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항해의 시작
현재의 아메리카라는 명칭은 피렌체 출신 지도 제작자이자 탐험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1503년 경이었다. 콜럼버스가 1492년부터 탐험했던 지역에 대해 포르투갈로부터 지도 제작을 의뢰받은 그는 두 번의 탐사 끝에 종합적인 검증과 그에 관련된 지도를 그해 출간하였다. 아메리고는 그곳을 인도가 아니라 제4의 대륙 즉 신대륙이라고 명명했다. Mundus Novus(신대륙)라는 제목의 책은 포르투갈과 스페인뿐만 아니라 서유럽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말로만 듣던 신대륙에 대한 여러 지식들을 책으로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탐험과 발견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지침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후학들이 그를 기리게 위해 1507년 이후 제작한 지도에 신대륙을 America라고 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항해 시대의 포문을 연 것은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 왕국이었다. 처음엔 카스티야 왕국과 함께 15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레콩키스타가 성공 가능성을 보이자 대서양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당시 규모적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앞선 것은 카스티야 왕국이지만 본격적인 항해의 시대를 연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현재 대서양 서아프리카 해안 모로코 인근에 촘촘히 떠있는 카나리아 제도를 처음 정복한 것은 북아프리카계의 카나리아 왕국이었는데, 15세기 중엽 포르투갈이 그 왕국의 마시오 드 베텐쿠르 왕 한데 섬을 통채로 구입하면서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카나리아 왕국은 원래 카스티야 왕국의 속국이었는데 허락도 없이 포르투갈 엔리케 왕자 한데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팔아넘긴 것이다. 이에 카나리아 내에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카스티야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력으로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냈다. 당시 두 왕국이 맺은 조약이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인데, 포르투갈은 카나리아제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마데이라 제도와 카보베르데 제도와 아조레스 제도 같은 작은 군도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에게 있어 이 조약은 결국 전화위복이 되어 보다 넓은 영역을 확보하고 밖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현재의 모리타니와 세네갈 인근에 있는 카보베르데 제도는 앙골라 항로와 더 나아가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는 거점으로 발전한다. 아무튼 그것은 나중에 일이고 처음 항해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이끈 인물은 포르투갈 아비스 왕국의 왕자인 엔리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상 무역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발견한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지역의 무역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결국 기니만에서 황금해안을 발견하였고 아예 그곳에 엘미나 성을 건립하여 무역 교두보를 만들었다. 콜럼버스가 항해 국가인 포르투갈에서 괄시를 받은 것도 이미 아프리카에서 황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과는 상관없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최초로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을 횡단해 인도에 도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범선 4척으로 구성된 항단의 절반과 그에 따른 인명을 잃으면서 인도에 도착한 그는 향신료 무력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루트는 포르투갈만이 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항로였다. 당시 후추, 계피, 생강 같은 향신료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첨가식품이었다. 특히 후추는 설탕과 커피처럼 유럽인의 미각을 중독시킬 정도여서 그에 상응하는 고가로 거래되고 있었다. 바로 그 향신료의 고장이 인도였던 것이다. 다 가마 항로 이전에는, 인도에서 인도양을 건너 홍해와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을 거쳐 유럽으로 수입되었는데, 당시 이 무역 루트는 밀라노와 함께 유럽의 무역을 좌지우지했던 베네치아 공국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왕국에서는 접근할 수 없었다. 사실 이 루트도 대안 루트였다. 월래는 전통적으로 육상 무역로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유럽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오르만 제국이 중동 전체를 통치하면서 육상 무역로가 봉쇄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불가피하게 베네치아가 해상과 육상이 혼합된 새로운 루트를 개발했는데, 이제 그 무역로마저도 리스크가 높아 안정된 수익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한 아비스 왕가는 향신료 무역을 전담하는 일명 포르투갈 인도 함대를 편성하여 100년 동안 운영하면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똑같은 인도산 후추가 베네치아의 판매 단가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이렇게 향신료 무력으로 경제를 향상하면서도 기존의 서아프리카 무역에도 박차를 가했다. 특히 상아와 금 같은 물품과 함께 노예무역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당시엔 노예무역이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그 노하우를 기반으로 추후 아메리카 노예 수출에 최대 수혜자로 떠오른다. 노예무역에 관해서는 추후에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의 바다를 호령하던 포르투갈의 주앙 2세로부터 콜럼버스가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주앙 2세는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항해하는 콜럼버스의 계획 안을 검토한 결과 타당성이 있고 적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인도양 루트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서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려는 상황에서 서인도 진출은 고려할 상황이 안 되었고 무엇보다 불확실한 탐험에 돈과 인력을 소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렇게 해서 역사는 스페인 카스티야 왕조에게 거대한 아메리카를 선사한다.
하지만 주앙 2세는 자신이 문전박대했던 콜럼버스가 스페인 카스티야 왕조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바탕으로 신세계를 발견하자 욕심이 발동하여 지분 협상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신세계는 현재의 남극처럼 누구의 땅도 아니었기 때문에 발견한 사람이 깃발을 꽂으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월래 주인인 원주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당시 이슬람 제국을 몰아내는 데 함께 협력한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는 역사적으로 볼 때도 사실상 형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관계로 포르투갈 주앙 2세의 논리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콜럼버스 1차 원정 후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이사벨라 여왕과 토르네시야스 조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은 교황의 승인을 받고 확정되었다. 조약의 배경과 내용은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구의 절반을 위도를 중심으로 두 나라가 나누어 관리한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 내용을 지도상에 적용시키면 경계선이 현지의 브라질 중간 정도를 지나간다. 그래서 현재 브라질 공용어가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가 된 연유이다. 아무튼 두 왕국이 미지의 땅 아메리카를 쥐락펴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강국에서는 그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도 스페인은 다른 왕국의 거센 도전을 끝까지 이겨내고 자신의 땅을 지켜냈다. 그 신세계의 확장은 스페인 왕국을 부흥시키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것은 왕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 찬 정복자들의 집념 때문에 가능했다.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라고 불리는 정복자들은 황금의 노예가 되어 지옥과도 같은 신대륙을 전문 사냥꾼 호모사피엔스가 구인류의 영역을 파괴하듯이 아즈텍과 마야와 그리고 잉카를 무차별하게 정복하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전개될 이야기는 바로 그 1세대 정복의 시대에 그들이 자행한 제노사이드에 대한 추적이다.
2. 정복의 시대
제노바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를 거쳐 처음 산타마리아호의 닻을 내린 곳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라 나비다드였다. 그는 그곳에 정착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우여곡절 끝에 세 번째 원정에서 현재의 도미니카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정착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콜럼버스와 이사벨라 여왕 간의 중요한 협의 내용은, 서인도를 정복하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그 정복지의 총통(아델란타도 addelantado) 지위를 부여하고, 수입 중에 10~20%는 세금으로 왕국에 납부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파라여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조건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에스파냐에서 출항할 때는 필히 세례를 줄 수 있는 사제를 동행해야만 했다. 그렇게 온갖 시련을 겪은 후 콜럼버스가 정착에 성공하자 1503년 스페인 정부는 본격적으로 엔코미엔다(ecomienda)를 발동했다. 엔코미엔다는 일종의 위탁 관리 시스템으로서 식민 정책의 근간이 되는 국왕의 지침이다. 국왕의 백성이 정복하는 정복지는 국왕의 재산에 귀속되며, 그 재산을 위탁관리 하는 프로세스로서 연약한 원주민을 외부로부터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들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으며 또한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게 요점이다. 이 시스템으로 인해 원주민들이 강제적으로 금광과 농장에 동원되어 살인적인 노동착취를 당하였고 결국 수많은 주검으로 내몰렸다. 그 위탁 관리자를 엔코멘데로라고 하며 최초의 엔코멘데로는 콜럼버스였다.
이 식민 시스템이 처음 작동된 곳은 히스파니올라였다. 그 섬은 카리브해에서 쿠바 다음으로 큰 섬으로서 두 섬과 더불어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나바사, 케이먼 제도 등과 함께 그레이터 앤틸리스 제도라고 부른다. 그 제도의 지배 원주민은 타이노족과 아라와크족과 그리고 가장 호전적이었던 칼리 나고 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503년 경에는 이미 스페인 정복자들이 히스파니올라를 거의 지배를 하고 있었다.
최초의 신대륙 엔코멘데로인 콜럼버스는 시작과는 달리 마지막에는 불행하게도 실패자로 남았다. 발견의 역사에서는 신화적인 존재였지만 지도자로서의 존재는 그저 탐욕적인 인간에 불과했다. 3차 원정에서 산토도밍고에 본격적으로 정착지를 구축한 그는 본국으로부터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타이노족을 제압하며 영토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압적인 폭정과 몰상식하고 무능한 지도력에 정착민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기어코 저항까지 하는 상황으로 확산되었다. 발단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정착민 1명을 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선고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를 기폭제로 많은 투서가 본국으로 날아갔고 이에 여왕은 베아트리스 데 보바딜라를 산토도밍고에 보내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명을 하였다. 산토도밍고에 특파된 조사관은 우선 총독인 콜럼버스의 재산을 압류하고, 국왕의 이름으로 파면하고 본국으로 소환시켰다. 그리고 그는 조사를 착수했다. 보고서 내용은 이렇다. 경범자들을 고문하고 상해를 입힌 후 노예로 팔았고, 콜럼버스 형 바솔로뮤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피의자에게 혀를 자르는 형벌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원주민을 잔혹하게 학살한 후 그 시신을 거리에 전시하였다는 등의 내용들이 보고서에 가득했다. 콜럼버스는 극구 부인했지만 산토도밍고에서는 그를 옹호하는 정착민들은 거의 없었다. 그 조사 내용들이 개인적인 사감으로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다고 여러 역사가들이 변호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착지에서의 그의 신뢰는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 보고서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원주민 학살 내용인데, 그 이유는 처음 원정의 목적인 황금 확보에 차질이 생기자 원주민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금광을 캐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사망하자 이를 참지 못한 그들이 봉기를 한 것이었다. 콩키스타 시대에는 황금을 손에 쥐는 것만이 부를 축척하고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지만, 콜럼버스 시절에는 아직까지 원주민의 장식용 금 만 약탈했을 뿐 제대로 된 금맥은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알고 보면 콜럼버스가 지도자로서 자질이 불충분했던 이유는 황금에 눈이 멀어 혜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502년 콜럼버스의 후임으로 온 인물이 바로 니콜라스 데 오반도이다. 신임 총독이자 새로운 엔코멘데로는 전임자 보다 더 냉혹한 인물이었다. 특히 본토에서 온 정착민에게는 강온 통치를 했지만 원주민인 타이노족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다. 그 당시부터 시작된 잔혹한 통치는 정복의 역사에서 흑역사로 기록되었으며 후세는 그 사건을 타이노족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계획적으로 작심하고 자행된 이 학살은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된다.
당시 히스파니올라에는 크게 다섯 개의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 모든 족장은 스페인 국왕이 위임한 총독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그 억압 통치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족장마다 달랐다. 그중에 마리엔 부족의 족장 과카나가릭스는 콜럼버스가 처음 히스파이올라에 첫발을 딛었을 때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던 친 스페인 파였다. 과카나가릭스 족장은 총독과 동맹을 맺고 초기 정착지 건설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다른 부족을 정복할 때도 도움을 많이 주었었다. 그는 이미 전투에 필요한 물적 자원을 비교할 때 스페인 정복자와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누만 타고 다니던 당시 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거대한 범선과 그리고 하늘을 쪼개는 듯한 화포 소리와 화승총 등만으로도 원주민들은 오름을 펴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신화 속에서 나올 것 같은 괴물 같은 검은 말은 타이노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철로 만든 예리하고 강한 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사지가 잘려나가는 것을 목도하였던 것이다. 초보적인 청동기 물품은 있었지만 아직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타이노족에겐 스페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 속의 존재였다. 인구가 월등히 많다고 하지만 한번 기가 꺾인 타이노족은 홀릭에 빠진 것처럼 정복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 세력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자라과 부족이 요주의 부족이었다. 1503년 어느 날, 마리엔 족장은 오반도 총독에게 자라과족 여자 족장인 아나카오나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밀고를 했다. 이에 총독은 선수를 치기 위해 함정 작전을 폈다. 우선 선린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명목으로 자과라 부족 마을에서 축하 행사를 열 것을 하달했다. 그리고 행사 당일 총독의 명령을 받은 알론소 오헤다가 수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마을에 도착했고 족장이 참가한 가운데 축제가 열렸다. 자라족 사람들은 정복자들 위해 많은 음식을 내놓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오헤다의 명령으로 정복자 병사들은 마을 중앙에 모인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족장도 체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 80여 명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고, 달아나는 소년들의 다리를 칼로 베고, 참석한 일부 스페인 정착민들이 참혹함을 참다못해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을 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으로 아이들을 찔러 죽였고, 자라과족 족장 아나카오나는 스페인 국법인 반란음모죄로 기소되어 즉석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은 후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페인 법에 따르면 원주민도 스페인의 식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반란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무차별한 살육으로 법을 대신하였다. 아무튼 이후 살아남은 자과라 부족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고, 이 학살은 다른 부족에게도 전해져 반란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총독은 이후에도 여러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금광 개발과 카나리아 제도에서 종자를 가져와 경작하던 사탕수수 농장 등에 너무 과한 엔코미엔다 시스템을 발동하여 수많은 타이노족들이 노동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에 스페인 국왕은 오반도 총독을 콜럼버스처럼 본국으로 소환하여 파면시켰다. 그럼에도 이후에도 새로 부임한 국왕의 대리인 또한 황금에 눈이 멀어 원주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로 인해 당초 대략적으로 50만 명이었던 히스파니올라 인구가 1507년 조사에서 6만 명으로 감소하였고, 그 후 1514년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정밀하게 다시 인구조사를 한 결과 2만 6천 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리고 1548년 조사에서는 불과 500명으로 줄어들었다. 추정이지만 50만 명이 불과 50년 사이에 500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혹자는 200명이라고 하고 아예 멸종되었다는 설도 나돈다.
타이노족 대학살의 현장이 생생하게 기록된 것은 바라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수사 때문이었다. 도미니코 수도회로부터 선교를 위해 파견된 라스 카사스는 당초 목적을 수행하면서도 원주민이 핍박받고 있는 현실에 경악을 하고 그 처참한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인디언 몰락에 대한 간단한 기술> 보고서엔 히스파니올라 뿐만 아니라 푸에르토리코와 자메이카 등에서 벌어진 잔악한 행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양이 방대하여 여기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추려 보겠다. 초가집에 원주민을 몰아넣고 불을 질렀고, 금광에 원주민을 강제로 투입하여 음식도 제대로 보급하지 않는 가운데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였고, 그 노동착취는 노예와 다름없었고, 최근에 태어난 유아는 산모의 영양 부족으로 거의 사망하였고, 이런 착취로 인해 자살이 급증하였으며, 푸에르토리코와 자메이카에서만도 60만 명이던 원주민이 200명으로 감소하였다. 라스 카사스의 표현에 의하면 정복자들은 며칠 동안 굶주린 맹수와 같았다고 표현한다. 정복자들의 그런 잔혹한 행위는 보고서 내용의 삽화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목격한 라스 카사스는 1517년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 학대에 대한 상황을 국왕인 카를로스 5세를 알현하여 보고하고, 스페인 사회에도 폭로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개선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추기경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1552년 보고서를 정식으로 출간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1542년 원주민의 권리와 대우에 대해 도덕적 논쟁이 벌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스페인 식민법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그 논쟁을 바야돌리드 논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법에도 불구하고 역사 현장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타이노족의 인구 급감 원인은 물리적인 학대에 의한 것은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전염병 때문이라는 설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대륙 발견 후 불과 몇십 년 사이에 학살만으로 원주민 90%가 사라질 수 없다는 추측성 인과관계에서 나온 가설이다. 그러니까 학살은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월래 신대륙에는 병원균이 없는 청정지대였는데 구세계에서 가져온 온갖 질병과 관계된 병균들이 전파된 결과하고 한다. 신대륙에는 없던 소, 말, 돼지, 양, 염소 등 가축이 유럽인들에 의해 수입되었고 그로 인해 천연두와 발진티푸스와 디프테리아와 그리고 온갖 바이러스 등이 함께 따려 들어와 면역체계가 전혀 없던 원주민들을 감염시켰으며 그 결과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물론 매독 같은 성병도 한몫을 했다. 수천 년 동안 유럽인을 괴롭혔던 전염병들이 짧은 시간 동안 동시에 신대륙을 덮쳐 면역력이 생길 틈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은 원주민 학살의 책임을 희석시킬 수 없다. 오히려 전염병 설을 반박하는 학자들도 많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흑사병으로 대표되는 전염병으로 엄청난 인구 감소를 겪었고 이후 반등을 하여 평균적인 인구를 맞출 수 있었지만, 카리브해 원주민들에겐 그런 반등은 없었다. 그 이유는 지속적인 광산개발과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살인적인 노동착취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제임스 힉켈 같은 학자는 그로 인해 6개월마다 전체 인구의 1/3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전염병 감염 설은 기독교적인 윤리관에서 한발 빼기 위한 유럽인의 얄팍한 변론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튼 신대륙 발견 초기에 그레이터 앤틸리스 제도에서 너무나 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함으로써 노동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연쇄적 결과는 제2의 제노사이드를 낳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정복자 발보아
신대륙 정복 1세대를 정복자(Conquistador) 시대하고 칭한다. 정복자는 스페인 왕국이 공인한 법적인 명칭으로서 점령한 지역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취득한 재물의 80~90%를 소유할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에 정착하여 관리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콜럼버스와 이사벨라 여왕이 맺은 계약의 연장선이었다. 그 구성원들을 보면, 레콩키스타 전쟁 참전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본국에서는 출세의 길이 막힌 하층 계급 출신이나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등 여러 계층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비정규 혼합군이었다. 단순하게 설명하지면 일확천금을 꿈꾸는 욕망의 무리였다. 이베리아 반도 왕국은 당시 이슬람 잔여 세력인 그라나다 왕국과 레콩키스타 전쟁을 하면서 국가 재력을 너무나 많이 소모하였기 때문에 신대륙을 직접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부국을 도모하기 위해선 신대륙 개발이 절실했는데 이에 콩키스타 제도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나중에는 정복자의 후예들이 이베리아 왕국을 배신하여 독립을 하지만 당시엔 그 제도를 종교처럼 지켰다.
바로 그 정복자 중에 선두주자는 단연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다. 몰락한 이달고(일종의 하급 귀족)의 자식이었던 그는 모게르 지방 영주의 시종과 같은 하급 관료 일을 하면서 전전하다가 25살 때인 1500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접한 후 정복자의 꿈을 안고 대서양을 건넜다. 귀족의 피가 흐르는 그는 야망에 불타는 20대의 젊은이였다. 그는 수년간 후안 데 라 코사와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 같은 선구자적 정복자들의 부하로 있으면서 현재의 콜롬비아와 파나마 해안 등을 탐험하면서 정복 경험을 쌓았다. 특히 파나마와 콜롬비아 북쪽 해안지역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갖추었다. 그리고 후에 자신이 모시던 수장 중에는 히스파니올라 총독 데 오반도와 그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자라과족 학살을 지휘했던 장본인 데 오헤다도 그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탐험가의 기질과 리더십이 남달랐던 발보아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정착지에 불과했던 현재의 파나마에 위치한 산타마리아를 원주민을 제거하고 도시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산타마리아의 관할권을 주장하며 자칭 엔코멘데로가 되었다. 그것은 현재의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지역인 베라과의 권력자인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손한 행위였다. 이런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의 갈등은 악화되어 결국 발보아가 쿠데타를 일으켜 데 엔시소를 히스파니올라로 추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니쿠에사 같은 주변의 정복자들과 주도권 싸움을 한 끝에 발보아는 산타마리아와 베라과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발보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금을 찾아 끝없이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착취를 했지만 한편으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탐험과 정복을 위해서는 원주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역사가 피터 마테는 발보아가 원주민 중에 동성애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 40명을 체포하여 구덩이에 모아놓고 사냥개를 풀어 신의 이름으로 모두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몇십 년 후 마테가 10년 동안 세계 여러 지역의 정복지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사실을 묶어 출간한 여행기에 한 파트로 등장하는데 세밀한 삽화까지 곁들여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학살된 원주민들이 정말 성소수자였는지 믿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설령 그들이 성소수자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사냥개를 동원해 잔혹하게 학살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불가이다. 히틀러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에 동성애자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신의 섭리를 거스른 마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지의 땅을 넓혀가던 차에 어느 원주민으로부터 서쪽으로 가면 다른 바다가 있으며 그곳에 황금이 넘쳐난다는 전설 같은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원주민들한테 엄청난 양의 황금을 약탈했지만 발보아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바로 엘도라도가 보였다. 그렇게 발보아는 19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513년 9월 서쪽으로 원정을 떠났다. 바로 현재의 파나마 지협이었다. 그는 온갖 위험을 이겨내며 25일 만에 110km를 주파하고 드디어 태평양 연안에 도착했다. 그 과정은 한 편의 정복 서사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지만 여기선 한 문장으로 함축하였다. 아무튼, 1513년 10월, 드디어 유럽인이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한 것이다. 그게 무슨 중요한 것이냐고 하겠지만, 10년 후 에콰도르를 거쳐 페루 잉카왕국으로 가는 태평양 연안 루트를 개척하는 결정적인 방법론을 제공했고 이는 남아메리카 서쪽 지역을 정복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집념의 사나이 발보아는 그곳을 산타미구엘이라고 칭하고 정착지를 세웠다. 하지만 그 엘도라도에는 애석하게도 황금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원주민들이 많은 진주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모두 약탈하였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치고 산타마리아로 돌아온 발보아는 2년 후 보다 안전한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다시 2차 원정을 떠나 무사히 산타미구엘에 도착하였다. 그 정착지를 자신의 영지로 삼으려고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평양과 접한 이 미지의 남쪽 세계는 또 다른 콜럼버스 그 이상의 신세계라는 사실을 그는 통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보아의 정복의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데 오헤다 총독의 후임으로 취임한 페드로 아리아스 아빌라가 등장함으로써 그의 거취는 위태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후임 총독은 국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는 인물로서 1500명의 병력과 17척의 배와 그리고 많은 보급품과 관리자들을 거느리고 산타마리아 당도했는데 그 규모는 당대 원정대 중에게 가장 컸다. 그만큼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표증이었다. 당연히 신임 총독과 발보아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히스파니올라로 추방하였던 경쟁자 엔시소가 스페인 본국으로 가서 이미 발보아를 일방적으로 비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발보아는 다른 정복자들과 끊임없이 권력 투쟁을 해온 터라 주변에 정적이 많았다. 그런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던 신임 총독은 처음엔 유화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오만방자한 발보아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제거하기 위해 모략을 꾸몄다. 발보아가 발견한 산타미구엘을 총독의 허락도 없이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획책하고 있으며 그것은 총독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반역 행위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정복자의 영토는 곧 스페인 국왕의 영토인데 그것을 자신이 취하려고 한 행위는 곧 국왕에게 반역하는 불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올가미에 갇힌 발보아는 원정길에 올랐다가 총독의 지시를 받은 프란시스코 피사로한테 체포되어 산타마리아로 끌려온다. 피사로는 발보아의 부하로서 그와 함께 1차 태평양 원정에 참전하였는데 권력의 변화를 눈치채고 발보아를 배신한 것이었다. 바로 그 피사로가 잉카를 멸망시킨 바로 그 피사로이다. 아무튼 재판에 회부된 발보아는 자신은 국왕의 권위에 반하는 행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심판관 에스피노사는 발보아에게 참수형을 선고하였고, 발보아의 부하 4명에게도 동일한 선고를 내렸다. 1519년 1월, 그들은 선고 후 곧바로 참수되었다. 그렇게 폭주기관차 같았던 발보아의 탐욕은 멈추었다. 사실 발보아는 진정한 정복자의 표본이었다. 정복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악마성과 탐욕을 겸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4. 정복자 코르테스
신대륙 정복자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그들이다. 이 두 정복자를 논하지 않고 아메리카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알고 보면 두 사람은 외가 쪽으로 6촌 관계라고 한다. 나이는 코르테스가 7살 어리지만 정복자로서의 성공은 그가 먼저 이루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가 아즈텍 왕국을 무너트리는 것을 보고 심기일전하여 잉카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아메라카인들은 수적으로는 월등하게 많았지만 자신들의 전투 능력과 목적의식이 확고한 집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통찰한 것이다. 그리고 원주민한테 잔혹하게 대해야 그들의 저항 의지가 무너진다는 것도 경험으로 터득했다.
스페인 하급 귀족 가문의 자식이었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잠깐 법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출세의 길이 막혀있다는 것을 알고 발보아처럼 18살 때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본국에서 미래가 불확실했던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희망이 없던 많은 젊은이들이 엘도라도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으며 그중에 코스테스도 속해 있었다. 1504년 콜럼버스가 개척한 히스파니올라 산토도밍고에 도착한 그는 정착민으로서 시민권을 부여받고 건물과 토지를 소유할 자격을 얻어 원주민 노예를 두고 농장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당시 악명 높았던 오반도 총독으로부터 공증인에 임명되어 5년 동안 재직하며 행정 업무를 익혔다. 그의 이런 행정 업무는 후일 자신의 군대를 지휘하고 뉴스페인을 통치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많은 부도 축척했다. 오반도는 코르테스의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코르테스는 누구보다 야망이 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히스파니올라에서 자행된 타이노족 학살을 주도했던 오반도가 1509년 본국으로 소환되고 후임으로 디에고 콜론이 새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야심 차게 쿠바 원정을 기획했다. 원정대 지휘관은 총독의 부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맡았는데 코르테스는 이 원정에 지원하였다. 사실 오반도가 없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서 모험의 세계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렇게 떠난 벨라스케스 원정대는 1511년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섬인 쿠바를 어렵지 않게 정복했다. 히스파니올라 정복에서 얻은 경험이 중요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쿠바의 총독에 오른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재무관으로 임명했다. 코르테스는 행정 능력이 탁월했다. 총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그는 2년 동안 치안판사로 재직하기도 하고, 총독의 주선으로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등 출세의 길을 걸었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은 현재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지역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야 문명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쿠바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그곳은 이미 1517년 에르난데스 코르도바 원정대가 처음 발견한 지역이었다. 벨라스케스의 지원을 받은 코르도바 원정대가 처음으로 쿠바를 떠나 대륙 방향으로 항해를 하던 중 범선이 난파되어 구명보트로 표류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 대원들이 우연히 도착한 곳이 바로 유카탄 반도였다. 당시 살아남은 원정대 수는 코르도바를 포함하여 50여 명이었다. 코르도바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마야인과 접촉했는데 처음엔 우호적이었다가 소통의 문제 등으로 적대적이 되어 마야인의 공격을 받으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장에서 원정대의 대부분이 사망하였으며, 코르도바도 여러 개의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은 몇 명의 대원들의 도움으로 사지에서 탈주하여 목숨만 부지한 채 쿠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며칠 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생존자들의 입에서 황금 얘기가 나왔고 이는 굿뉴스였다. 엘도라도가 실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발라스케스는 다시 후안 그리알바를 유카탄 반도로 보내 탐험을 하게 하였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리알바 원정대는 코르도바 원정대가 패전하였던 지역을 찾아가 그곳 마야인과 한바탕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유카탄 해안 지역과 그곳 문명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한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전의를 불태웠다. 서쪽에는 카리브해 섬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는 거대한 대륙과 문명이 있다는 소문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규모가 크면 그에 상응하는 황금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정복자들은 고기 맛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쿠바 총독은 1518년 3차 유카탄 정복 원정대를 꾸리고 지휘관에 코르테스를 임명한다. 하지만 부하가 총명하고 야망이 크면 상사와 갈등을 일으키기 쉽고 때로는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던 시절이었다. 발보아가 산타마이아에서 자신의 상관을 굴복시키고 권력을 찬탈한 사건은 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런 불편한 관계로 인해 결국 사달이 났다. 하지만 마음이 바뀐 총독은 자신이 직접 원정대를 이끌겠다면서 코르테스 지휘권을 박탈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심사숙고해 보니 코르도바와 그리알바처럼 코르테스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원정대는 최종 점검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총독의 변심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그 명령을 불복종하고 원정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그런 행위는 반역죄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의 야망은 항명죄를 상쇄시킬 만큼 강고했다. 이에 코르테스는 쿠바 트리니다드에서 물자와 인력을 보충한 후 유카탄으로 출항한다. 어렵게 확보한 11척의 배와 518명의 보병, 13명의 기병, 석궁병 32명, 화승총 병사 13명과 그리고 말 32필과 대포 14문, 쿠바 원주민 200여 명과 흑인 다수 등의 보조병이 포함된 대규모 원정대를 이끈 코르테스는 그렇게 역사적인 아메리카 대륙 정복이 나선 것이다. 1519년 2월이었다.
코르테스는 직접적인 전투 경험은 일천했지만 뛰어난 지략과 리더십을 갖춘 정복자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강고한 집념과 냉정함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무기였다. 그렇게 욕망으로 불타올랐던 코르테스 원정대는 유카탄 반도에 상륙을 한 후 패배를 모르고 연전연승을 하면서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유카탄 반도의 주인이었던 마야 문명권은 이미 오래전에 도시 국가들이 연합한 일명 마야판 동맹이 힘의 균형을 잃고 거의 붕괴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에도 그 영향으로 인해 마야의 정세는 특정한 세력 없이 사분오열 된 채 내부적으로 와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치첸이트사의 쿠쿨칸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거석 유적들은 당시 코스테스가 당도했을 때도 이미 밀림에 버려진 퇴락한 유적에 불과했었다. 히스파니올라의 타이노족에 비하면 월등하게 발전된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의 마아 문명은 자체적으로 몰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코르테스 원정대를 접한 마야인은 힘없이 무너졌다. 타바스코에서 40,000명의 포토찬족이 저항을 했지만 스페인 원정대는 불과 2명만 사망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은 끝에 승리를 하였다. 몇 년 전 에르난데스 코르도바에게 죽음을 안겼던 마야인을 불과 몇 개월 만에 코르테스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것이다. 1519년 3월이었다. 이런 결과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히스파니올라를 정복할 때처럼 화포와 화승총과 기마병 등의 월등한 무기를 앞세운 무자비한 공격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코르테스는 카리브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여 광활한 베라크루즈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제 마지막일지 모를 엘도라도 아즈텍이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이때 아즈텍 진격을 앞두고 코르테스는 자신의 업적을 앞세워 쿠바 총독에게 지원 요청을 했는데, 아직 감정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총독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그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였다. 원정을 중지하고 돌아오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실 쿠바로 돌아가면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당할 게 뻔했다.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코르테스는 이에 쿠바로 돌아갈 자와 자신과 함께할 자를 선별하고 선단을 모두 바다에 침몰시킨 후 벼랑 끝 전술을 펴기에 이르렀다. 임전무퇴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는 자는 황금으로 배를 채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갈 곳을 스스로 제거한 코르테스 원정대는 빠르게 아즈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목을 조여들어 갔다.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와 틀란코판과 함께 연합한 일종의 트리플 얼라이언스의 실직적인 통치 도시국가였다. 코르테스 원정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즈텍의 주요 도시인 우에요칭고와 틀락스칼라 등이 저항을 하였지만 미미한 수준에 불과해서 거의 무혈입성에 가까웠다. 사실 그 도시들은 테노치티틀란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저항하는 부류에 속해 있었는데, 코르테스는 이를 이용하여 그들을 호혜적인 동맹군으로 만드는 놀라운 지략을 발휘하였다. 이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두 도시 이외에도 진격 중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원주민을 풀어주고 화해를 표하면서 상대적으로 테노치티틀란의 제왕 목테수마의 착취를 받았던 그들의 적대감을 역이용한 하였고, 그런 전략으로 많은 원주민 부족과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호로낙족과 나와족 같은 경우는 목테수마에게 많은 조공을 받치고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는 편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렇게 코르테스는 목테수마와 적대적인 부족의 병력을 흡수하여 당초 자신의 스페인 병력보다 몇 십 배나 많은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원주민 여자 도다 마리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코르테스 편에서 정복 중에 통역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의 정식 부인이 된다. 이에 힘입어 코르테스는 아즈텍 왕 목테수마에게 항복을 조건으로 회동할 것을 전했으나 왕은 거절하였다. 이에 병력 증강에 성공한 코르테스는 급기야 목테수마에게 우호적이었던 30,000명의 인구를 가진 아즈텍 제2의 도시 촐룰라를 점령한 후 중앙 광장에 4,000~6,000명의 원주민을 모아놓고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이 사건을 학살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전쟁 중에 사망한 인원이라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이 학살은 목테수마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종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결과적으론 이 전술은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잔인하고 막강한 병력의 코르테스 군에게 질려버린 목마수테는 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황금을 선물하면서 화친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무혈입성에 성공한 코르테스는 목테수마를 왕궁에 인질로 잡고 트리플 얼라이언스를 간접 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테노치티틀란은 대부분 인공으로 조성된 호수 중앙에 건설된 도시로서 거미줄 같은 방조제 도로망과 도심 곳곳에 전달해 주는 수로 등이 설치되어 있는 혁신적 도시였다. 역사가는 그 일자를 1519년 11월 8일이라고 기록한다. 특히 코르테스의 부관이었던 베르날 카스티요는 이날의 기록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하지만 상황은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1520년 4월,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반역자 코르테스를 응징하기 위해 지휘관 판필로 나르바에스와 1,000여 명의 정규군을 태운 18척의 배를 아즈텍으로 급파했고, 이들이 베라크루스 해안에 당도한 것을 간파한 코르테스는 정규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부관 페드로 알바라도(그는 후에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정복 원정에 나선다)를 정복지에 남겨두고 100명의 병력과 함께 베라크루즈로 떠났다. 코르테스 군은 이미 현지에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소규모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많은 정규군이라 해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처럼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한 코르테스는 항복한 병력을 황금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군대로 흡수하였다. 그 수만도 기존 병력의 3배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즈음에 테노치티틀란에서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코스테르가 원정 중이었던 5월 5일부터 5월 22일 사이에, 마침 재규어를 상징하는 테스카틀리포카 신을 기리는 톡스카틀 축제가 테노치티틀란에서 열렸다. 총독이 부재중이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축제 같은 것은 열릴 수 없었지만, 제국의 사제와 귀족들의 간청으로 알바라도는 대신 무기 소지 금지를 조건으로 허락을 한 것이었다. 축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귀족과 사제를 포함한 600여 명이 사원에 운집한 가운데 음악이 연주되고 춤도 추면서 축제는 무르익어갔다. 그들의 몸에는 진주와 금과 은으로 만든 호사로운 장신구들이 둘러져 있었다. 알바라도와 그의 병사들도 곳곳에 경계를 하면서 축제를 관람하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금은보화가 정복자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 모두들 엘도라도를 꿈꾸며 지옥 같은 사선을 넘어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아직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없는 것을 깨닫고 이에 아즈텍인들의 몸에 감긴 보물을 보자 물욕이 솟구친 것이다. 황금에 미친 정복자들은 맹수로 돌변하여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즈텍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보물을 약탈하였다. 당시 상황을 아즈텍인들의 시선으로 적어보면, 그들은 예측도 없이 칼로 북 치는 사람들의 팔과 목을 잘랐고, 이를 신호로 잔인하게 신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했다. 내장이 바닥에 널렸고 피가 흘러 웅덩이를 만들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은 반란을 시도한 아즈텍인을 사전에 발각하고 응징한 것이라고 이유를 밝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직도 대사원의 학살 또는 알바라도의 학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반란 시도와 보석 약탈이란 두 원인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크고 작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은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한 사건은 거의 없고 그래서 진실은 해석의 영역에서 부유하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모르고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한 코르테스는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살의 잔재가 가시지 않은 도시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분노한 아즈텍인들이 금방이라도 들고일어날 분위기였다. 수적으로 월등이 많은 아즈텍인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하면 당할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 코르테스는 목테수마에게 자신들이 안전하게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명령할 것을 강권했는데, 이미 시민들은 무능한 제왕을 포기하고 다른 귀족을 왕으로 옹립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목테수마의 권위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한번 끓어오른 기세는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궁전으로 쳐들어와 인질로 잡혀있던 목테수마를 살해하였고 이에 코르테스 군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성난 군중 앞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약탈한 금은보화도 다시 빼앗겼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의 스페인 병사와 원주민 동맹군이 살해되었고, 말과 화포 대부분도 잃었으며, 코르테스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을 ‘슬픈 밤’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디아스 카스티요에 의하면 테노치티틀란에서만 스페인군 450명과 원주민 동맹군 1,000명가량이 죽었다고 전한다.
놀라운 것인 이런 학살에 까까운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만 부지하고 베라크루즈로 돌아온 코르테스는 전열을 정비한 후 지략가답게 무엇보다 아즈텍에 저항하는 부족들을 규합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중심에는 틀락스칼라 동맹군이 있었다. 코르테스는 신도 부러워할 뛰어난 협상력으로 1차 원정보다 훨씬 규모가 큰 연합군(20만 명이라는 설이 있다)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동맹군이 생각만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면 코르테스 군쯤이야 한 줌에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코르테스는 담대하게 질식할 것 같은 위험을 극복하였다. 그런 전과는 탁월한 개인의 능력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천우신조라고 보아야 옳다. 거의 모든 환경이 코르테스 편이었다. 아무튼 그 놀라운 능력으로 1521년 8월, 드디어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7개월간의 치열한 공성전 끝에 함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트리플 얼라이언스의 나머지 도시인 텍스코코와 틀라코코판도 무차별하게 공격하여 도시 전체를 난도질하였다. 그런데 이미 1차 정복 시 천연두 바이러스가 원주민에게 전염되어 인구의 1/3이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런 전염병은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어 면역력이 전무했던 아메리카인을 유럽의 페스트처럼 무참하게 살육한다. 당시 천연두는 스페인 기병보다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무기였다. 그렇게 아즈텍 제국은 총체적인 난국을 겪은 끝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정복자 코스테르는 이 도시를 멕시코로 명명하였고 지금껏 그 이름이 전해진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틀락스칼라 동맹군이 아니었다면 아즈텍을 멸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멕시코의 아델란타도(Adelantados)들은 원주민을 히스파니올라의 경우처럼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그것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통역사였던 말린체(매리나)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그 자식을 법에 따라 스페인 시민으로 등재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청원하여 적자로 인정받았고 법적인 상속자로 만들었다. 바로 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의 첫 번째 케이스이며, 최초의 메스티조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이다. 유럽의 왕조들이 서로 혼인을 하면서 권력을 유지하였듯이 뉴스페인에서도 정책적으로 혼혈을 장려하여 아메리카의 유럽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불굴의 정복자 코르테스는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5. 정복자 피사로
아메리카 콩키스타도르 1세대 그룹 중에서 가장 탐욕적이면서 드라마틱한 정복자는 단연코 프란시스코 피사로이다. 그는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코르테스와 6촌 관계였고, 군인 출신의 사생아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야망이 컸던 그는 1509년 늦은 나이인 31살 때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알폰소 오헤다의 원정대를 따라 신대륙으로 갔다. 그는 최초의 신대륙 여행기를 쓴 페르난디드 엔시소와 나중에 니카라과를 건설한 프란시스코 코르도바를 상급자로 둔 하급 정복자로서 많은 정복 전쟁에 참여하였다. 엔시소는 발보아와 관련된 바로 그 인물이고, 코르도바는 마야인에게 죽임을 당한 코르도바와 성과 이름도 같은 동명이인이다. 피사로는 특히 1513년 발보아의 부하로서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한 유럽인 중인 한 명이었다. 그리고 1519년,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파나마의 총독인 페드로 아리아스 아빌라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상급자인 발보아를 체포하는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파나마의 행정관으로 임명되는 등 총독의 총애를 받아 페루 원정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당시 파나마에는 황금향 즉 엘도라도에 대한 전설이 회자되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면 황금이 너무 많아서 금으로 만든 가마가 있을 정도라는 등의 소문이 정복자들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문을 퍼트린 인물 중에 한 명이 파스쿠알 안다고야였다. 그는 1522년 처음으로 페루 원정에 나섰다가 쓴맛을 보고 돌아왔는데, 그곳 원주민들로부터 더 남쪽으로 가면 잉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으며 그곳엔 금과 은이 넘쳐난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말로만 듣던 엘도라도가 그곳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멀리 있는 신비의 땅이었다. 황금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하지만 피사로는 달랐다. 그는 에르난도 루카 수사와 디에고 알마그로와 도원결의를 하여 원정대를 만들었다. 원정대에는 정복지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필히 성직자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루카 수사를 명단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디에고 알마그로와는 수입을 동등하게 반반씩 나누어 가진다고 계약을 했다. 즉 동업이었다. 그리고 피사로는 전방 원정대를 지휘하고, 알마그로는 후방 지원조를 맡고, 루카 수사는 재정과 식량 지원을 맡았다. 이 결의는 구두 계약이었지만 페루 정복 때까지 엄격하게 지켜졌고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는 막장 드라마를 쓰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렇게 원정대를 꾸민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의 허가를 받고 1524년 드디어 장도에 올랐다. 원정은 총 3차에 거쳐 시행되었는데 여기서 그 모든 것을 얘기할 수는 없고 우선 1, 2차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3차로 넘어가겠다. 파나마에서 육지를 통해 남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콜롬비아 지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 경계선에는 죽음의 숲이라 불리는 열대우림 지대 다리엔 갭이 막고 있었다. 숲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고 설령 숲을 헤치고 전진한다고 하더라도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게 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원주민들도 그 숲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사로는 1차 때 파나마의 산타도밍고 부근 태평양 연안에서 80명의 병사와 4마리의 말을 태운 범선 2척을 띠웠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옥이었다. 대륙의 여안을 따라 항해를 하던 피사로 원정대는 현재의 콜롬비아 서쪽 해안가인 푼다 케마다에 배를 정박했다. 그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알고 정박한 것이 아니라 대충 정박하기 좋은 곳을 골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가자 열대우림 특유의 밀림지역을 만났고 그 질식할 것 같은 정글과 지독한 더위와 그리고 굶주림 등으로 악전고투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로의 독기 어린 독려로 그 숲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는데, 다시 접한 것은 원주민과의 치열한 전투였다. 퀴니아족이라고 불리던 원주민과의 공방전은 피사로 원정대가 승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전투로 인해 우군의 피해도 너무나 컸으며 이에 피사로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나마로 회군하기로 결정했다. 이긴 게 정말 이긴 게 아니었다. 그 판단은 현명한 처사였다.
그리고 1526년, 1차 원정에서 돌아온 후 2년 만에 처음보다 2배 정도 증원된 원정대를 꾸리고 다시 원정에 나섰지만, 2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우여곡절을 겪은 후 가능성만 확인하고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파나마 총독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피사로는 페루 해안 어디선가 객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처음보다 남쪽으로 훨씬 더 많이 내려갔고 그 과정에서 엘도라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콜롬비아 해안과 에콰도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툼베스를 지나 트루히요에 거점을 확보하고 현재의 침보네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이곳은 경도상 적도 아래였다. 항해 중 해안가 중간 몇 곳에 정박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말로만 듣던 금과 은을 원주민에게 약탈해 가져올 수 있었으며, 소규모 전투에서 잡은 원주민 포로 몇 명과 라마 몇 마리도 파나마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엘도라도 본산인 잉카에 대해서도 사실 존재 유무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황금의 도시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부하 몇 명을 차출하여 툼베스에 남겨두어 잉카어를 배우게 했고, 통역사로 키우기 위해 어린 원주민 두 명을 데리고 오면서 다음을 기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3번째 원정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페루 원정을 하면서 인적 물적 손실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새로 부임한 페드로 리오스 총독은 피사로의 3차 원정 청구에 대해 승인하지 않았다. 피사로의 원정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피사로의 계속된 결재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승인을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피사로는 1528년 본국으로 가서 온갖 인맥을 동원한 끝에 국왕 카를5세를 알현하고 담판을 지었다. 2차 원정에서 획득한 아메리카 원주민과 라마 그리고 금과 은을 국왕 앞에 내놓고 잉카 원정의 합당함을 설파하였다. 국왕과 피사로, 라이벌 프랑스와 유럽의 패권을 놓고 대치하느라 항상 재정난을 겪고 있던 카를5세와 오직 황금만이 인생의 의미였던 피사로, 이렇게 두 사람은 결국 마음의 일치롤 확인하고 1529년 7월 드디어 톨레도 포괄 협정 문서에 서명을 한다. 일종의 정복개발 허가증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정복지에 대한 권한과 특권이 피사로에게 있다는 허가 문서였다. 이 문서는 나중에 동업자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의 단초가 된다.
그렇게 국왕과 담판을 짓고 당당하게 파나마로 돌아온 피사로는 총독 따윈 안중에도 없이 3차 원정 준비를 했다. 1,2차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원정대였다. 우선 본국에서 데려온 이복동생과 친동생 4명, 사촌 여러 명, 그리고 프란시스코 오렐라 같은 전문 탐험가와 과거 자신이 알던 지인들을 긁어보아 파나마로 데리고 와 원정대의 중요한 보직을 주었다. 그리고 코르도바의 부하로 니카라과 정복에서 참전했던 세바스티안 벨라카자르도 자신의 부하 30명을 데리고 원정대에 합류했고 역시 동업자 알마그로도 100명이 넘는 병사를 모집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범선 3척과 병사 180명과 그리고 말 27마리와 다수의 화승총(아르케브스)과 팔코넷 화포 등을 확보하였다. 또한 피사로가 2차 원정 때 함선 정박지로 확보해 놓았던 툼베스에 도착했을 때 뒤늦게 에르난도 소토가 자신의 휘하 부대원 100명을 데리고 합류하여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소토는 잉카 정복 전쟁에 참전한 후 또 다른 미지의 땅 북아메리카 미시시피강을 탐험하여 대정복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피사로는 알마그로를 후방 지원을 위해 파나마에 남겨두고 장도에 올랐다. 1530년 12월이었다. 이번 원정은 툼베스까지는 해상으로 이동한 후 그 후부터는 육로 루트를 이용해 이어갔다. 상대적으로 위험했지만 얻는 것 또한 많았다. 세 번째 원정이라 자신감에 차있었던 것이다. 피사로는 툼베스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해안에서 가까운 내륙 피우라에 거점을 만들고 잉카를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파나마를 떠난 지 1년 만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험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 드디어 잉카의 도시 중에 하나인 카하마르카를 점령하였다. 그 도시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코앞에 두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통역사로 동행한 원주민 펠리필로와 2차 원정에서 심어두었던 부하와 원주민들을 활용하여 잉카의 정치 상황을 조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피사로는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자신이 정복한 카하마르카로 유인하는 계책을 꾸몄다. 자신의 6촌 동생인 코르테스의 예처럼 왕을 인질로 잡기 위해서였다. 이 계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용맹하고 담대했던 소토가 직접 아타우알파를 알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나섰다. 당시 아타우알파는 선왕 와이나카팍이 병으로 사망하자 형인 아우스카와 살육이 오고 간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후 카하마르카 근처에 있는 시에라에서 휴양을 취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하고 소토가 왕을 만나러 간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잉카 왕을 접견하는 데 성공한 소토는 자신의 왕을 만나 화친을 맺을 것을 권하였고, 대충 스페인 원정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아타우알파는 잉카를 평정한 황제의 넓은 아량으로 우월적 입장에서 소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황제의 덕목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 세계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인간의 간교함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무튼 담대한 소토의 꼬임에 넘어간 아타우알파는 황금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6,000명의 호위 병력과 함께 적진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황제의 관대함은 결국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순진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마병과 화승총과 사냥개 등이었다. 아직 청동기로 만든 무기도 제한적이었던 잉카군은 수적으로 월등했을지 모르지만 강철로 만든 칼과 중무장한 기마와 벼락 치는 듯한 굉음을 토해내는 화승총과 그리고 강력한 석궁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특히 마야인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 보는 기마병은 신화 속에 나오는 거대한 괴물로 인식하여 사기가 완전히 꺾였고 도망가기에 경황이 없었다. 잉카황제도 가마꾼들이 황금 가마를 버리고 달아나자 속절없이 피사로 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대부분의 잉카군은 피사로 군의 칼 앞에 살육을 당했다. 말을 탄 그들은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키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악마의 군대였다. 아메리카인의 그런 인식은 나약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형태로 굳어져 이후 정복자의 힘을 덜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두고 카하마르카 전쟁 혹은 카하마르카 학살이라고 칭한다.
그렇게 피사로 원정대에 포로로 잡혀 구금된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자신이 기거하건 방을 가득 채울 정도의 황금을 주겠다고 협상을 제안했다. 이에 손해 볼 것이 없었던 피사로는 그 조건을 받아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황금으로 만든 온갖 장신구들이 도착했다. 어이없게도 자진해서 상납을 한 꼴이 된 것이다. 꿈에만 그리던 엘도라도가 바로 여기였다. 피사로는 그렇게 쉬게 확보한 황금 장신구들을 녹여 운반하기 좋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중, 하급 원정대 전원이 평생을 놀고먹을 만큼의 금액이었다. 일설에는 100년 치 연봉이라도 한다. 하지만 권모술수에 단련이 되어있던 유럽인에 비해 턱없이 순진했던 아타우알파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참수를 당했다. 인질이 된 후 1년 만이었다. 잉카 수도 쿠스코에 있던 왕의 신화들과 몰래 내통을 하면서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목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알마그로가 잉카 왕의 제거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피사로가 마지못해 승인을 했다고 역사가들이 설명한다. 하지만 피사로를 미화시키기 위해 주범에서 제외시켰다는 설도 많다. 그리고 이런 결정에 카하마르카 전쟁의 일등 공신인 소토는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이후 피사로를 떠났다고 한다. 사형 반대파 중에 한 명이었던 소토가 쿠스코 접견지역을 정찰하러 나간 사이에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에 회의를 느끼고 캠프를 떠난 것이다. 그는 생전 시 아타우알파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아무튼 3차 원정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533년 11월 피사로는 드디어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정복했다. 왕을 잃은 잉카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피사로는 쿠스코에 스페인 기를 꽂고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잉카군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쫓겨난 잉카군은 계속 저항하며 수도 탈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피사로는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리마에 도시를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잠시 쿠스코를 떠나 그곳에 거주할 때 저항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쿠스코로 가서 원정대를 지휘했다. 이에 1536년 자칭 잉카의 황제 만코 앙카가 이끄는 10만 대군에 맞서 싸워 승리한다. 물론 다른 원주민 부족과의 동맹과 잉카 내부의 반정부 세력과 결탁하여 그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잉카 반군은 메소아메리카의 마야인이나 아즈텍인과는 달리 마지막 일인이 남을 때까지 항전을 했다. 때로는 스페인 군에게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잉카인도 많았다. 저항은 1572년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생포되어 처형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신흥 정복자 잉카 제국은 유럽의 정복자에게 멸망하였다. 그동안 스페인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군비를 증강하였기 때문에 2세대 정복자의 전력을 잉카군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유럽인이 가져온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잉카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40년 동안의 저항은 수백만의 사망자를 낳게 했다. 이런 극열한 저항은 아메리카 정복사에서 유래가 없는 사건이었다. 사실 나머지 30여 년의 전쟁은 잉카 잔존 세력의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다.
그렇게 잉카의 항전이 지속될 때 파사로는 동업자인 알마그로와 빠져나올 수 없는 이권다툼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정복지 분할과 약탈 보물의 분배를 두고 서로의 욕망이 충돌한 것이다. 동업자였지만 전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피사로가 우선권을 주장했고 무엇보다도 스페인 국왕이 서명한 톨레도 협정 문서를 들이밀며 알마그로를 압박했다. 이에 타협은 요원해졌다. 황금의 맛에 취한 알마그로는 잉카의 남쪽 지역 즉 현재의 칠레 북부로 원정을 떠났다가 실패를 맛보고 페루로 돌아왔는데, 당시 각을 세우고 있던 피사로 군과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 일명 라스 살라나스 전쟁이라고 하는 이 대결은 일종의 이권과 권력을 다투는 내전이었다. 이 내전에 피사로는 직접 참전하지 않고 그의 이복동생 곤살로 피사로와 친동생 에르난도 피사로가 군대를 지휘했는데, 1538년 마침내 알마그로가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피사로 군이 승리로 끝났다. 이제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그리고 입에 가시와 같았던 알마그로가 제거된 것이다. 이후 피사로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리마에서 휴식을 취했다. 잉카 정복 전쟁 14년 동안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이도 60살이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이룰 것을 다 이루었으니 여생을 리마를 건설하면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1541년 6월 리마의 자신의 거처에서 알마그로의 아들이 보낸 20여 명의 암살자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6. 완전한 정복
그렇게 스페인 정복자들이 안데스 산맥 서쪽에서 잉카제국과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는 포르투갈 정복자들이 대서양과 접한 브라질 지역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정복자들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은 했지만 인도양 무역에서 재미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등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1500년 처음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우연한 에피소드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에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확보하는 것을 보고 1530년 경에 뒤늦게 본격적으로 미지의 땅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같은 강국들이 그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늦었지만 서둘러 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토르네시야스 조약으로 확보한 브라질 지역을 30여 년 동안 전혀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의 비어 있는 땅이었다. 지도에 그려진 것보다 실재 땅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포르투갈은 그 비어있는 땅을 가능하면 빨리 개발하고자 봉토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도를 놓고 해당된 땅을 15개로 분할하여 각 지역에 본토의 귀족들을 보내 책임지고 개발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봉건제와 비슷한 제도로서 국왕의 땅인 브라질을 15명의 귀족들에게 분할하여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는 20년도 안되어 다시 재편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계속 봉토제도를 유지한 결과 성공적인 브라질만의 독특한 식민지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브라질의 대농장 시스템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브라질은 말 그대로 비어 있는 땅이었다. 스페인이 정복했던 지역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원주민들이 내륙 지역에 소규모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 수준은 타 지역 보다도 낮았다. 베링해협을 건넜던 호모사피엔스도 아마존 너머로 가는 것을 기피했는지 모른다. 아마존을 살아서 넘은 자만이 겨우 생존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적 물적 인프라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도에서는 기존의 경제적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서 무역 거래만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브라질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멋모르고 왔던 봉토 영주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무튼 새로 모든 것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서 반데이란테스(bandeirante)라고 부르던 초기 정착민들이 대단한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활약은 또 다른 의미의 정복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브라질 1세대 정착민이었던 파울리스타(paulistas)의 혼혈 후예로서 상파울루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15세기 초에 조앙 라말류라는 포르투갈인이 첫 번째로 브라질 베라크루즈에 정착하여 우호적인 원주민 티비리사족과 섞여 살면서 많은 혼혈을 양산하였고, 그 후예들이 바로 반데이란테스였다고 한다. 현재의 상파울루인 상비센테 봉토와 상파울루 봉토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그들은 내륙으로 들어가 울창한 숲을 벌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그곳에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였고 그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 노예를 사냥하기도 했다. 그들은 전문적인 노예 사냥꾼이었다. 그 과장에서 수많은 원주민들이 학살되었다. 포르투갈의 노예무역은 당시 카브리해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질에 유입되는 아프리카 노예 수는 아직까지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들 포르투갈 메스티조들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토르네시야스 조약을 어기고 아마존 강 상류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메리카 발견 초기, 이베리아인의 집요하고 야만적인 정복 전쟁에 의해 아메리카는 16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대부분 주인이 바뀌었다. 이후에도 칠레 같은 경우는 잉카의 정복 전쟁이 맞서 싸워 이겼던 마푸첸족이 스페인의 정복 전쟁에도 극렬하게 저항하여 식민지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뀐 주인은 변함이 없었다. 14,000년 전 베링기어를 넘어와 대대손손 큰 야망 없이 소규모로 모여 살던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유럽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몰락하였다. 그들은 유럽인의 현란한 술수와 강력한 무기 앞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진 것이다. 돌이켜보면, 두 대륙에서 14,000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큰 문화적 격차가 난 것일까. 유럽인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좁은 땅에서 서로 수없이 싸워왔기 때문에 그들의 살상 능력은 스스로 내재화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고해졌고, 그 정도는 대부분 서로 간섭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던 아메리카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해졌다. 문명은 인간의 탐욕과 전쟁으로 인해 발전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임을 두 대륙 간의 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인의 문명이 당시 석기시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욕망 없이 너무 평화롭게 살았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로서 시작은 같았으나 끝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 언급했듯이 1,2세대 이베리아 정복자들이 유독 잔혹한 학살을 많이 자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 그 역사적 사실 두고 ‘검은 전설’이라고 흑화화 하였다. 그들의 그런 비난은 시기심의 발로이며 사돈 남 말하는 격이지만 그럼에도 아메리카인을 가혹하게 다룬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본토 정부에서는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불쌍하고 나약한 원주민을 교화하고 개도하라고 하명을 내렸지만 현지에서는 이미 황금에 눈이 먼 정복자들이 그것을 따를 리 없었다. 8대 2의 수익금 배분은 엔코멘데로들의 욕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사실 본국에서도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묵인 방조하였고 미필적 고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땅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부작용이 많은 엔코미엔다와 콩키스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이베리아와 아메리카의 공동경제권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시 아메리카에서 본국으로 보낸 금과 은이 각각 200톤과 30,000톤이었다고 하는데 보내지 않은 양을 따져보면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부의 축적은 이베리아 왕국은 물론이고 유럽의 경제산업 발전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전염병이란 초유의 무기를 작동하여 대다수의 아메리카인들을 주검으로 내몰았다. 이런 인구 급감은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자원마저 잘라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렇게 아메리카를 정복한 그들은 원주민을 노아의 자식 중에 하나가 퍼트린 자손으로 신분을 개조시켰고 그럼으로써 스페인 식민 지배의 근본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졸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조의 신민이 된 아메리카인은 각자 고유한 부족의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적으로 자신의 부족 정체성을 해체당하였다. 그런 탈 부족화는 인종 관계를 무시하는 민족 말살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하나의 스페인 정복지의 원주민을, 하나의 인종으로 합친 ‘범 인디언화’를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추진한 것이다. 얼굴이 검으면 모두가 흑인이고, 얼굴이 동양적이면 모두가 인디언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집단 학살 제도’와 다름없었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야만적인 식민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18세기 있었던 소위 말하는 각 지역의 독립 국가 성립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독립국가의 주체는 아메리카인이 아니라 유럽 이민자의 후예들이었고 그것은 곧 또 다른 유럽 국가의 탄생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과정에서 아메리카인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