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1.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의 서막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너무 거대한 담론이어서 답을 찾아가는 길이 미로와 같을 수 있지만 그래도 종교는 애초부터 이데올로기를 배태하고 만들어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면서부터 종교의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불과 종교를 가진 자는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런 불가분의 관계는 인간의 속성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고대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인도에서 보듯이 신을 모시는 제사장은 사회정치적으로 최상위 고위층에 속했고 때로는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신성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엔 호모사피엔스의 정신적 도피처로서 필요불가결하게 종교를 만들었지만 공동체 규모가 커지면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변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가 절대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였고, 더 나아가 도덕적 기준과 집단의 정체성까지 아우를 정도로 발전시켰다. 때로는 형이상학 같은 철학적 방법론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의 예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는 정신의 도피처로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했지만 바오로를 비룻한 그의 후예들은 그것을 이데올로기화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종교는 권력과 타협을 하였고 그 자체가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변화 정착된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신성의 결탁은 이데올로기를 도그마화 하여 궁극에는 종교의 배타성을 극대화시켰다. 그러니까 종교의 이데올로기는 결국엔 믿음의 메커니즘을 넘어 종교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하였고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킬 스 있었다. 종교의 본질은 단지 홀로 십자가 앞에 앉아 기도하는 도구로서 만족해야만 하는 처지로 추락하였다. 500년 전 유럽은 그랬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16세기 서유럽은 새로운 정치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대항해의 시대를 이끌면서 유럽의 변방을 벗어나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와 남부 지역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149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1세가 스페인 카스티야 공주 후아나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황금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공동 국왕이었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이 각각 1501년, 1504년 사망하자 공주였던 후아나가 여왕으로 즉위하였고, 이후 우여곡절 끝에 1516년 그녀와 펠리페 1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합스부르크 본산인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제국의 황제이며, 그리고 네덜란드의 군주이자, 유럽보다 훨씬 큰 아메리카 대부분 땅을 소유한 황제이기도 한 카를 5세였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장 경력한 제국을 형성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전체를 확보하였고, 이에 황제는 홀로 그 거대한 제국들을 다스릴 수 없어 두 아들 펠리페와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스페인은 펠리페 2세가 통치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16세기 후반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제국을 형성하였다. 무엇보다도 신대륙의 식민지화는 거대 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 대립하면서 견제하는 관계를 유지하였고, 속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오렌지공이라고 불리던 빌헬름 공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신흥 왕국들 사이에서 유럽의 종주국인 프랑스는 영국과의 100년 전쟁이 끝난 후 피폐해진 왕국을 재건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프랑스 샤를 8세는 이탈리아로 시선을 돌려 1494년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시비를 걸면서 이탈리아 전쟁이라고 일컫는 전쟁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발하였고, 규모는 크지 않지만 톨리노와 밀라노와 베네치아 등 북 이탈리아로 확산되어 주변 강국들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대부분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이런 소규모 전쟁이 65년 동안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인문학과 예술 세계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패러다임이 유럽의 정신사를 변화시키고 있었지만 그런 르네상스의 등장도 아직까지는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의 견고한 틀을 깨뜨릴 수 없었다.
세속권력들이 이합집산 합종연횡하면서 욕망을 분출하고 있을 때 종교계서도 초유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인해 교황권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1307년에는 카타르교 탄압의 여파로 생긴 아비뇽 유수(로마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이전)가 프랑스 국왕의 강압으로 이루어지면서 교황권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70년 후 아비뇽 유수가 해제되었지만 그 사이에 로마와 아비뇽 간의 불화가 생겨 가톨릭 내부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처음엔 세속권력으로 인해 교황권이 약화되었지만 이제는 그들끼리 교황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져 급기야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청이 만들어지고 각자 교황을 선출하는 사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 각지의 교회에서는 두 명의 주교와 그 두 주교를 따르는 신도들로 나뉘었고, 거국적으로는 왕국까지도 분리되어 아비뇽 교황 측에는 프랑스와 아라곤과 이탈리아 남부의 공국들이 줄을 섰고, 로마 교황 측에는 신성로마제국과 영국과 북동유럽 왕국들이 줄을 서는 기형적인 가톨릭 세력 구도가 만들어졌다. 몇 대를 거친 이런 막장 권력 다툼을 보다 못한 파리대학 측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1394년 파리대학의 주도로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여 화해의 노력은 기울였으나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의 양보를 받아내지 못하고 도리어 한 명의 교황을 더 낳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세 명의 교황이 가톨릭 교회에 공존하게 되었다. 이런 3명의 교황이 현존하는 괴이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지그스문트 황제가 발 벗고 나서 반강제적으로 콘스탄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는 1414년에 개최하여 1418년까지 4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300명 이상의 주교와 100명 이상의 수도원장과 그리고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신학자, 교회 법학자, 세속 권력자들이 참석한 가톨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공의회였다. 종교와 관련된 대부분의 유력한 유럽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참석한 것이다. 이 대대적인 공의회는 결국 세 명의 교황에게서 사임서를 받아내게 했고, 1417년 11월 로마 출신 마르티노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겨우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켰다.
이렇게 분열된 가톨릭 교회를 유럽 전체가 들고일어나 겨우 봉합을 하여 안정을 되찾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교회 개혁 쟁점이 돌출되기 시작했다, 개혁은 곧 이단이었던 중세 시절, 13세기 초 카타르교와 발도교로 한바탕 몸살을 앓았던 유럽엔 이젠 너무 오래 고여 썩은 물이 된 가톨릭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창하는 사제와 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단으로 몰려 사후에 부관참시를 당한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의 신학자 얀 후스는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고 개혁을 설파했지만 그도 결국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였다. 그런 개혁에 대한 기류는 사라지지 않고 근저에서 명맥을 이어오다 드디어 1517년 루터가 비텐브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의 반박문 대자보를 게시하면서 종교 개혁에 포문을 열렸다. 당시에도 이단에 대한 살벌한 심문과 고문을 동반한 종교재판이 유럽 각지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화형식은 어느 곳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특히 스페인에서는 개종한 유대인에 대한 유사 이래 찾아볼 수 없었던 광기의 종교재판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엄중한 와중에 루터가 개혁의 깃발을 꽂은 것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격하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무리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가톨릭 내부에서의 이단 몰이와 괴물이 되어버린 교회의 급진 개혁 운동은 결국 영국의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의 교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신권까지 움켜쥔 성공회를 창립하는 등 서유럽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가톨릭은 전례가 없던 존폐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들 세력들은 모두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지만, 그 위력은 이제 예전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유럽의 중심이라고 불리던 프랑스도 100년 전쟁 후 영국과 화친을 맺고 합스부르크 군주국 등과 결혼 동맹을 맺으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왔고, 종교적으로도 가톨릭의 맹주로서 개혁파 세력을 척결하는 데도 앞장을 섰다. 하지만 16세기 프랑스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원인은 바로 종교 내전이었다. 물론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 양태가 분열과 이합집산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한편으론 종교 갈등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처럼 작동하여 파벌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보수파는 정통적인 가톡릭 세력이었고 개혁파는 신흥 개신교 세력이었다. 이런 갈등은 분쟁으로 이어져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확산되어 프랑스를 종교 사회적으로 황폐화시켰다. 종교와 권력이 결합된 정말 깨지지 않는 견고한 결정체들이 광속으로 충돌하여 인류가 일찍이 보지 못한 대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17세기 30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종교전쟁은 유럽의 대부분 왕국들이 종교 앞에 줄을 서서 합종연횡을 한 형태였지만, 프랑스의 종교전쟁은 자신의 땅에서 벌어진 남 탓할 수 없는 피바람이었던 것이다. 흔희 말하는 동족상잔이었다.
당시 프랑스 교회는 서방 가톨릭의 맹주였지만 스페인과 달리 교황권을 존엄하게 모시지는 않았다. 아비뇽 유수가 발발할 당시 아나니 사건이라고 불리는, 1303년 교황 보나파시오가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욕설을 얻어먹고 심지어 구타(구타까지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까지 당한 모욕적인 사건은 이미 프랑스 국왕과 로마 교황청의 관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아비뇽 유수 또한 로마 교황청의 권위가 바닥을 치는 초유의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황권 추락의 시발점이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는 교황권에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 계속 불편한 관계를 마다하지 않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왔다. 루터가 등장할 무렵 그런 기조는 갈리칸이즘이라는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국가의 신권은 가장 가까운 인민에게서 나와야 되고 그 권한은 각 구역의 주교에게 모아지고 그리고 그 신권은 마지막으로 군주에게 집중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것은 교황의 권위를 최소한으로 제안하는 일종의 그들만의 도그마로 굳어졌다. 이런 갈리칸이즘은 영국의 성공회 제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16세 초 프랑수아 1세는 교구의 주교를 로마에서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이미 신권이 약화된 로마 교황청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대다수의 민중들도 교황청의 부정부패와 타락상을 일상적으로 보아온 터라 프랑스 국왕의 이런 신권 행사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교황권은 로마와 이탈리아 몇몇 공국에서만 영향력을 미칠 뿐이었다.
이렇게 그들만의 독특한 종교 시스템이 시험되고 있는 가운데 루터의 종교개혁 바람이 프랑스로 불어와 프랑스 특유의 역동성과 결합하여 토네이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루터의 개혁 논리는 회심처럼 갑자기 어떤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고 이미 저명한 신학자였던 에라스무스와 자크 르페브르 같은 기독교 인본주의자들이 가톨릭 밖에서 꾸준히 개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발판 위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뉴튼의 표현에 의하면 거인의 어깨 위에서 루터의 개혁이 탄생한 것이다. 아무튼, 처음엔 찻잔 속의 태풍쯤으로 여기던 종교개혁 운동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루터의 운동은 브란덴부르크에서는 민중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하나의 종파로 종교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에서 태동한 츠빙글리 파는 급진 이단적 성격이 강해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으로부터 동시에 탄압을 받았고, 그런 현상은 오래가지 않아 츠빙글리가 알프스에서 직접 정부 토벌군과 무력으로 대항하다 순교하면서 급격하게 세가 약화되었다. 그 후 츠빙글리 파는 거의 소멸되었지만 역시 스위스에서 등장한 재세례파는 그보다 더 탈레반 성향이 강하여 이단 중에서도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오직 성경 안에서 만 산다는 극단적인 재세례파의 교리는 혼탁한 시기에 그래도 민중에게 강한 흡입력이 작동하여 네덜란드 같은 진보적인 성향의 왕국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런 프로테스탄 공동체들은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에게 화형을 동반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스페인 본토에서는 중세판 홀로코스트 같은 종교재판이 광풍을 불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라고 보고만 있을 리 만무였다. 그리고 루터의 영향을 받은 소소한 이단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져 종교재판에 불을 지폈다. 그중에 스페인 출신 의사이자 신학자인 미구엘 세르베투스는 대표적인 이단자였다, 1531년 그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을 스페인에서 출간했다가 이후 현상금이 걸린 도망자가 되어 가명으로 프랑스로 밀입국하였다. 그의 과격한 주장은 가톨릭과 개혁적인 신흥 종파들로부터도 이단이라고 몰매를 맞았다. 결국 그는 20년 후 프랑스 정부에 적발되어 화형을 당했는데, 이 사건은 당시 유럽에서 다양하고 파격적인 성경 해석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하나의 사례하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에몬테 북부 지역인 알프스 산맥 기슭에서 거의 은둔에 가까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던 발도교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신흥 개혁파들과 접하면서 연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리고 파리대학 교수인 르페브르는 1523년 신약성서를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간을 했고, 1530년에는 성경 전체를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은 루터가 열변을 토하면서 설파한 내용 중에 하나였다.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의 길이었다. 당시 그의 제자가 바로 장 칼뱅이었다. 그리고 1535년 칼뱅의 사촌형 피에르 올리베탕이 발도교의 금전적 지원을 받아 아예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초기 교회의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고 그 서문을 칼뱅이 써주었다. 칼뱅을 종교개혁 운동권에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올리베탕이었다. 초기교회 성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은 성경의 근본을 찾는 것으로 기존 가톨릭에서 볼 때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그런 올리베탕의 소개로 칼뱅은 그는 종교적 도반인 기욤 파렐과 신학적인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칼뱅은 불과 26살이던 1536년 기독교강요라는 발칙한 종교 해설서 초판을 출간한다. 보다 명료하고 핵심적인 기독교 교리를 자신만의 신앙 사상으로 정리한 일종의 개혁파의 교리 지침서였다. 그의 책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전파력을 가지고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종교계는 물론 정치사회적으로도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그 여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적으로 빠르게 퍼졌다. 주로 프랑스 남부와 서부지역에서 칼뱅주의자들이 자발적으로 성장하였는데 그 지역은 역사적으로 정통 프랑스 문화와 거리를 두고 있는 이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서부는 한때 영국 국왕의 봉토이기도 했고, 남부는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신의 이름으로 카다르교를 절멸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루어졌던 매우 불손한 지역이었다. 바로 그 지역을 중심으로 칼뱅주의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칼뱅이 제안한 절차에 따라 예배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칼뱅주의자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기존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시민들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제의 권력 남용은 시민이라면 대부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런 교회를 대신하는 교파가 바로 칼뱅파였던 것이다. 과격한 칼뱅주의자들은 수도원을 공격하고, 교회의 성상을 파괴하고, 심한 경우엔 성인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 화형을 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부르주, 몽토방, 오클레앙 등에서 가장 심했다. 성화 성상 파괴는 이미 네덜란드와 스위스 같은 유럽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유행하던 개신교파의 의례처럼 횡횡하였다. 루터는 성상에 대해 성스러운 예술 작품으로 해석했지만 칼뱅과 츠빙글리와 안드레아스 칼슈타인 등은 성상을 교회에 설치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해석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칼뱅주의 프로테스탄을 위그노라고 불렀다.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지만, 위그노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조롱하는 투가 담긴 것으로서 기존의 가톨릭인들이 불렀다고 하고, 당사자인 그들은 자신을 교화된 사람이라는 뜻의 개혁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역사를 쓴 주체가 프랑스 권력이기 때문에 그들을 지칭할 때 위그노라고 한 것이고, 처음 이 단어가 쓰인 것은 1558년 파리 종교회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칼뱅주의 개혁파를 위그노라고 부르겠다.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지금 위그노에 대해 조금만 더 설명하게 가겠다. 위그노 교세가 가장 크게 확장된 시기는 1560~1570년 사이로서 랑그독-루시용, 가스코뉴(기엔의 일부), 도피네, 라로셸, 노르망디와 푸아트 등에 전체 위그노인 인구의 80%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고로 신도수가 많았을 때는 200만 명이었고, 1685년 절대왕권을 꿈꾸던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이 발표한 후에는 1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야만적인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많았지만, 네덜란드와 영국과 스위스 같이 개신교가 정교로 확립된 국가로 이주하기도 하고, 아메리카 같은 유럽의 식민지로도 종교적 망명을 한 결과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지역이 바로 캐나다 퀘벡이었다. 아무튼 당시 위그노가 짧은 시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흥 부르주아와 많은 귀족들이 칼뱅주의를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발루아 왕조와의 권력 다툼에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석하는 역사가들도 있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콜리니 공작이나 콩데 공작처럼 위그노로 개종하는 귀족도 있었고, 나중에 앙리 4세로 즉위하는 당시의 나바르 왕국 앙리는 개종까지는 아니지만 정치적 신념처럼 내재화 된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서 나바르의 앙리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왕족의 방계이며 그것은 봉건제의 전형적인 정치 형태이기도 했다. 이런 정치 세력인 다수의 귀족과 결합하면서 칼뱅주의 개혁파는 다분히 정치화되었다. 당시에도 전 유럽에서 종교재판과 탄압이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 차원에서 그들은 귀족과 평신도 목회자나 설교자들을 중심으로 민병대를 조작하여 60개의 성을 보유할 수 있었고 그들이 직접 민병대를 지휘하였다. 이런 정치 세력화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정통적인 가톨릭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의 원인이 된다. 위그노는 개혁파이고 가톨릭은 보수파로 구분되는 양상이라고 보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개혁파는 공화파이고 보수파는 왕당파라고 구분되어도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근본정신은 위그노였다. 위그노에 진심인 시민들은 정치적인 성향보다 종교적인 신념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다. 그렇게 위그노가 무시 못할 정도로 세력화되었다고 하지만 파리와 리옹 같은 대도시는 여전히 가톨릭세가 강고했고 아직은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 정도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2. 종교내전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16세기 초반, 칼뱅이 종교개혁의 최전선에 뛰어들기 전에는 프랑스 종교계나 국왕은 그들에 대한 이단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루터가 설파한 내용도 보는 각도에 따라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고, 이미 부르주아 같은 자본가와 시민들도 대체적으로 호응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수아 1세도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던 종교적인 변화의 움직임 대해 이해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300여 년 전에 벌어졌던 알비파 십자군 전쟁 같은 흑역사를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르네상스 운동을 주도하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그의 제자 살라이에게서 고가로 구입을 하여 운동의 본보기가 되었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이나 논하는 태평천국을 원했지만 그것은 허황된 욕심이었다. 세상은 그가 원하는 데로 우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534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반가톨릭 문구가 인쇄된 찌라시가 블루아, 루앙, 투르, 오를레앙 등 4개 도시의 공공장소에 불법적으로 게시되었고, 그중에 하나는 바로 국왕의 침실 출입문에 떡 하니 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성찬례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미사 중에 시행되는 성찬례에 항시 현존한다는 영적 현상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적 내용이었다. 처음 성찬례를 부정한 사람은 십 년 전 스위스에서 순교한 츠빙글리였다. 그리고 이 글을 누가 작성했는지는 나중에 밝혀졌지만, 강성 반가톨릭주의자인 앙투안 드 마르쿠르일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피에르 올리베탕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성경을 출간한 출판인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사건은 궁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엇보다 국왕의 침실까지 누군가 침투한 것은 경호와 보안에 결정적인 문제를 노출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절대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격노한 국왕은 입장을 바꾸어 종교 개혁파들에게 강경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 후 우선 범인을 잡기 위해 현상금 100에쿠(은화의 단위)를 내걸고 현상수배를 하였고, 그 결과 한 달 후 범인을 체포하여 화형에 처하였는데 사실 이 범인은 바르텔레미 밀론이라고 불리는 문맹의 장애인이었다. 아마도 국왕의 격노에 무리한 수사를 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설령 정말로 밀론이 범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포스터를 붙이는 단순 조력자에 불과했고 내용을 작성한 실재 주범은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봉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해 1월 다시 찌라시가 파리 시내에 나돌았기 시작했다. 이후 2월에 사건 연루자로 판결한 몇 사람을 노트르담 광장에서 화형에 처하지만 아직까지 작성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앙투안 마르쿠르일이 범인이라는 것은 그가 쓴 글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와 그리고 나중에 그가 넌지시 자신이 범인임을 내비치는 글로 보아 후세 사람들이 추정하는 것일 뿐 당시에는 작성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더구나 이 사건과 더불어 칼뱅이 쓴 ‘기독교강요’가 출간되면서 파리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더욱 험악하게 변하였다. 이에 신변에 위험을 감지한 칼뱅은 파리를 떠나 제네바로 갔지만, 오히려 그가 쓴 적색 지침서로 인해 개혁파들은 그동안 구심점을 찾지 못했던 신앙적 교리가 보다 명확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무분별했던 여러 교파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결집현상도 일어났다. 그런 혼란이 가중되자 국왕은 1540년 아예 풍텐블로 칙령을 발동하여 이단에 대한 탄압에 포문을 열었다. 정통 가톨릭 이외의 모든 교파는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은 신과 인류에 반역하는 악과 같은 존재라고 규탄하였으며, 이단에 대해서는 고문과 공개적인 굴욕과 사형 등의 처벌을 행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의 재산도 몰수할 수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위그노에 대한 최초의 박해의 법령화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와 1세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당시 프랑스 정치계를 장악하고 있던 기즈 가문이나 몽모랑시 가문의 극열한 반대에 부딪쳤다. 아직까지는 절대군주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력한 봉건 제후들의 입김이 군주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강경 드라이브에 위그노들은 초기 로마의 기독교인들처럼 가정집에 모여 비밀 예배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하지만 프랑스 남부에 있던 위그노들에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이탈리아령인 피에몬데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발도파와 교류를 하면서 세력을 점차 확대하였다. 발도파는 일찍이 12세기에 발원한 교파로서 이단으로 몰려 몇 백 년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알프스 깊은 산속에 은둔하며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당시 혹독했던 종교재판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이렇게 발도파는 당시 처음 칼뱅주의자들과 교류한 결과 그 연합체는 오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탈리아 감리교와 통합한 형태의 하나의 개신교 교파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 북쪽에 있던 루터교가 비텐브르크를 정점으로 프로이센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으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그들이 프랑스로 잠입하여 위그노 발도파 연합과 물밑에서 접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프랑스 당국은 그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세 확장에 자신감을 얻은 발도파는 자제력을 잃고 과격해져 수도원을 공격하고 교회의 성상도 파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프랑스 당국은 메린돌 지역에 거주하던 발도파인들에게 체포령을 내렸지만 월래 도피생활에 익숙했던 그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게릴라 전술에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좌시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킬 태세였고 그러면서 발도파는 메린돌과 키브리에르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공격을 대비하였다. 그렇게 태풍 전야가 그 지역에 감돌았다. 이런 사실이 로마 교황청에 알려지자 교황은 프랑스 국왕에게 그들을 징벌할 것을 강력하게 압력을 넣었다. 이에 1545년 프랑스 국왕이 프로방스의 주지사 장 마이니에 도페드를 정벌대의 사령관으로 임명을 하여 본격적인 피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 중이던 반드 드 피에몽과 오스만에서 북프랑스로 이동 중이던 앙투안 데 자마르가 자신의 병력 수천 명을 이끌고 프로방스 멘린돌에 집결하였고, 교황 바오로 3세의 지시를 받은 이탈리아의 베네생 영주도 참전하였다. 상대적으로 발도파의 무장 병력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군사를 투입한 것은 그만큼 이단에 대한 척결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아무튼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은 민병대에 불과한 병력을 보유한 발도파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메린돌 성과 카프리에르 성을 점령한 정부군은 20여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수백 명의 발도파인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단들은 지중해에서 운항하던 갤리선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하며, 당시 처음으로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으로 총살형이 거행되었다고 전한다. 이 사건 후 교황 바오로 3세는 메린돌 전투의 승장인 장 마이니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메린돌 전쟁은 프랑스에서 종교 내전이 일어나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하지만 그렇게 이단의 씨를 말렸다고 생각했지만 종교의 능력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후 프랑수아 1세가 53세의 나이로 1547년 3월 프랑스 역사에 한 획을 긋고 붕어하자 그의 차남 앙리 2세가 국왕에 즉위하였다. 기사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앙리 2세는 국민 화합 차원에게 메린돌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교전 과정에서 발도파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상관없는 양민들도 상당수 학살되어 이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이에 전범에 대한 재조사가 착수되어 학살에 가담한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하였는데, 판사는 1명에게만 유죄를 판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하지만 당시 수면 아래에 있던 위그노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기세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은 큰 물결이었다. 앙리 2세는 부왕과는 달리 종교 개혁자에겐 상대적으로 적대적이었다. 당시 권력 주변에는 기즈 가문을 중심으로 강성 가톨릭파들이 견고하게 진을 치고 있었고 그런 탓인지 모르지만 앙리 2세도 그런 기류에 휩쓸려 있었다. 국왕은 개혁파를 노골적으로 이단이라고 불렀다. 이에 앙리 2세는 1551년 6월 샤토르리앙 칙령을 발동하여, 이단 서적 출간 및 배포를 금지하고, 이단자의 재산은 몰수하여 왕의 재산에 편입시키고, 그들의 예배도 당연히 차단하였다. 하지만 종교의 생명력은 결코 어떠한 탄압에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탄압에 의한 주검은 순교자로 취급되어 영적인 등급을 상승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위그노의 교세는 초기 기독교처럼 꺾일 줄 모르고 확장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유력한 귀족과 부르주아 층에서 속속 위그노로 개종하는 기적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칼뱅주의의 교리가 가톨릭 보다 자신들의 세속적 안위에 잘 맞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회적인 계급과 직업의 차별을 넘어 칼뱅의 교리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1562년에는 나바르 앙리의 모후 잔 달브레도 당시 위그노로 아예 개종을 하였고, 왕족에 버금가는 권력자인 콩데 공작과 콜리니 공작도 그즈음에 개종을 하는 등 과장된 통계인지 모르지만 귀족의 50% 가까이 위그노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신도 수도 200만으로 증가하였고 교회 공동체도 1,200개 이상으로 급속하게 늘어났다.
그나마 평화로웠던 프랑스 정국은 이제 새로운 변화의 물결과 직면하면서 혼돈으로 빠져들었고 어두운 그림자가 불루아 왕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1559년 6월이었다. 프랑스 왕족에겐 여러모로 축하해야 할 만한 경사가 겹치고 있었다. 60년 넘게 지루하게 이어져 오던 이탈리아 전쟁이 종식되고 카토-캉브레지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14살인 국왕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당시 최고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시집을 보내고, 또한 자신의 여동생 마리그리트가 이탈리아의 사보이 공작과 혼사가 결정되는 등 겹경사가 이어져 프랑스 왕가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에 국왕은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행사가 벌어진 보주 광장에서 앙리 2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근위대장 가브리엘 몽고베리와 마상 창시합을 하다가 서로 창이 부딪치면서 근위대장의 창 파편 조각이 앙리 2세의 투구 눈구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고가 일어났다. 시합 중에 일어날 불상사 중에서 가장 확률이 적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결국 이렇게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국왕은 십여 일 앓다가 사망하였다. 앙리 2세는 죽기 직전 의식이 가물거리는 가운데서도 몽고메리 백작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국왕의 어이없는 사망 이후 몽고메리 백작은 그럼에도 자신의 행위를 불명예로 여기고 자신의 영지인 노르망디에 가서 오랫동안 칩거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그는 영지에서 칼뱅이 증보판을 낸 기독교강요 같은 개신교의 서적을 읽고 회심하여 후에 위그노로 개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앙리 2세의 장자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였다, 당시 새로운 국왕의 나이가 15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섭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모후인 카트린느 메디치가 섭정을 하려고 했으나 프랑수아 2세의 아내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의 외삼촌 프랑스아 기즈 공작이 모후를 밀어내고 섭정자로 선정되었다. 기즈 공작의 여동생이 메리의 모후였다. 그만큼 기즈 가문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증거이다. 이로써 기즈 가문의 권력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가 강했던 카트린느는 한 발 물러서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과 쌍벽을 이루었던 메디치가는 당시 유럽의 수많은 열강들과 혼인으로 관계를 맺으며 피렌체 공화국을 이끌고 있었다. 카트린느에게는 5명의 자녀가 생존했는데, 첫아들이 프랑수아 2세이고, 나머지 두 아들도 미래의 국왕이 된다. 나중에 좀 더 얘기하겠지만, 일명 불행한 마고라고 불리는 막내딸 마르그리트는 나바르 앙리에게 시집을 가서 배신과 암투의 현장을 주도한 끝에 결국 이혼당한 후 앙리 4세의 폐비가 되고, 막내아들 프랑수아는 왕실과 불화를 겪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29살에 사망한다.
아무튼 새로운 왕의 섭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프랑스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왕의 처가에게 권력이 넘어가면서 왕권은 추락을 하였고, 이탈리아 전쟁의 종식으로 합스부르크가에게 지급해야 할 엄청난 배상금으로 인해 제정이 고갈되어 관리들의 급여도 몇 년 동안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거의 모라토리엄 수준이었다. 이에 거센 반발을 감수하며 정규군을 대규모로 감축하였고, 그 외에도 고강도 긴축 드라이브를 걸어 국민의 원성을 샀으며, 관직이나 그 주변에 있던 기존의 엘리트들도 수입이 대폭 줄어들자 다른 왕국으로 떠나는 현상도 벌어졌다. 또한 과다한 세금 징수가 뒤따르자 부르주아와 귀족들에게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최상위급 귀족들에겐 상대적으로 세금 징수를 적게 하여 다른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고, 부르주아를 상대로 매관매직을 하여 왕정의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이런 매관매직은 이후에도 암암리에 왕정의 자금줄이 되었으며, 루이 14세 때는 아예 대놓고 매관매직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즈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콩데 가문을 중심으로 한 야당 세력은 나바르 왕국의 제후인 앙투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앙투안은 프랑스 왕족 계승 혈통 중 현재 발루아가 다음 계승자로 분류되는 부르몽 방돔가의 적통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소심하고 정치적 술수에 밝지 못해서 전면에 나서는 것을 경계하였다고, 후일 프랑스 국왕의 편에서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에 야당은 불안한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국왕의 임시 자문기구 격인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으로 구성)를 소집할 것을 푸랑수아 2세에게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종교적으로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아 이단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국왕이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는 정교일치의 시대에 종교적인 분열과 탄압은 짧은 시간에 국가 전체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종교의 혼란은 곧 정치와 맞물려 사회적인 혼란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정치와 경제가 혼탁해지면서 그에 따라 위그노인의 종교 집회소를 철거하고, 이단이라고 의심되면 경찰은 아무 때나 가택에 침입하여 수색을 할 수 있었고, 이단자를 숨겨주는 자도 처벌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더욱 억압하였다. 그럼에도 파리에는 기즈 정권을 비난하는 찌라시가 나돌았고, 칼뱅주의자인 앤 뒤 부르그 판사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따른 보복성으로 파리의회 의장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고, 생메다르에서는 시민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기즈 정권은 시민들에게 무기를 숨기고 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긴 코트 착용을 금지하였고 마스크 같은 얼굴을 가리는 복장도 금지하였다. 기즈 가문은 제대로 된 정국을 운영해보지 못했던 터라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지 못하고 임시방편 조치만 남발하여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이런 미숙한 정국 운영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쿠데타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개혁파 세력은 부르봉가의 적자로서 섭정 자격이 있는 나바르의 앙투안을 자신들의 군주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이것이 무산되자 그의 동생인 콩데 공작을 중심으로 모종의 역모를 꽤 하기에 이르렀다. 콩데는 형과는 달리 권력욕이 많아 항상 프랑스 정치의 중심부에 지향점을 두고 있었으나 당시 기즈 가문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 있던 처지였다. 아무튼 역모의 행동대장은 르노디의 영주 장 뒤 바리였다. 설에 의하면 그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기즈 공작의 동생 로렌 추기경이 자신의 처남을 재판도 없이 마음대로 처형하여 그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반골기질이 강했던 장 뒤 바리는 은밀하게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민병대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지역의 소영주들이 동참을 하기도 하고, 앙투안 로수 상디 같은 신학자들이 측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프로방스에서는 위그노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였다. 이에 월급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병력을 모집한 결과 보병과 기병을 합쳐 2,000여 명의 민병대를 확보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민병대에는 특히 정부군에서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한 군인들이 많았다.
역모는 역모로서 끝나기 마련이다. 역모가 성공하면 더 이상 역모가 아니라 혁명이 되는 것이다. 1560년 겨울 어느 날, 파리에서 활동하던 변호사인 피에르 데 아브넬이 왕실의 요직에 있던 롱그빌 백작에게 역모에 대한 사실을 발설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기 시작했다. 아브넬이 얼마 전 파리에서 우연히 알고 지내던 장 바리를 만났는데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그의 방에서 은밀하게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으며, 그 대화의 파편들을 조합해 본 결과 분명히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롱그릴 백작에서 전했고 이에 백작은 그를 기즈 공작에게 인계하여 심도 있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자리에서 아브넬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소상하게 밝혔다. 국왕을 납치하고 기즈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역력했다. 그리고 1560년 2원 앙브아즈 성에서 쿠데타에 대한 모의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알아냈다. 당연히 장 바리의 이름도 나왔다.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판 아브넬은 큰돈을 받고 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기즈 공작은 취득한 정보에서 콩데라는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역모의 배후에는 분명 그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였다. 이에 콩데는 여느 때보다도 몸을 사리며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해 3월 프랑스 정부군은 비밀리에 투르에 집결한 후 앙브아즈 성을 기습 공격했다. 그곳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반란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졌다. 도망가다 잡힌 반란군 중에 단순 가담자나 무급 가담자는 풀어주었지만 주범들은 모조리 학살하였다. 그중에 실무 책임자였던 장 바리는 숲 속으로 탈출하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은 성문에 매달렸다. 그 옆에는 역모의 주모자라는 플랑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 중에는 콩테 공작과 카스텔로 남작이 있었는데, 콩테는 파리로 이송되었고 카스텔로눈 전향을 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그는 거부하고 처형을 달게 받았다. 성을 장악한 정부군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병력을 증강하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였다. 그리고 도망간 잔당들을 소멸하는데 집중하면서 주민들에게도 반란군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주요 가담자들은 온갖 고문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반란군의 사망자 수가 1,500명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체포되어 파리로 이송되어 온 콩테 공작은 심문 과정에서 역모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완강하게 발뺌을 했다. 자신은 단지 아무것도 모르고 앙브아즈에 방문한 것일 뿐이라면서 일체의 연루를 부정한 것이다. 체포된 다른 반란군을 고문하면서 심문했지만 끝내 콩데라는 이름을 얻는데 실패하였다. 그렇다고, 프랑스 왕권의 서열로 보면 몇 위 안에 들 정도로 권력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콩데 공작이었기 때문에 기즈 정부도 더 이상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그는 담당 심문관과 극열하게 맞서 대응한 결과 물증이 없는 관계로 일단 풀려날 수 있었다. 사건의 정황상 어떠한 형태든 연루가 되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확고하지만 증언과 물증을 확보할 수 없었다. 풀려난 그는 보수적인 귀족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무혐의를 강하게 주장하였고, 자신의 연루설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결 신청을 하면서까지 이 위험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발버둥 쳤다. 말 하나 까딱 잘못하면 당장 잡혀갈 숨 막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단 남프랑스에 있는 동생집으로 잠시 피신하였다.
이 역모 사건 후 프랑수아 2세의 이름으로 그해 4월과 5월에 앙브아즈 칙령과 그것을 보완한 로모랑탱 칙령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 쿠데타 음모 사건은 왕실에 큰 충격을 주어 정치적으로 발상이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권력에 반하는 세력이나 위그노 같은 이단적 교파에 대해 억압적으로 탄압을 하는 것은 결코 정국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또한 왕권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었다. 그래서 역모에 참여한 것에 대해 반성하거나 위그노에서 가톨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이유 불문하고 사면을 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이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형 언도에도 제동을 거는 조항도 실었다. 이런 화해와 관용적 태도로의 태세 전환은 한편으론 지지를 받았지만 기즈 가문을 중심으로 한 강경 보수파에 의해 얼마 가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국왕의 칙령이 제대로 운영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론 왕권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위그노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보수파에게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그노에 관용적은 칙령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 가톨릭과 위그노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다. 가톨릭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프랑스를 네덜란드처럼 바꾸려는 개신교 세력이 전국 곳곳에 충돌하였다. 도피네와 프로방스와 리옹 등에서 반군 게릴라 부대가 만들어지고 있었고, 몽토방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칼뱅주의자들에게 점령당하여 위그노 교회로 개조되는 등의 폭동 사건들이 곳곳에서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정부군의 진압과 탄압이 뒤따랐으며 이는 다시 저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리옹에서는 상황이 심각하여, 위그노인 집에서 여러 명의 반군이 모여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 지방 정부군이 들이닥치자 그들이 황급히 도피하였는데 그 집에서 많은 무기들과 모의 관련 서류들이 발견되었다. 추후 조사 결과 이 반군의 수장은 급진주의자인 피에르 메나르였고 그는 제네바에 있던 칼뱅파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확보한 문서에는 위그노의 저항을 격려하는 칼뱅의 친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기즈 공작은 앙브아즈 역모 사건과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콩데 공작의 연루가 분명하다고 확증하고 남프랑스에 은둔 중이던 그를 체포하여 파리로 이송하였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콩데 공작은 결국 1560년 10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발루아 왕조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가 재임기간을 2년도 채우지 못하고 1560년 12월 5일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위 서열 1위였던 전임 국왕의 동생 샤를 9세가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에 프랑수아 2세의 비였던 메리 스튜어트도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로 즉위한 국왕의 나이가 10살 밖에 되지 않아 또다시 섭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바로 그 권력 다툼에서 왕의 모후인 카트린느 메니치가 드디어 경쟁자를 물리치고 권력의 정점이 되었다. 전 국왕시절 기즈 가문의 섭정 시 총체적 난국을 경험했던 터라 기즈 가문은 더 이상 정면에 나설 면목이 없었다. 또한 월래 나바르의 앙투안에게도 섭정권이 있었지만, 위기 상황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카트린느는 자신이 전면이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앙투안과 협상을 하여 그에게 왕국의 군 총사령관직을 주고, 그의 동생 콩데의 석방과 기즈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조건으로 섭정권을 받아냈다. 피렌체 재벌가의 자녀인 그녀는 정치적 야심과 술수가 남달랐다. 월래 프랑수아 2세 즉위 때 자신이 섭정하려고 했으나 당시엔 기즈 가문의 권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정국의 안정을 위해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트린느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종교적인 안정이었다. 가톨릭과 위그노의 계속된 다툼을 해결하지 않으면 왕권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종교적인 평화가 우선 되어야 정치경제적인 문제들도 쉽게 풀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해결 방안은 양측이 수용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점이 많았다. 위그노에 대한 탄압은 축소하였지만 관용은 허용하지 않는 명확하지 않은 태도였다. 그런 노선은 기즈 정권의 노선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이에 왕모는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끝장 토론을 유도하였지만 끝없는 논쟁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에 카트린느는 왕권으로 종교적 분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이미 왕의 권위가 무너진 터라 양 측에서는 내로남불이었다. 기즈를 따르는 강성 보수파들이 개혁파 교회를 공격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에 개혁파들도 물러서지 않고 교회의 성상들을 파괴하는 등 또다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왕실을 당초 앙브아즈 칙령보다 발전된 위그노에 대한 관용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생제르맹 칙령을 1561년 9월 어렵게 국가 공의회(종교회의)에 제의를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기도 하고 그리고 내용에 대한 검토와 반대와 토론 등 6개월 이상 지루하게 진행된 끝에 처음 안이 약간 수정된 가운데 다음 해 1월에야 겨우 통과될 수 있었다. 왕국의 공작과 백작 같은 고위 귀족들이 한 장소에 집결한 국가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의 공의회와 같은 성격을 가진 임시 조직이었다. 왕권이 강할 때는 형식적이었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길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은 마지막으로 거쳐야 할 파리의회(Parlement of Paris)에서 상정을 보류하고 있었다. 파리의회는 사법부 성격의 왕국의 최고 의결 기구로서 모든 주요 현안은 이 의회를 통과해야만 법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조직은 당시의 권력 구조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바로 그 당시엔 기즈 가문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후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프랑스 정세는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내전 형태의 군사 행동이 뒤따랐다. 생제르맹 칙령이 수정을 거듭한 끝에 어렵게 공표된 후 2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 파리 인근 작은 도시인 바시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국왕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고 있던 기즈 공작은 당시 사면 받은 콩데 공작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공국들과 연합하려는 획책을 인지하고 그것을 저지하고자 뷔르템베르크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그곳 영주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는 사안에 대해 협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군사령관 앙투앙으로부터 생제르맹 칙령 안이 파리의회에 상정된다는 전갈을 받고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기즈는 뷔르템베르크를 떠나 파리로 가던 중, 자신의 영지인 바시를 지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말을 멈추어 섰다. 시간적으로 볼 때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는 아니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기즈 공작은 이 종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라고 지시를 하였고 그 결과 그 종소리의 주인은 위그노의 교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바심는 인구 3,000여 명의 작은 도시였지만 기즈 가문의 핵심적인 영지였다. 자신의 영지에서 위그노의 예배가 집행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기즈 공작은 즉시 위그노 교회의 해산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격노한 공작은 군대를 보내 강제 해산을 명령하였다. 교회에서는 500여 명의 많은 위그노인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치자 강력하게 저항을 하였고 상황은 급기야 무력 충돌 양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기즈 군이 증강하여 상황을 제압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하여 쌍방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도망가는 위그노조차 잡아 살해하는 등 잔혹한 학살로 확산되었다. 한 시간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지속된 결과 위그노인 5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대다수가 큰 부상을 당했다.
바시 사건은 프랑스 왕권의 치명적인 약화를 불러왔다. 프랑스 정국의 안정화를 도모하던 왕권의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은 카트린느가 기즈공작을 퐁텐블로 왕궁으로 출두할 것을 명령했지만 기즈는 이를 무시하고 파리로 향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미 바시 사건을 알고 있던 대다수의 파리 시민은 파리에 입성하는 기즈 공작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환영해 주었다. 이 사건을 묵과할 수 없었던 콩데 공작은 병력을 모아 반란군을 형성하여 내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기즈 공작과 콩데 공작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전쟁 참전 당시 위그노로 개종하였던 콩데 공작은 정적인 기즈 공작이 자행한 바시 사건을 학살이라고 비난하고, 사악한 기즈 정권으로부터 왕권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후 군사행동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1562년 4월 초, 오를레앙 점령을 시작으로 앙제와 블루아와 투르 등을 계속 접수하였고, 4월 말에는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옹에도 입성하였으며, 가톨릭 교회와 그와 관련된 기관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내전은 남프랑스까지 번져 나갔다. 툴루즈에서는 가톨릭 민병대에 밀린 위그노인 300여 명이 사망하였고, 투르와 센스에서도 가톨릭 민병대의 역습을 받아 많은 위그노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아직은 위그노 세력이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무장 병력 도움 없이는 가톨릭 세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력을 정비한 정부군은 본격적으로 반격이 시작하였다. 루앙, 드뢰, 오를레앙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는데, 특히 정부군이 반군이 점령했던 루앙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나바르의 왕이자 프랑스 군사령관인 앙투안이 전사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앙투안은 차후 프랑스 국왕이 되는 앙리 4세의 부왕이었다. 그리고 드뢰 전투에서는 콩데 공작이 정부군에 포로로 잡혔고, 한편에서는 정부군의 일원인 몽모랑시 공작도 반군에게 잡히는 혼전이 일어났다. 또한 프랑스의 실세 중에 실세인 프랑수아 기즈 공작은 오를레앙 전투 중 전장이 아닌 관사에서 적군인 장 드 폴트의 머스킷 총탄을 맞고 암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정부군과 위그노를 중심으로 한 반군은 이제 화해할 수 없는 깊은 불신의 수렁으로 매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국왕의 권위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국가의 구심점이 없는 가운데 벌어진 내전의 상처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받은 상처보다 훨씬 더 깊었다. 특히 종교적 갈등과 이데올로기의 적대적 대립으로 인한 내전은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 내상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된 내전은 30년 동안 피의 종교전쟁으로 이어져 프랑스 국토를 유린한다.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100여 년 후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꿈꾼 이유도 피를 부르는 이런 종교 분쟁과 봉건 영주의 권력 다툼을 종식시키지 않고서는 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승자와 패자가 불분명한 가운데 샤를 9세의 섭정자 카트린느는 적극적으로 휴전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보수파의 수장 프랑수아 기즈 공작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그녀의 중재가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기즈 공작의 암살이 역설적으로 평화 중재에 중요한 동기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음모론적으로 볼 때, 기즈 암살로 인해 누가 가장 많은 이득을 챙기는지를 보면 배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권모술수와 암투가 난무하는 프랑스 권력층에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고 인내력 또한 겸비한 카트린느의 노력으로 내전 시작 1년 후 앙부아즈 칙령이 파리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 칙령에는 사문화된 생제르맹 칙령 안보다 한층 발전된 위그노에 대한 관용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양측이 양보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제약이 있고 완전하지 않지만 위그노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고, 내전 중에 발생한 쌍방의 손실을 보존해 주고 약탈품을 반환해야 하며, 종교연합 및 무장 집회를 금지하고, 전쟁 포로와 체포된 정치범을 사면하고, 단 기즈 암살자 장 드 폴트를 사형하는데 합의하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만족하지 못했다. 이제 어떠한 미사여구를 앞세운다 하더라도 서로 믿지 않았고 언제 다시 군대를 일으킬지 서로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몇 년 동안 외면적으론 평화로운 세상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권력의 실세인 모후의 노력으로 정치적인 갈등은 그나마 수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기층에서는 서로의 감정이 금방 터질 것처럼 곪아가고 있었다. 위그노 입장에서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수많은 이웃이 박해를 받고 학살되었기 때문에 갈등의 골이 쉽게 완화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최소한 루터교처럼 자유롭게 종교 활동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프랑스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강성 위그노인들이 프로방스 지역의 니므에서 가톨릭인을 도발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해졌고 심지어 살해하는 사건들도 일어났다. 이에 가톨릭과 위그노가 서로 충동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 귀족들을 중심으로 국왕을 납치하여 왕조를 전복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또다시 전운을 고조시켰다. 이에 사태를 예의 주시해 오던 중앙정부는 1567년 11월 몽모랑시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진압군을 니므로 보냈다. 하지만 집압과 교전의 양상은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지도 않게 사령관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면서 그 충격으로 양측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왕실은 더 이상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위그노 세력을 섬멸할 수도 있었지만 카트린느는 미래를 위해 인내를 하였다. 종교개혁의 여파는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공국과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 주변에서 봇물처럼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힘으로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처럼 성설 종교재판소를 운영하면서 화형이 일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은 프랑스의 정치 메커니즘과 국민적 정서에 맞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섭정에서 풀려난 샤를 9세는 화해 차원에서 다시 한번 위그노에게 조금 더 많은 종교의 자유를 주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도는 오히려 양측의 불만만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강아지 간식처럼 찔끔찔끔 관용을 베푸는 칙령에 위그노인들도 만족할 수 없었고, 가톨릭인들도 계속해서 관용적 태도를 취하는 왕권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툴루즈에서는 흥분한 가톨릭 민병대가 강성 위그노 마을인 퓌로랑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태세로 대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곳에서 이런 험악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었다.
해를 넘기면서 가톨릭과 위그노의 갈등 상황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프랑스의 많은 영지에서 평신도 형제회들이 동맹을 결성하여 국왕에게 위그노 관용 정책을 철폐할 것을 강력하게 청원을 하였고, 그래도 국왕이 외면하자 지역에 살고 있던 위그노인들을 향해 폭력과 학살을 자행하며 압박했다. 결국 이에 불복한 샤를 9세는 위그노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는 생모르 칙령을 발령하였다. 이전의 평화적인 칙령은 모두 무료로 돌아간 것이다. 국왕의 이런 결정은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즈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모후의 평화 의지도 한계가 있었고 국왕의 심신도 연약하여 권위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강경 노선은 다시 위그노와 개혁파들의 반발을 사서 군사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또다시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반란군의 지휘자는 비시 사건 때처럼 콩데 공작이 맡았다. 배경이 화려했던 그는 주변 왕국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네덜란드의 오렌지 빌헬름 대공과 신성로마제국의 츠바이브뤼켄 공작 등이 자신의 사병을 직접 이끌고 참전을 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친 프랑스파인 프랜시스 윌싱엄의 간곡한 청원으로 측면에서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정부군에는 스페인과 로마 교황과 토스카나 공국이 용병을 보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지휘관은 당시 앙주 공국의 영주로 있던 샤를 9세의 동생 앙리 3세가 맡았다.
그렇게 해서 다음 해 1569년 3월, 드디어 콩데의 반군과 가스파르 드 솔스가 이끄는 정부군은 프랑스 중서부 자그낙에서 크게 충돌하였다. 자그낙은 위그노의 핵심 도시인 라로셸로 가는 길목에 있는 1차 저지선 성격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반군은 대패를 하고 항복하였고, 콩데 공작은 체포된 후 즉결 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는 앙브아즈 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연루되었던 원죄가 있어서 이번에는 왕당파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은 당나귀에 실려 자그낙 마을을 행진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로서 부르몽 왕가의 나바르 왕 앙투안과 기즈 가문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콩데 공작, 이 두 형제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사라졌다. 아무튼, 그의 사망으로 반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콜리니 장군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그는 사티용의 영주로서 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해군 제독 출신인데 뒤늦게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위그노로 개종을 한 후 반란군에 몸을 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리니 반군은 리로슈-라베이유 전투와 몽코투르 전투에서 패전의 쓴 맛을 보았다. 하지만 앙리 2세를 마상 창시합 사건으로 사망케 한 몽고메리 백작이 자신의 잘 훈련된 사병과 함께 반군에 합류하면서 반군의 전세가 회복되었다. 그렇게 해서 콜로니 반군은 과거 랑그독 지역인 툴루즈와 남부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처음으로 나바르의 잔 달브레가 프랑스 종교내전에 참전을 한다. 그녀는 나바르의 여왕으로서 부르봉 가문의 적장자인 앙투안과 결한 후 공동 왕으로 군림을 하였으나 칼뱅의 영향으로 1560년 위그노로 개종을 하였고, 2년 후 루앙 전투에서 부군이 사망하자 홀로 나바르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개종에 이어 아예 위그노를 나바르 왕국의 국교로 선언하여 스스로 서유럽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미래의 프랑스 국왕에 오르는 앙리 4세이며 당시엔 15살로서 아직 내전에는 참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앙투안은 프랑스 왕당파에 봉사하다가 전사했지만, 그 후 잔 달브레는 완전히 위그노 세력에 합류하여 개혁파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확전 된 종교전쟁은 프랑스 왕국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이탈리아 전쟁 때부터 100년 가까이 프랑스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환란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왕권은 보수파와 개혁파의 권력 투쟁과 종교 전쟁으로 인해 이미 실추된 지 오래였고, 힘없는 민초들만 피폐해진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에 잔 달브레가 프랑스 정국 앞에 나서서 종전과 평화와 그리고 사회 통합을 위해 협상을 주도하였다. 양측이 불만이 많았지만 일단은 그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두 세력은 한발 뒤로 물러섰고 그렇게 해서 생제르맹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영지 당 2개 도시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2년 동안 한시적으로 라로셸, 코냑, 몽토방, 라 샤리테로 등 4개 도시에는 무장 수비대를 유지할 수 있고, 조약 이전에 위그노가 점거한 마을에서는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조약에는 통합과 화해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완전하지 않지만 전보다 진일보한 항목이었다. 위그노인들은 네덜란드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제한된 종교의 자유를 찾은 것이다. 이 조약에는 샤를 9세와 콜리니 장군 그리고 잔 달브레가 서명을 했다.
3. 파리 대학살
이런 화해무드를 타고 다시는 내전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혼인 정치가 등장하였다. 분열된 정치를 통합하고 종교적 평화를 영구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 모후 카트린느가 앞장을 서서 잔 달브레와 긴밀하게 협상을 한 끝에 사돈을 맺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이런 혼인 정치는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합스부르크가에서 처음 시행하여 대 제국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당시에도 국내외 정치의 중요한 방법론의 일환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타의 많은 왕국에서도 혼인정치는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노골적인 정략결혼은 왕국 간의 관계에서도 성행했지만, 국내의 유력한 왕족이나 영주들 사이에서도 대유행이었다. 카트린느와 잔 달브레도 그런 정략결혼의 당사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은 1572년 4월 파리에서 만나 결혼 합의서에 서명을 하였다. 결혼식은 성 바르톨로메오 성인 축일 며칠 전인 8월 18일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결혼의 당사자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잔 달브레의 아들 앙리는 카트린느의 막내딸 마르그리트와 동갑내기로서 어릴 때 6년 동안 프랑스 궁정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앙리는 이 결혼을 신통치 않게 여겼지만 당시 왕족의 법도에 따라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도 바람둥이였지만 마르그리트의 욕망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결혼 전 기즈 가문의 앙리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밀애를 즐겼고, 그 외에도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소문은 귀족 사회에서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어서 앙리 4세도 그런 소문을 모를 리 없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마고라고 불리던 마르그리트는 유럽의 역사에서 아마도 스캔들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수많은 염문을 뿌렸는데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자신의 두 오빠와 근친상간을 한 사실을 고백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난잡한 남성편력은 끝도 없이 많지만 여기선 그런 얘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그만하기로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 4세와의 아주 오랜 별거와 치열한 장미의 전쟁 끝에 결국 합의 이혼한 후에도 수많은 삶의 곡절을 겪었고, 이후 말년에는 세속의 욕망을 벗어내고 프랑스 왕실과 친근하게 교류를 하며 전 남편 앙리 4세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로 볼 때도 대모적인 풍모를 유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그렇다고 앙리 4세도 도덕군자는 아니었다. 그 또한 왕비에 버금가는 스캔들을 일삼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잠자리는 두 사람만 아는 사실이지만, 오죽했으면 그들 사이에 자식을 생산할 수 없었던 반면에 앙리 4세는 정부와 두 번째 왕비 사이에서는 많은 자식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부조리극 같은 결혼 생활은 지금도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 내밀한 관계와는 상관없이 이런 데탕트 기류는 표면상으론 프랑스 정국을 평화의 시대로 이끌었다. 반군의 지도자 콜리니 장군이 왕실 정책에 깊이 관여할 정도로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국왕의 자문위원 자리에 있던 콜리니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를 독립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는데, 프랑스 군대가 플랑드르에 거점을 두고 있던 스페인 총독부를 점령해야 한다고 왕실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다녔다. 당시 가장 강력했던 스페인과 척을 지는 이런 행위는 자살골을 넣은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는 칼뱅주의 국가인 네덜란드의 독립이 우선이었다. 이런 그의 무책임하고 위험천만한 주장에 대해 당연히 기득권 보수 세력은 귀담아듣지 않고 무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기즈 가문을 포함한 보수 왕당파는 이 결혼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 13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또한 이 결혼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을 하였고, 파리의회 또한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바르의 앙리는 모후처럼 위그노로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위그노의 적극적인 지도자임을 선포한 마당에 프랑스 왕실이 어떻게 그를 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프랑스 정국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위그노인 외에 대다수가 반대하는 이 결혼은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혼인이 아닐 수 없었다. 축복은커녕 저주의 목소리가 프랑스 정국을 흔들고 있었다.
파리는 반위그노 정서가 팽배한 대표적인 도시이면서, 보수파의 수장 기즈 가문이 대대로 지지를 받고 있는 가톨릭과 왕당파의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 위그노의 지도자급 귀족들이 대거 입성한 가운데 그들의 수장을 부마로 받아주는 축제가 열리는 것을 파리 시민이 용납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결혼 발표 전 평화무드가 조성될 때, 파리 시민군이 위그노로 개종한 반역자 필리프 드 가스틴의 집을 파괴하고 그곳에 십자가상을 세워 놓았었는데 당시 왕실의 지시로 십자가를 철거하고 그곳에 가스틴의 무덤을 조성하였고, 이로 인해 시민 폭동이 일어나 50명이 사망하고 가스틴의 가족들도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들끓는 민심을 외면된 채 결혼식 시간은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치 않은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에서 결혼에 대한 입장을 유보하자 카트린느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설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과 함께 기즈 가문과 몽모랑시 가문 간의 권력 다툼도 치열하여 왕당파 내에서도 화합이 되지 않고 있었다. 권력층의 암투와 폭력적인 시민과 종교 갈등이 뒤엉킨 파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평신도가 중심이 된 위그노 공동체는 귀족과 부르주아 세력이 유입되면서 칼뱅의 영향에 따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경향을 보였고 그것은 곧 하나의 정치세력화의 기틀이 되었다. 종교적인 순수함은 퇴색되고 이슬람처럼 이제 정치 집단화가 되어 권력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는 파격적인 반군주제주의자였던 그들은 인민 주권 개념을 전개하며 권력은 인민에게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래서 내전은 왕의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확대 재생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이라는 개념과 국민 주권이라는 사회과학적인 이론이 처음 등장하였고 그것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같은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위험한 정치사상은 네덜란드의 공화제 정치실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모나르코마크 정치 이론을 공론화하기도 했다. 그 이론은 폭정을 하는 군주에 대해서는 암살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극단적 변증법적 논리였다. 따라서 군주가 참 종교를 박해한다면 그것은 신과 국민 사이에 맺은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며, 이는 반란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동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리는 특히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었는데, 당사자인 칼뱅은 그럼에도 폭정은 하느님이 심판할 것이기 때문에 비폭력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만면 그의 수제자인 부리고뉴 출신 테오도르 베자는 필요시 폭력적인 저항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런 베자의 논리는 1554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이단에 관하여’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서 당시 그것은 위그노의 주된 정치노선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훗날 앙리 3세와 앙리 4세의 암살에 빌미를 제공하였고 1798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당성의 이론적 근거 중에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이 파리 거리를 휘감고 있는 가운데, 이 혼사의 주체인 잔 달브레 나바르 여왕이 혼인 두 달 전 파리에서 직접 혼수 장만을 하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좋지 않은 악재가 닥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날짜에 결혼식은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파리 시민의 험악한 불만 표출과 혼인 미사 집전을 거부한 교황 대신 파리 추기경이 대리 집전하는 가운데 결혼식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반쪽짜리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왕족과 귀족과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사제들이 참석하였다. 그중에는 기즈 공작도 있었는데 그가 파리시내에 모습을 나타나자 시민들은 그에게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일종의 결혼 반대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렇게 두 세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 혼인 미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문제 많은 결혼식이 끝나고 관례에 따라 3일 동안 파리에서 축제가 이어졌다. 그리고 축제가 끝난 다음날 8월 22일 아침, 콜리니 공작은 12명의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테니스 경기를 관람한 후 파리 시내 폴리에 거리에서 한가하게 가판 신문을 읽다가 순간 피격을 받았다. 길 건너편 2층에서 날아온 머스킷 탄알은 다행히 그의 왼쪽 팔을 관통했다. 이에 경호원들이 황급히 저격 장소로 뛰어 올라갔지만 범인은 소총을 버리고 준비한 말을 타고 달아난 후였다. 이 암살 시도 사건은 파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심약한 샤를 9세는 멘붕에 빠졌고 모후 또한 이 돌발적인 사건에 황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왕당파와 개혁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의 여파가 어떻게 이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사건 즉시 조사가 착수되었고, 파리 시내의 상인들은 대부분 상점문을 닫았으며, 파리시 당국은 시내 곳곳에 경찰을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파리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 직후 콜리니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개혁파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속속 찾아왔다. 결혼 당사자인 나바르의 앙리와 콩데 2세 공작과 텔레니 공작 등이 병문안을 와서 이참에 기즈 공작을 제거하자며 경앙된 감정을 표하였고, 파리 도심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하고 국왕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자는 등의 대책들을 격하게 쏟아냈다. 그리고 샤를 9세와 모후가 직접 병문안을 와서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하였고, 귀족과 고위 공직자들도 다녀갔다. 경사스러운 날에 이럴 수가 있냐면서 콜로니가 불만을 토로하자 국왕은 정의실현을 약속하였다.
당시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배후가 누구인지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추리와 추정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먼저 기즈 가문 연루설이다. 10년 전 오를레앙 전투에서 프랑수아 기즈가 전쟁터가 아닌 안전가옥에서 사망한 것은 콜리니의 사주에 의한 암살이라고 후손들이 확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복수라는 개연성은 충분했고, 더구나 범인이 버리고 간 머스킷 소총의 실재 주인이 기즈 공작이라고 판명이 났던 것이다. 또한 그들 두 가문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두 번째는 알바 공작 설이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 총독이 알바 공작이었는데 콜리니가 근자에 와서 네덜란드 독립을 위해 강경한 입장을 피력하고 다니자 이에 위협을 받고 알바 공작이 그를 제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알바 공작은 악명 높은 총독으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에 빨대를 꽂고 스페인 재정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카트린느 메디치 설이다. 콜리니가 샤를 9세와 가까워지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자 자신의 위치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낀 나머지 그 위기감으로 인해 그에 대한 불신감이 고조되었으며 또한 당대 최고의 강국이었던 스페인을 자극하는 콜리니의 행태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 등이 합쳐져 제거하려 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사실 끼워 맞추기식 억지 논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샤를 모레베르 설이다. 그는 하층 귀족 출신이면서 기즈 가문의 시동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그 가문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바로 그에게 사주를 받고 암살을 시도했다는 설이다. 모레베르의 단독 범행 설도 있지만 기즈 가문 사주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암살 시도 후 도피했다가 혼란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기즈가문과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좋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아 역사가들은 이 설에 거의 동의를 한다. 더구나 머스킷 소총의 주인이 가즈 가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물증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콜로니 암살 미수 사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전운이 파리에 감돌고 있었다. 그의 휘하 병력 4000명이 파리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다음날 궁정에서는 모종의 회의가 긴박하게 열리고 있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카트린느가 자신의 정치 고문으로 데리고 있던 피렌체의 곤디 가문 출신인 알베르트 곤디와 역시 밀라노 출신 르네 비라고 총리 등 이탈리아에서 온 유력 참모들이 튀일리 궁전으로 긴급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충격적인 대책이 세워졌다고 한다. 물론 콜로니 암살 사건에 대한 해결 방안이 다른 권력 상층부에서도 활발하게 논의가 되었을 테지만 카트린느 개입설이 현재까지는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책 내용은 놀랍게도 위그노 세력의 말살이었다. 공식적인 명분은 이렇다. 자신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콜로니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위그노파에서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역공이었다는 정당방위 논리이다. 카트린느는 회의에서 모은 이 기안을 가지고 국왕에게 가서 결재를 받았다. 국왕은 거부했지만 모후의 강력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명을 했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사건이 종결된 후 자신의 이 승인에 대해 죄책감으로 몹시 괴로워하여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이런 설이 어떻게 짜였는지 모르지만, 사실 진실은 알 수 없다. 역사적 사건에서 진실이 올바로 밝혀진 사건은 거의 없을 것이고 그래서 사건의 서사 구조와 맥락은 항상 엉성하기 마련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결정된 최종 해결은 다음날 거사되었다.
왕실로부터 명령을 받은 임시 파리시장(당초 파리시장은 몽모랑시 공작이었는데 폭동을 미리 눈치채고 이틀 전에 사임)은 새벽녘에 파리 외곽에 주둔하던 위그노 군대를 막기 위해 파리시로 진입하는 통로를 모두 차단하였고, 강성 시민군에게 만약을 대비해 무장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스위스 용병과 기즈의 사병들도 대기시켰다. 그리고 생제르맹 룩세루아 교회에서 아침 예배 종소리가 울리자 그들은 일제히 위그노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용병은 우선 루브르궁에 쳐들어가 그곳에 묵고 있던 위그노 귀족들을 궁 밖으로 몰아낸 후 무참하게 칼을 휘둘렀고, 기즈 병사들은 콜로니가 묵고 있는 호텔을 점령한 후 그를 찾아내 즉시 살해하고 그 시신을 2층 창밖으로 던졌다. 그것은 반군의 수장을 우선 처단하는 일종의 선동적 의식이었다. 누군가 땅에 떨어진 참수한 콜로니의 머리를 들고 시민을 선동하였고, 이에 국왕의 이름으로 학살 승인을 받은 것처럼 흥분한 시민군은 광란의 살육을 하기 시작했다. 위그노인 사냥이었다.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도망가는 위그노인을 잡아 도륙을 한 것이다. 그렇게 피를 맛본 시민군은 더욱 광기에 빠져 3일 동안 위그노인을 잡아 모조리 죽였다. 그 시신이 세느강변 여러 곳에 쌓이자 달리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한 그들은 결국 시신을 세느강에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버려진 주검이 2,000구가 넘었다고 한다. 세느강은 피로 물들었다. 이런 학살을 국왕이 저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광기에 빠진 파리를 제어하기엔 너무나 무기력했다. 그리고 국왕의 부마가 된 나바르의 앙리는 마르그리트 공주의 도움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맹세를 한 후 왕실에 유폐되었고, 콩데 2세 공작도 부르봉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개종을 한다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그리고 1572년 8월 26일 3일 만에 일명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이라고 불리는 대참사는 종결되었고, 우유부단한 국왕은 파리의회에 참석하여 학살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파리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파장은 수많은 지역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권력층의 지시나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그노인들은 지역마다 그들만의 논리로 자발적인 폭력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공포와 분노가 그 공간을 지배했다. 그중에서도 툴루즈, 리오, 루앙, 부르주, 오를레앙 등 12개 도시는 구교와 신교가 공존하던 도시로서 항상 종교적 분쟁이 심각했었는데 이런 폭력적인 기류를 타고 공격성이 폭발한 것이었다. 도시에 따라 폭도로 변한 가톨릭 시민이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고 시 당국이나 교회에서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반적인 신도 수를 볼 때 위그노인이 10% 밖에 되지 않아서 가톨릭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로 결집되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록도 되지 않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폭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개혁파 상층부에서는 권력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알고 보면 적이나 아군이나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기 때문에 폭력과 화해가 공존했을지 모르지만 중하층 계급에서는 오로지 종교적인 문제만이 갈등의 원인으로 작동하여 자발적 화해는 도출되기 어려웠다. 이런 폭력 사태는 평화의 기약도 없이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위그노 세력은 소멸되지 않고 다시 결집하였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아를과 가까운 솜미에르와 현재 와인으로 유명한 상세르 그리고 라로셸 등으로 파리 학살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흩어져 있던 반군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위그노 교세가 가장 강했던 라로셸은 대서양과 접하고 있어서 영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고 함부로 함락할 수 없는 요새화된 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의 지도자는 파리 학살 당시 스코틀랜드로 도피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몽고메리 백작이었다. 그리고 나바르의 앙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비록 파리 루브르궁에 유폐되어 있었지만 그의 왕국 나바르 정부는 암암리에 적극적으로 병력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쫓겨난 위그노 난민들도 속속 라로셸로 모여들어 세력은 금방 확장되었다. 이런 기류를 인지한 프랑스 국왕은 비롱 남작을 시장으로 임명하여 평화를 도모하였으나 그가 기즈 가문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강력하게 비토하였고 이에 국왕은 다시 위그노에 호의적이었던 자신의 참모 라 누에를 평화 사절로 보냈는데 이 역시 결국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항군의 요구를 국왕이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라 누에는 협상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라로셸에 남아 반군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봄이 다가오자 국왕의 이름으로 정부군이 형성되었다. 후세 역사가들이 프랑스 종교전쟁 연대기 중 4차 내전이라고 명명한 라로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정부군의 지휘자는 국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28,000명의 병력과 그에 따른 막대한 군수품이 뒤따랐다. 그 외에도 기즈 가문의 로렌 공작과 오말 공작 그리고 알베르트 곤디 같은 이탈리아 출신 고관들을 비룻해 대다수의 프랑스 귀족들이 참전을 하였고, 심지어 볼모로 유폐되어 있던 나바르의 앙리와 콩테 2세 공작도 명목상 참전시켜 정부군의 강력한 척결 의지를 표명하였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인적 물적 구성이었다. 차기 국왕 서열 1위가 직접 참전한 전쟁이니 프랑스 군의 전력을 총집결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투의 양상은 공성전이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라로셸 성을 함락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30,000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2,000명도 되지 않는 저항군이 지키는 성벽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해안과 접하고 있는 요새화된 성이었기 때문에 공성전은 금방 결판이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영국과 네덜란드가 많은 함선을 보내 계속 지원을 하였기 때문에 공격이 분산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도 해군을 보내 영국과 네덜란드 함대와 해전을 불사하면서 방어망을 구축하여 프랑스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이렇게 5월까지 지루하고 공성전이 이어지면서 정부군의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해 400명 이상이 전사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군은 스위스 용병 6,000명을 증강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지만 이 역시도 견고한 라로셸 성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렇게 공성전이 기약 없이 장기화되고 있을 때, 파리 왕실에서는 공석이었던 폴란드의 국왕에 앙주 공작을 선출하는 기일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결과가 난 것은 폴란드의 국왕 지그문트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귀족들이 선거 군주제를 도입하여 추진한 결과 합스부르크가를 제치고 당시 가장 선진적인 왕국이었던 프랑스에게 자신의 왕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복잡한 외교적인 문제가 결부되면서 결국 샤를 9세의 동생이 파리의회에서 폴란드 왕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폴란드 왕국은 변방이었기 때문에 국왕이라 하더라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여서 당연히 앙주 공작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그럼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폴란드 여왕과 결혼까지 하면서 폴란드로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라로셸 공성전은 어정쩡하게 결과를 보고 1573년 6월 24일, 종전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7월 폴란드 대표단이 직접 라로셸로 와서 자신의 국왕을 모시고 갔다.
예상치 않은 이유로 라로셸 전쟁이 종전된 후 바로 볼로뉴 칙령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위그노 입장에서는 피의 대가치곤 내용이 너무나 부족했다. 기존의 생제르맹 평화조약에 비해 대폭적으로 축소된 내용이었다. 로라셸과 몽토방과 님 세 개의 도시에서만 위그노식 예배를 행할 수 있고 그것도 10명 이상을 금지하는 형편없는 조항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위그노의 불만은 들끓었지만 파리 학살 이후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위축된 위그노 세력은 다음 해에 몽고마리 백작마저 반란을 꽤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구심점을 잃고 수면 아래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단락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은 이후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먼저 학살된 규모로 보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파리에서만 정황적으로 확인된 수만 1,100명이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파리시 당국이 세느강에 버려진 시신을 수거하는 데 사용한 경비를 역으로 산출한 추정 결과하고 한다. 하지만 그 숫자는 보수적인 방법으로 산출한 최소의 숫자이고, 현실적으로 추산을 하면 최소한 그보다 2배 이상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파리 외의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의 숫자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이보다 훨씬 많아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명 프랑스 종교전쟁이라고 일컫는 내전까지 더해보면 전체적으로 최소한 200만 명이 사망하였고 그중에 10% 정도는 순수하게 국가로부터 학살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리고 이런 파리 학살과 라로셸 전쟁이 끝났을 때 로마 교황은 갈리아제도로 인해 껄끄러운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왕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교황은 샤를 9세에게 황금장미를 보내어 특별한 감사의 뜻을 표했고, 위그노를 물리친 기념으로 그에 대한 찬송가를 지어 가톨릭 교구에 전달하였으며 또한 위그노를 전복하다라는 문구와 천사가 위그노를 학살하는 장면을 부조한 기념 메달도 제작 배포하였다. 그리고 콜로니가 기즈 병사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도 3점을 주문하였다. 콜로니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란군의 수장이었지만 로마 교황청이 볼 때는 오스만과 같은 악의 존재였다. 그리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매우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이단에 대한 가톨릭의 승리라고 하는 예찬론이 본보기로 유럽 전체에 전파되었다.
이 사건은 500년이 지난 현재도 역사가들의 의문점을 해결해 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듯이, 이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온갖 시시콜콜한 기록까지 남겼던 당시의 보편적 행태와는 달리 애매모호하고 미미한 내용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부족한 기록으로 역사적 퍼즐을 맞추어보는 것은 현대인의 권리이자 의무인지 모른다. 그럼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당시 가장 선진적인 문화와 가톨릭의 메카와 같은 종교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던 대도시 파리 중심에서 이런 야만적인 폭력 사태가 발생한 것은 보편적인 역사관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상황을 짜 맞추어 보아도 만족할만한 개연성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첫 번째 주모자는 모후 카트린느 설이다. 당시 왕실 핵심 요직에는 모후의 고향에서 온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최측근인 알베르토 곤디와 더불어 밀라노 출신 추기경이자 총리 격인 르네 드 바라고, 만토바 출신의 군 장성이자 파리의회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던 느베르 공작 등은 모후가 직접 임용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라는 지역적 인맥으로 뭉쳐진 모종의 비공식 자문기구로서 모후가 필요할 경우 많은 해법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이란 강력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위그노 같은 이단에 대해서는 항상 본능적으로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정략적인 평화 정책의 일환으로 처음엔 나바르 앙리를 부마를 맞이하려고 했지만 계산에 없던 콜리니 암살이라는 변수가 발생하자 반대 세력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극단적인 태도로 돌변하였던 것이다. 이런 돌변은 이탈리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한 심약한 샤를 9세 또한 자신의 왕위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그들의 논조에 어쩔 수없이 승인을 한 것이다. 그들이 반군주제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인의 장막을 치고 있던 왕실의 목적은 왕권의 유지와 그에 따른 자신들의 안위 유지였다. 달콤한 권력에 취하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두 번째 가설은 기즈 가문 설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반위그노 노선에 앞장섰던 기즈가는 콜로니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누가 보아도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이참에 파리라는 공간에 대다수의 위그노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확실하게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파리는 자신들의 확고한 지지기반 구역이어서 실패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리고 폭력 사태의 현장을 보더라도 그들은 직접 사태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파리 시민군을 선동하고 폭력을 부추긴 정황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암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콜로니를 최우선으로 습격하여 살해한 후 그의 시신을 성난 군중들에게 노출시킨 것은, 그런 행위의 의도를 따져볼 때 기즈 세력을 사건의 주도적 용의자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추정은 묘하게도 당시 기즈가의 수장인 기즈 공작이 결혼식이 끝난 직후 로마로 출타 중이어서 개연성을 희석시킨다. 아니면 그런 알리바이를 노리고 일부러 피해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당시 정황상 그렇게까지 추론하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그렇게 먼 미래를 보고 이런 참혹한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설은 앙주 공작 즉 앙리 3세 주도설이다. 예기치 않은 콜리니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이탈리아 참모 회의에서 위험요소인 위그노 지도자급 50명을 처형하는 것으로 중지를 모았지만 샤를 9세와 카트린느는 이 안에 반대한 반면 야심 많은 앙주 공작이 찬성하고 기즈 가문과 함께 강하게 관철시켰다는 설이다. 학살 시작 다음날 모후가 기즈 가문의 지나친 폭력행위를 비난하고 파리시민에게 자제해 줄 것을 성명서로 내놓은 것을 보면 기즈 공작이 없는 가운데서 거사의 핵심은 앙주 공작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파리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민심이 돌아서기 시작했고 이에 모후의 강력한 의지로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앙주공작을 변방인 폴란드로 유배를 보낸 것이라고 추론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그런 권력 간의 술수와 암투로 인해 희생양이 된 앙주공작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래서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앙주 공작 책임론은 음모론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배제할 수 없는 심증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튼 이 학살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확인할 수 없다. 물론 학살을 승인한 최종 인물은 최고 권력자의 책임이지만 당시 정치적인 구조를 볼 때 그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진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루이 14세나 헨리 8세의 경우처럼 절대왕권을 추구한 제왕이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이런 무모한 짓을 왕권의 약화와 정치권력이 분열된 상황에게 한 세력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이 대학살은 총체적인 문제가 한 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혼탁한 권력 투쟁과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이 결합하여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폭력 상태로 화학반응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폭력은 예측했을지 모르지만 파리 중심가에서 이런 대규모 인간 사냥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종교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인간의 야만성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종교의 폭력성은 인간의 폭력의 역사와 동행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사적 사건의 결과물에 대한 원인 파악은 항상 미흡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해석과 추정의 영역에서 헤매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폭력성이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오염되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폭력은 화석처럼 명확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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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신과 하나의 종교만이 지배하던 유럽 중세에 종교개혁이란 대지진이 발생하여 기존의 견고한 영적 세계에 핵분열이 일어났다. 그 분열은 갈등을 초래했고,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들이 충돌하여 폭력적인 에너지가 프랑스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종교적인 소통 창구는 교회 아니면 거리에서의 설교였다. 특히 거리 설교는 교회와는 달리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하는 행위였다. 가톨릭에 대한 믿음과 지식으로 무장한 많은 설교자들은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프로테스탄트는 사탄의 자식이라고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문맹률이 높았던 일반 대중은 성경은 물론이고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훈련된 설교자의 메시지는 비판이나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이런 대중 설교는 대도시일수록 파급력이 강했다. 어느 사제는 콜로니는 사악한 존재이며 오히려 국왕이 그를 죽이라고 했을 때 죽이지 않는 것이 사악한 짓이라고 선동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나바르의 앙리와 마르그리트 공주와의 결혼식에서 극에 달했다. 그들은 폭력과 학살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혼은 위그노들이 파리를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그것은 악마가 파리와 프랑스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런 극단적인 설교는 학살 전날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학살 당일 콜로니 살해에 동참한 어느 귀족은 참수된 콜로니의 머리를 군중에게 쳐들어 보이며 이것이 국왕의 뜻이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국왕은 정교일치의 수장으로서 이단과 싸워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 대학살이 끝난 후 대중은 이렇게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위그노에 대한 화형과 방화는 일종의 영적인 정화 의식이며, 죽인 자를 세느강에 버린 것인 물로 세례를 하려는 의식이라고 합리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위그노는 인간이 아닌 해충과 같은 박멸의 대상일 뿐이며 그들에게 굴욕과 모욕과 수치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그들은 주장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샤를 9세는 파리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 후사 없이 사망하였고, 그리고 그의 동생인 앙주 공작이 앙리 3세로 프랑스 국왕에 즉위하였으며, 이후 위그노에 대한 완화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한 기즈 공작의 주도로 1576년 스페인 펠리페 2세와 교황 식스토 5세와 예수회 등과 연합하여 가톨릭 동맹을 결성한 후 친위그노 정책을 주도한 앙리 3세를 압박하였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노골적으로 왕권을 무력화하면서 폐위까지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국왕은 발루아 궁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암살의 시대가 이어진다. 1588년 12월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발루아궁으로 유인하여 암살하고, 8개월 후엔 그 자신도 도미니코회 수사인 자크 클레망에게 암살을 당하고, 그리고 뒤이어 대하소설을 몇 권이나 쓸 정도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른 나바르 앙리는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사했다가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12번의 암살 시도를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0년 가톨릭 광신도에 의한 13번째 암살 시도는 피할 수 없었다. 앙리 4세의 치세에서 잠시 종교의 자유를 누리던 위그노인은 다시 선대의 진심과 역행한 부르봉가의 후손들에게 박해를 받다가 결국 18세기 후반 루이 14세 때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거의 멸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