 대해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였으나 보험사는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선주가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연합 측은 질병 같은 자연사일 경우엔 보험금을 받을 수 없지만, 화물이 바다에 빠져 손망이 될 경우엔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면서 노예 한 명 당 30파운드로 계산하여 청구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종호의 항해일지가 심사 과정과 재판에서 밝혀지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1심 판결은 예상과 달리 길지 않았다. 1783년 3월 맨스필드 판사는 원고인 선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이유는 종호의 상황이 극도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불가항력으로 말을 바다에 던진 것과 같이 노예들을 바다에 던졌으므로 이는 정당했다는 것이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화물이나 동물의 일종이라고 취급한 것이며, 이는 해상사고보험에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에 보험서는 재심의를 신청했다. 자신이 승소할 줄 알았던 보험사 측은 종호의 항해일지를 자세하게 조사를 하고 증인도 어렵게 설득해 재판정에 세웠다. 이미 선장은 사건 당시 자메이카에서 병사를 했기 때문에 항해사와 선장 대행이었던 스터브슨과 선박 의사까지 증언대에 세웠다. 증인 스터브슨은 식수 부족인 상황에서 노예를 버리지 않았으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한 판단이었다고 재차 주장하였다. 이에 보험사 측은 선장의 잘못된 항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자 선주에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요인을 만들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예를 죽였다고 반론을 폈다. 그러니까 보험금을 노리고 노예 130명을 수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팽팽한 대치는 스모킹건이 나타나면서 해결되었다. 보험사 측에서 항해기록을 세밀하게 드려다 본 결과, 세 번째 학살이 이루어지기 전에 비가 왔다는 증거가 나와서 불가항력이란 논리는 기각되었던 것이다. 해상사고가 아니라 선장의 실수 즉 톤당 4명이라는 과적과 선장을 비룻한 선원들의 항해 잘못으로 발생한 과오적 손실이라는 것이다. 재심의 판결은 노예 투척은 고의적인 화물 파손에 해당되며 이에 보험금 지급 의무는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 판결이 난 직후 노예폐지운동가인 그랜 빌 샤프가 살아있던 선원들을 살인 혐의로 고발을 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하였다. 민사에서는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을 했다고 판결이 났지만, 형사에서는 정황이 분명한데도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예는 화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중요한 포인트는 노예를 화물 취급했다는 점이다. 보험사의 승소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예를 그저 담뱃잎 자루처럼 취급한 당시 영국인의 비인본적 사회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기독교적이고 기형적인 사회학적 사유는 19세에 영국에서 인종주의의 결정판인 우생학 탄생의 기반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재무장관과 법무장관을 역임하고 대법원장까지 지낸 맨스필드 백작의 판결을 보면, 즉 당시 영국 상류층에게 보인 아프리카 흑인 노예에 대한 시선은 그저 가축보다도 못한 짐짝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건 당시 종호의 긴박한 상황을 증언을 통해 추정해 보면, 당초 일정보다 두 배나 더 걸린 4개월이 넘는 항해 동안 17명의 선원으로 442명의 노예를 관리한다는 것은 살인적인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오수처리장 같은 하갑판의 청소와 감시와 학대와 그리고 열악한 음식과 선실생활 등은 선원들을 악마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질 같은 전염병으로 62명의 노예가 사망하자 그 뒤처리도 자신들이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의사는 상품가치가 없는 노예들을 수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선장의 동의 요청을 받고 내적 갈등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수장의 명분을 얻기 위한 선장의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선장이 악마가 되면 선원들도 악마가 되기 마련이고, 선장이 적어도 상식적인 인성을 가지고 리딩을 한다면 선원들도 최소한의 선함을 잃지 않기 마련이다. 한번 악마화가 된 사람은 그 성향이 내재화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울부짖는다. 자신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거실에서 달콤한 설탕을 탄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고 있는 선주들은 피로 얼룩진 노예선의 공간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외면할 것이다.

     

이런 선상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선주들은 운송 프로세스를 개선하였다. 처음엔 많은 노예를 선적하기 위해 배의 용적을 크게 하였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많다는 것을 인식한 그들은 150~300톤급에 인원도 500명을 넘기지 않게 제안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다 신속하게 운송해야 했기 때문에 선박의 크기와 함께 빠르게 갈 수 있도록 기술적인 개선도 뒤따랐다. 노예 해안에 접근이 용이하고, 6주에서 8주 사이에 아메리카에 당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고 신속해야 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미국 달러 기준으로 노예 1명당 800달러에서 1200달러까지 판매되었다고 하는데, 운송 중 사망자가 발생한다면 노예상 입장에서는 손실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상품에 대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내에 식생활과 환경, 선원의 자질과 일정한 인원 등도 중요한 부분이었고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사와 다양한 의료품이었다. 이렇게 한 척의 노예선을 운항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희망처럼 노예선에서의 사망률은 낮아지지 않았다. 네덜란드가 18세기 중반 일찍 노예산업에서 발을 뺀 이유 중에 하나도 이런 운영시스템을 적용하면 자신의 입장에서 손익계산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욕망이 지배하던 대서양이었지만 그럼에도 정제된 질서를 지향했던 서인도회사는 포르투갈이나 영국처럼 거칠게 사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대서양 노예무역의 선두에 섰던 양대 산맥은 영국의 리버플 신디케이트와 브리스톨 신디케이트였다. 특히 리버플은 노예의 항구로 상징될 정도로 18세기 중후반 영국의 노예산업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1770년부터 1806년까지 리버플에 있는 12개의 조선소에 진수된 전체 선박이 460척 정도가 되는데 그중에 절반이 노예선이었다. 그만큼 노예 사상자수가 증가하여 영국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자국민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비인도적인 만행이 노예폐지론자들에 의해 연일 폭로되고 있었다. 청교도인들도 이런 노예무역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여타의 영국인들도 술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윌리엄 수상의 지시로 노예선의 실태 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26척의 노예선을 직접 타고 항해를 하면서 선상과 하갑판의 환경을 조사한 결과를 문서로 남겼는데, 이 내밀한 보고서를 노예폐지론자들의 손에 들어가 노예폐지 운동에 중요한 근거로 활동되었다. 그중에 1788년 윌리엄 돌벤 하원의원이 직접 297톤급 브룩스호를 타고 609명의 노예와 함께 자메이카 킹스턴까지 동행했는데, 당시 작성한 기록을 보면 상세도까지 첨부하여 노예선의 적나라한 실태를 직관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돌벤법이 만들어져 노예폐지에 시동을 거는 계시를 마련했다. 당시 언론에는 이런 무구가 나왔다. ‘함선 자체는 악마와 같은 기계, 거대한 고문 도구’ 그리고 미국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는 이 보고서가 아예 2,500부가 인쇄되기도 했다. 이런 결과 노예폐지운동은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받아 결국 19기 초에 노예폐지법이 발효되었다.

     

하지만 브라질의 경우는 영국의 노예폐지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을 때, 설탕 산업과 더불어 당시 획기적인 신재료인 천연고무 생산이 급증하면서 아프리카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1822년 포르투갈 왕조를 몰아내고 브라질 공화국을 선포한 후에도 브라질 경제에서는 노예는 없어선 안될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하지만 유럽 본토에서 사양 산업이었던 노예무역은 브라질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다 영국으로부터 전쟁을 불사할 정도의 압력을 받자 정부는 1850년 노예폐지법을 제정한다. 19세기에 노예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영국의 계속된 외교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무시하다가 영국 의회가 1845년 애버딘 법을 통과시켜 영국 해군에게 노예선을 나포하거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데 이런 다각적이면서 강압적 방법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자 결국 브라질 해안에 영국 해군을 포진시킨 것이다. 아무튼 노예의 시작과 끝을 포르투갈이 장식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에서 뒤늦게 노예의 숫자가 급증한 것은 설탕과 천연고무 등의 산업이 고도 성장한 원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1,2세대 노예들이 봉기를 일으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 마룬족이라고 불리는 공동체의 숫자가 사회적으로 위험할 만큼 증가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수요에 맞추어 포르투갈 출신의 마누엘 핀트 다 폰세카 같은 악명 높은 노예상들이 등장하여 일확천금을 노렸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쿠바, 미국, 브라질, 포르투갈 등의 선주와 노예상들을 끌어들이고,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어 노예사업의 글로벌 경영을 추구했다. 앙골라와 콩고에서 수집한 노예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브라질을 비룻한 여러 아메리카 식민지에 유통시켜 대서양에서 악명이 높았고 결국 브라질에서 1851년 노예폐지법이 통과되면서 그는 추방되었다. 하지만 폰세카는 시대의 마지막 노예상은 아니었다.

     

대서양을 항해하던 노예선은 사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노예 선적을 명목으로 등록한 노예선도 있고, 일반 상선의 일부 화물로 운송한 노예도 있고, 밀수 형식으로 소규모 노예를 운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노예선 중에 벨로즈 파사게라(Veloz Passagera)호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1830년 9월 쿠바 하바나를 떠난 408톤급 스페인 상선이 기니만 작퀸에서 노예 화물 556명을 선적하고 돌아오는 중 기니만 프린스 섬 부근에서 영국 해군에게 발각되었다. 영국 함선 프림로즈호는 일반 상선으로 위장한 벨로즈 파세게라호에게 정지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함포 사격을 하여 타격을 입힌 후 무력으로 배를 접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벨로즈호의 선원과 승객 등 43명 그리고 노예 6명도 사망했다. 그리고 그 배에 선적되어 있던 노예 550명을 구조한 후 영국법 절차를 거쳐 자유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원하면 아프리카로 보내지 않고 한때 해적 공화국이었던 해방 노예의 천국 바하마 같은 곳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18세기 중반까지 스페인과 영국이 쟁탈전을 하던 카리브해의 요충지로서 영국이 장악한 후 1807년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일종의 노예 해방구였다.

    

영국은 19세기 초 노예무역 폐지법을 통과시킨 후 유럽의 여러 국가와 노예무역 금지 조약을 맺고 서아프리카 노예 해안 등에서 불법 노예 거래를 단속하고 있었다. 일종의 대서양 노예 단속 경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이런 초법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노예선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가장 큰 노예시장인 브라질과 신흥 노예 수요처 쿠바와 미국 남부 등에서 노예무역의 끝물을 타고 단속을 무릅쓰고 노예시장에 몰려들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그곳은 이미 본국의 영향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탕수수와 천연고무와 면직물 등의 플랜테이션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었다. 노동력이 절실했던 그들은 가장 쉬운 방법인 노예수입에 혈안이 되었고 이에 목숨을 걸고 영국 해군과 숨바꼭질을 하였다. 특히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한 후라 유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매진했다. 하지만 19세기 노예선은 18세기와는 달리 배수량과 속도를 한층 향상시킨 구조 형태로 건조되어 1,000명 가까이 노예를 선적하는 경우도 있었고, 영국 단속선에 발각되더라도 대부분은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바로 그 벨로즈 파사게라호의 내부 조감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내용을 보면 보다 진화된 노예선의 형태를 직관할 수 있다. 선박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하부를 두 개의 갑판으로 나누어 하갑판에는 일반 화물을 선적하고 중갑판에는 노예 화물은 적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양한 화물을 나누어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갑판의 단면도를 보면, 천정 높이가 3피트 3인치 즉 1미터인 공간에, 쭈그리고 앉은 채 촘촘하게 붙어 있는 노예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노예 화물을 아예 눕지도 못할 만큼 빼곡하고 적재를 했다는 것을 직관할 수 있다. 그들에게 누울 자유도 주지 않고 그저 화물처럼 쌓아 놓은 것이다.                 


5. 마룬공동체     


지옥과도 같은 노예선을 타고 살아서 대서양을 건너온 아프리카인들은 또 다른 신세계와 접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게는 노예시장을 거친 후 수용소에서 1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 적응 기간을 보낸다. 항구에 도착한 노예들은 노예상들이 구입하기 전에 우선 신체검사를 받은 후 접합 판정을 받으면 수용소에 감금되고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폐사 수준의 공간으로 가서 죽임을 당한다. 이 선별 작업에서 많은 노예들이 죽었다. 항해 중에 이미 건강이 나빠진 노예들은 살아서 육지를 밟았더라도 선별 과정에서 걸러져 폐기처분이 되는 것이다. 불량품을 수리하여 사용하기에는 비용이 많아 들기 때문에 노예상들은 그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노예들은 노예상들이 운영하는 수용소로 이송된다. 이제 본격적인 적응 훈련을 받는 것이다. 농장주들은 건강한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이 아메리카 원주민 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적응 기간을 거친 노예들을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선호하였다. 아메리카인들에게 가장 취약한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도 면역력이 강했고, 신체적인 능력도 원주민보다 뛰어났고, 말이나 가축을 다룰 줄도 알았고, 무엇보다 현지에 인맥과 배경이 없어서 탈출할 염려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적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신체검사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쇠약해진 신체는 쉽게 치유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천연두와 홍역과 독감 같은 질병에 취약하였고, 또한 정신적인 충격에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초기 스페인 정착민들도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듯이 아프리카인들도 적응하는데 그들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온갖 질병과 속박된 환경을 이겨내면서도 그들은 아메리카에서 사는 데 필요한 언어와 생활 관습을 익혔고, 극악의 노동을 견딜 수 있는 신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프리카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그들의 노래와 춤과 종교의식 같은 것을 못하도록 철저히 막았다. 그런 방편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기독교로 개종을 강제하며 세례를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인을 아메리카화 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예상들은 이렇게 숙련된 노예를 만들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고 또한 농장주들은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플랜테이션의 기계처럼 설탕 생산에 필수적인 소모품이었다. 노예들은 그렇게 수용소에서도 많이 죽었지만 이동 과정에서는 더 많이 죽었다. 특히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항구 노예시장에서 출발해 밀림지대를 통과해야 당도할 수 있는 내륙지역이나,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에콰도르나 페루 같은 곳으로 이송되면서, 또다시 수많은 인명이 머나먼 밀림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무튼 이런 과정에서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수 대비 30% 이상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수가 대략 500만 명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조사는 노예선처럼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사망 숫자를 추정하는데 막연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만 명이라는 숫자를 반박하는 학자는 다수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병기로 만들어졌지만 그들은 혹독한 노동에 쉬게 적응하지 못했다. 월래 아프리카에서 노예였던 사람도 있었고 전쟁 포로나 노예사냥 등으로 졸지에 노예로 팔려온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플랜테이션 같은 규격화된 대규모 농장에서 중노동을 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에는 이런 크기의 농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급적인 면에서 노예일 뿐이지 일반적인 원주민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이 섞여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일하지 않는 잉여 노예도 많았다. 노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 경우엔 왕족의 과시용 소장품의 일종으로 양육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메리카에서의 삶은 차원이 다른 중간계 같은 세상이었다. 노예선에서의 어둠의 세계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이곳 플랜테이션에서의 살인적인 노동과 극빈의 생활은 점점 아프리카에서의 삶과 비견되면서 정신적인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없는 주검을 목도하면서 그들의 의식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신대륙 발견 후 정착민 세계에서는 본국의 적극적인 혼혈 장려 정책으로 인해 메스티조 같은 혼혈족이 등장하여 사회 저변을 형성하였다. 이를 본보기로 보이기 위해 멕시코를 정복한 코르테스가 최초의 메스티조를 생산하였다. 일정한 도시 규모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가 필수적이었다. 당시 스페인을 비룻한 서유럽은 온갖 전쟁과 페스트와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으로 인구가 급감했던 시점이라 신대륙으로 보낼 사람이 제한적이었다. 이에 신대륙에서는 자체적으로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구성원의 유럽화를 유도하기 위해 혼종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들이 유입되면서도 이런 정책이 적용되어 스페인과 흑인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은 극구 싫어하지만 전자를 뮬라토라고 하고 후자를 잠보라고 부른다. 이런 혼혈은 또다시 섞여서 카스티조와 모리소 같은 많은 새로운 혼종을 만들어냈다. 사실 혼종은 호모사피엔스 시절부터 지구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스페인인도 800년 동안 무슬림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아랍계와 혼합이 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포르투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호혜적인 인종 관계는 대서양 크리올이라고 하는 부류를 낳게 했다. 아프리카인인이 노예의 신분으로 아메리카로 와서 후안 가리도와 후안 발리엔테처럼 유럽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 자유를 찾은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어떤 형태로든 유럽화 된 그들의 혼혈 후예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그들은 유럽식 교육을 받기도 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접목시켜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창출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블루스와 재즈 음악이 있고, 자메이카에서 발전한 레게,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시작한 칼립소 그리고 브라질의 대표적인 삼바와 보사노바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역과 상황에 따라 특별한 케이스이고, 노예시장이 커져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노예들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대게는 거대한 농장과 광산에서 노동 기계로 전락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학대와 노동착취는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중에 의미 있는 일부는 자유를 찾아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저항의 길을 택했다. 노예 중에는 호전적인 전쟁 포로 출신이나, 패배당한 부족이나, 왕국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바로 그들을 중심으로 저항 세력을 조직하고 투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무장 조직을 마룬 공동체라고 부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룬 조직은 아메리카 전 지역 곳곳에 만들어져 유럽인에게 저항했다. 플랜테이션이나 농장들을 습격하여 곡식과 생활용품과 무기들을 탈취하기도 하고, 유럽인이 중심이 된 토벌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하고 패하기도 했다. 처음엔 산적이나 도적 때처럼 떠돌며 불안정한 생활을 해지만 상황을 극복했을 경우엔 도시 인근에 정착하여 농장도 만들고 가축도 키우면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작은 곳은 몇 백 명에서 많은 곳은 몇 천이나 심지어 웬만한 도시 인구인 만 명이 넘는 공동체도 만들어져 반란군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이런 마룬 공동체는 유럽인에겐 해충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로 인한 손실이 상당한 것도 물론이고 삶의 터전에 대한 위기의식에 봉착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무장 능력으로 마룬들을 토벌하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토벌대를 만드는 것 또한 큰 비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본국의 지원은 미미했고 동인도회사처럼 현지에서 모든 물리력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룬과 식민정부의 대치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다. 아마도 최초의 마룬은 1522년 히스파이올라에서 발생한 디에고 콜럼버스 총독 소유의 노예들의 반란일 것이다. 당시엔 반란 노예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어 마룬의 존재는 금방 사라졌지만, 자유의 투쟁은 이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몇 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형성된 대표적인 마룬 공동체가 멕시코의 양가 공동체이다. 가봉 왕족 출신 가스파 양가는 아프리카에 있을 당시 다른 경쟁 부족에게 체포되어 노예 신세로 전락한 뒤 대서양을 건너 뉴스페인 벨라크루즈 노예 시장으로 끌려왔다. 하지만 그는 부족이 다른 아프리카인들과 규합하여 저항군을 만들었다. 그 공동체 저항군은 농장이나 플랜테이션들을 공격하여 생필품을 탈취하기도 하고 자급자족도 하면서 끈질긴 투쟁을 한 끝에 1618년 결국 스페인 식민 정부와 협정을 맺고 자치주 형식의 정착촌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독립을 한 양가 공동체는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대표적인 마룬이 브라질의 팔마레스이다. 앙골라 왕족 출신 여자 노예인 아퀼툰이 1605년 봉기를 일으켰고 그 세력은 아들까지 이어져 투쟁을 이어갔다. 브라질에서는 그런 마룬 공동체를 퀼롬보라고 부른다. 그 퀼롬보는 팔마레스 산악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천연요새를 이용해 포르투갈 용병과 대치하였다. 용맹스러운 팔마레스군은 다시는 노예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퀼롬보의 인구가 2만 명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세력이 강력했고 왕국이라고도 불렀다. 신대륙에 유럽인 정착촌 인구가 몇 백 명 단위였던 현실에서 만 명이 넘는다는 것을 대단한 인적 구성이었다. 이에 대농장주와 식민정부는 도망간 노예들을 잡기 위해 원주민 용병과 아프리카 노예들을 중심으로 토벌대를 만들어 수차례에 거쳐 팔마레스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이런 지속적인 공성전을 이겨내지 못한 팔마레스 왕국은 1694년, 90년 동안의 저항을 끝내고 함락된다. 하지만 팔마레스 왕국은 사라졌지만 그의 잔여 세력들은 주변에 남아 또 다른 퀼롭보를 형성하여 30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후 팔마레스와 같은 퀼롬보가 수십 개가 만들어져 브라질 식민 정부에서 마음대로 다루지 못할 정도의 세력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많은 퀼롬보로 인해 노동력 부족의 결과를 초래한 브라질은 19세기에 접어들어 독립과 함께 사탕수수와 천연고무 등의 플랜테이션이 급증하면서 급하게 아프리카 앙골라와 콩고에서 노예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마룬 공동체들이 신대륙 곳곳에 존재하지만 그래도 국가 단위로 큰 세력을 형성한 곳은 카리브해 국가들이다. 자메이카는 5개의 마룬 조직의 힘으로 1740년 이미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받았고, 1800년에는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정착지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력이 가장 강했던 쿠조타운 마룬의 정예병 500명을 아프리카로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에라리온에 진압군으로 참전한 쿠조타운 마룬 일부는 종전 후 자메이카로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그곳에 남아 원주민과 해방노예와 그리고 크리올 등과 섞여 살았다. 그런 이주는 영국이 시에라리온을 식민통치가 용이하도록 설계한 일종의 영국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역시 최고의 마룬은  아이티였다. 프랑스의 지독한 지배에 시달리던 아이티 노예들은 강력한 마룬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하였다. 아이티 마룬에게 투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대혁명이었다고 한다. 그 혁명을 본받은 마룬은 투생 루베르의 지도력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드디어 1804년 치열한 전쟁 끝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치권 획득이 아니라 아예 혁명에 성공하여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흑인 국가를 건국한 것이다. 지금은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아이티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국가이다.


그리고 이밖에도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의 많은 섬에서 마룬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니카라과. 파나마 같은 중앙아메리카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남아메리카에서도 자유의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론 북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룬 현상은 전체 아메리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들 마룬의 공통점은 원주민과 결합하여 세를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유럽인의 피가 가능하면 섞이지 않는 새로운 혼혈인은 보다 강력한 저항의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수리남 정글지대에서 원시인처럼 사는 일부 원주민들의 외모를 보면 그런 혼혈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마존 깊은 곳에 과거 유럽인을 피해 달아났던 잠보족의 후예들이 거주하고 있다. 노예시대의 흔적은 그렇게 아직도 대서양 주변에 남아 구천에 떠돈다.

     

노예무역에 관한 기록은 방대하다. 유럽인은 350년 동안 자신들이 자행했던 시시콜콜한 내용조차 허투루 하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친절하게도 리얼리티 한 삽화나 회화도 곁들였다. 역사적 사료로서의 기록이 아니라  대개가 국가 행정 업무 기록들이었다. 그 방대한 기록들을 조사한 결과 12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학살되었다는 값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 숫자는 공적인 기록에 나타난 것을 계산한 것이고, 기록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알았다면 그 기록들을 파기하거나 최소한 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나라한 기록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월적 시각으로 궤변을 일삼으며 내용을 희석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하고, 아시아를 농락한 유럽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백인 우월주의에 스스로 매몰되었다. 특히 백인 우월주의의 역사적 맥락은 노예무역의 시작점까지 이어진다. 노예무역은 유럽인이 벌인 추악하고 비열한 리얼리티 쇼이며, 세속 권력과 영적 권력이 합작한 비인륜의 대서사시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등장한 인종주의와 우생학 등은 과학을 빙자한 형이상학의 기형아였으며 그후 이어진 홀로코스트는 그들이 고백한 것처럼 '최종 해결'이었다. 아직도 그 악령들이 검붉은 대서양의 파도를 떠돌며 과거의 화려한 추억을 음미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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