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연계
오래전 렌터카를 몰고 제주 서쪽 중산간쯤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우연히 억새밭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모르지만, 도로 옆 넓은 구릉지에서 10월의 억새가 바람을 타고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그 풍광에 매혹되어 길옆에 차를 세우고 그 억새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무엇에 홀린 듯이, 좀 과장하자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혹의 불길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바람이 햇살과 반응하며 산들거렸고, 사방이 탁 트인 구릉에 펼쳐진 억새의 물결은 나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육지에서 접할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이후 제주를 다시 찾을 때면 관광 개념으로 여행을 하느라 그 풍경은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다. 항상 일행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곳을 다시 가보려고 해도 정확하게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설령 찾았다고 하더라도 날씨와 계절에 따라 풍경이 변하기 때문에 처음 본 그 풍경은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첫사랑은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것처럼 그 억새 풍경도 그렇게 기억에 보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생각인지 모른다.
2년 전, 제주에서 3개월 동안 살면서 오름과 올레길과 그리고 이름 없는 많은 길을 걸었다. 제주 공영버스를 타고 발품을 팔며 제주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똑같은 장소라도 자동차 안에서 보는 제주와 걸으면서 접하는 제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 다랑쉬오름이 있다. 제주 동쪽 구좌 들녘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다랑쉬오름은 그 지역에서 단연코 일장에 속한다. 아마도 그 풍모는 제주 전체 오름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380여 미터의 오름을 오르기 위해서는 가파른 표교차 200여 미터를 극복해야 하지만, 오름 마루금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만족스러운 조망을 선사한다. 동쪽으로는 드넓은 바다와 함께 성산봉과 우도가 조망되고, 광활한 들녘에는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의 많은 오름 군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 끝에서는 제주를 창조한 한라산이 여전히 절대자의 아우라를 발산하며 사방을 굽어보고 있다.
이 오름의 유래는 보름달, 높은 봉우리, 소 등과 연관된 것이란 설이 있는데, 조선시대 문헌에 월랑봉(月郞峰)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달처럼 둥글고 위용이 대단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적어도 동쪽에서는 군계일학이다.
다랑쉬오름은 형태적으로 보면 굼부리가 중앙에 위치한 전형적인 원형 오름이다. 금오름, 백약이오름, 저지오름 그리고 산정호수가 형성된 사라오름 등이 원형 오름 형태이다. 이런 원형 오름 트레일은 대게 굼부리를 중앙에 두고 성돌이 처럼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돌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다랑쉬오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오름은 제주에서 지명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다랑쉬오름을 논하지 않을 수도 없다. 바로 아끈다랑쉬오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끈다랑쉬오름은 다랑쉬오름에서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 210미터에 불과한 작은 오름이다. 표교차로 따지면 40여 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끈이란 접두사를 붙인 것은 작지만 모체에 버금간다는 뜻으로서, 옛사람들은 다랑쉬오름의 위용에 뒤지지 않는 자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족은’이 아닌 ‘아끈’을 앞에 붙였던 것이다. 조선의 문헌이나 현재의 지도에도 소월랑봉(小月郞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사실 멀리서 보면 청룡언월도를 잡고 당당하게 서있는 관우의 풍모 같은 다랑쉬오름만 시선에 잡힐 뿐 아끈다랑쉬오름은 수많은 보졸 가운데 하나처럼 미미하게 보인다. 낮은 둔덕처럼 보여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 오름을 외면한다. 사실 이해할 수 있다. 저런 볼품없는 오름을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겠는가. 나도 역시 처음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다랑쉬오름 트레일 루트를 설계할 때 아끈다랑쉬오름은 하나의 통과하는 지점으로 설정을 했다. 처음 다랑쉬오름에 오르고 둘레길을 한 바퀴 돈 후 아끈다랑쉬오름을 거쳐서 광활한 밭담 들녘길을 지다 용문이오름까지 가는 13킬로미터 루트였다. 아끈다랑쉬는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3월 초에 접한 아끈다랑쉬오름은 나의 편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다랑쉬오름과 둘레길을 걸은 후 아끈다랑쉬오름 들머리로 접어들었다. 겨울을 지난 갈색의 억새가 초입부터 큰 키를 흔들며 시야를 차단하였다. 사람 발자국이 변변치 않은 방치된 오솔길을 따라 몇 분만에 오름 안부에 올랐다. 그 흔한 계단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끈다랑쉬는 그렇게 나와 처음 조우했다. 폭풍의 언덕의 가시나무처럼 홀로 서있는 작은 소나무 외에는 오름 안부 전체가 억새밭이었다. 억새밭 하면 먼저 떠오르는 오름이 새별오름이다. 3월이면 제주시 주체로 새별오름에서 오름 전체를 덮고 있는 억새를 태우는 들불축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만큼 새별오름은 억새의 상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말 발급 모양의 새별오름은 지형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새별은 오름 능선의 한 면만 억새밭이 조성되어 있는 반면, 원형 형태의 아끈다랑쉬는 오름 능선부 전체가 억새로 덮여 있다. 새별오름은 오름 경사면에 억새가 덮여 있어서 시각적으로 멀리서도 보이지만, 아끈다랑쉬는 정작 오름에 오르지 않고서는 억새의 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나는 인적이 드문 아끈다랑쉬오름을 천천히 돌면서 억새를 만끽했다. 비록 겨울을 보내느라 몹시 지쳐 있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3월의 억새 풍경은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나는 10월에 오면 제대로 된 억새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과 철원의 명성산 그리고 영남알프스와 천관산 등의 억새 평전이 이미지화되어 머리에 그려졌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지난해 10월 말 경 다시 아끈다랑쉬를 찾았다. 버스를 타고 다랑쉬오름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다랑쉬오름에 오른 후 아끈다라쉬오름을 거쳐 용눈이오름까지 연계하는 코스였다. 지난번과 거의 동일했다. 오름 3개와 드넓은 들녘길을 걷는 이 트레일은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감행해보지 않는 신루트이다. 나는 이 루트를 <안 루트>라고 명명하였다.
아무튼 나는 2년 전 약속을 지켰다. 아끈다랑쉬오름 안부에 오르자 3월과는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졌다. 아직 녹색물이 빠지지 않는 억새가 사람 키 만 한 크기로 웃자라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3월의 억새는 기운이 쇠약하여 허리가 꺾여 있었지만, 10월의 억새는 성하게 곧추서서 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다. 누가 풀이 눕는다고 했는가. 억새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봄여름이 아니라 늦가을이다.
나는 촘촘한 억새를 헤치며 앞으로 전진했다. 길이 따로 없었다. 앞서간 사람들이 밟고 가 쓰러져 있는 협소한 공간이 길 구실을 하고 있었다. 억새 키가 커서 시야가 가렸지만 정상부에 오르자 그나마 멀리 성산봉이 보였다. 키가 작으면 시야를 확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선행자가 밟아 놓은 좁은 공간에서 점심을 먹었다. 밖에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수수밭처럼 완벽한 은폐였다.
다시 나머지 길을 걸었다. 3월에는 그나마 겨우내 사람들이 다져놓은 길이 보였지만 10월의 그곳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선행자에게 밟혀 누워있는 억새가 길 역할을 했다. 수풀이 울창하면 방향감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갈팡질팡한 듯한 불분명하고 산만한 길이지만, 다행히 멀리 보이는 다랑쉬오름이 등대 역할을 해주었다. 사실 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질식할 것 같은 억새 숲을 헤치면서 갈 때, 진한 억새 향기가 콧속을 후볐다. 진홍빛의 단풍처럼 한 여름동안 광합성으로 응축시켰던 생명의 에너지를 한순간 발산하듯 그 향기는 오름 전체를 마취시키고 있었다. 그래, 미로였다.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크레타의 미로처럼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타세우스는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아끈다랑쉬오름에서 몽환에 빠진 듯 길을 헤맸다.
아끈다랑쉬오름은 용눈이오름과 같은 억새로 덮여 있지만 접하는 환경은 확연하게 다르다. 용눈이오름은 억새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경계 울타리를 쳐두었다. 일종의 조경용 내지 관람용이다. 이런 환경은 새별오름도 마찬가지이고, 이름 꽤나 있는 전국의 억새 평전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끈다랑쉬오름은 울타리가 없다. 억새를 두 손으로 헤치면서 가야 한다. 날 것의 억새밭인 것이다. 육지 것처럼 넓지는 않지만 억새의 물결을 몸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다. 억새를 오감으로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끈다랑쉬오름이다. 용눈이와 아끈다랑쉬가 연계된 이 <안 루트>를 걷는다면 두 억새의 풍경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것이다. 두 오름의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오름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으며 그 특징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주에는 400개에 가까운 오름이 있는데 그 오름들은 각자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오름 같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오름도 있고, 한라산 중간부에 있는 거대한 오름도 있으며, 그 모양도 사람 얼굴처럼 각양각색이다. 하나의 오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엔 주변에 있는 다른 오름과 연계할 수 있다. 천기누설이지만, 그중에 아끈랑쉬오름은 아주 독특한 오름 풍경을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용눈이오름까지 연계한다면 풍미 가득한 오름 트레일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