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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bridKIM Mar 25. 2019

09 Au revoir!롱샹성당


잔뜩 흐리던 날이 개었다.


오늘은 바젤에서 우리가 하기로 한 중요한 일정 중 하나인 '롱샹에 가는 날'이다.


E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롱샹을 내가 거절할 리 없지. 롱샹성당은 이미 나의 마음속에도 '찜'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건축가들의 성지, 롱샹에 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바젤에서 가는 것은 매우 적절한 옵션 중 하나다.  

프랑스 지역이지만 파리보다 바젤에서 훨씬 가까운 데다 비록 여러 번 기차를 갈아타야 하고(최소 두 번 이상 환승) 역에서 아주 조금(1.8km!) 걸어야 하는 고단함이 있지만, 바젤 SBB역을 기준으로 걷는 시간을 포함 2시간 남짓의 거리이기 때문.


바젤 SBB역에서 롱샹 역 Gare de Ronchamp까지 1시간 34분. E는 차를 렌트할 것을 권했다.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1887-1965)


'근대 건축의 5원칙 Five points of Architecture'이란 것이 있다.

5원칙이라니, 난데없이 재미없고 중요해 보이는 이 이론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이론을 정립하신 분이 바로 롱샹성당의 설계자인 르 코르뷔지에이기 때문이다.


-필로티라는 기둥을 통해 건물을 들어 올려 하부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하고(필로티),

-하중을 지지하던 내력벽의 역할을 기둥이 대신함으로써 방의 배열과 건물의 입면을 자유롭게 구성하거나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가로로 긴 창을 두어 최대한의 채광을 확보하고(가로로 긴 창),

-건물이 들어서면서 줄어든 녹지 면적을 옥상에서 확보(옥상정원) 하는 것


이것이 그 기본 개념인데 우리가 서울(현대의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많은 건물들이 이 원칙에 근거해 있다.


2016년에는 현대 건축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17개 작품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니(롱샹성당도 그중 하나) 과연  '모더니즘 건축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분이라 할 수 있다.


오늘 가는 롱샹성당(Notre-Dame du Haut, 1955)은 대략 이런 분의 후기 대표작이다.


근대 건축의 5원칙이 적용된 빌라 사보아 (Villa Savoye, 1931). 출처 https://en.wikiarquitectura.com


르 코르뷔지에의 대부분의 업적은 프랑스 귀화 이후지만, 출생국인 스위스도 화폐를 통해 그 지분을 주장하고 있다. 스위스10프랑 화폐. ©hybridKIM


©hybridKIM


#롱샹성당에 이르는 길


두 번째 환승 후 기차가 벨포르 Belfort 역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달리는 기차의 창 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던 내 눈앞에 언덕 위 롱샹의 실루엣이 얼핏 지나갔다.

순간 흥분한 나는 E에게 다급히 이 사실을 알렸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아쉽게도 E와 함께 이 흥분을 나눌 수는 없었다.

파리-바젤 간 기차에서 그렸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스케치. 출처 Le Corbusier The Chapel at Ronchamp

롱샹 역에 내린 우리에게는 약 1.8km의 산책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차를 타고 오며 롱샹성당의 예고편을 살짝 맛본 나에게 1.8km 대수롭지 않았다.

역 앞으로는 목가적인 롱샹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이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이라니, 롱샹성당을 만나러 가는 길로 그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목가적 풍경의 롱샹 마을 ©hybridKIM
주요 지점별로 이정표가 있어 찾아가기에 어렵지 않다.

마을을 지나자 산길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평화로웠던 이 산길을 우리는 번데기와 군밤과 뽕짝과 닭백숙에 대해 얘기하며 걸었고

조금 더 걸음을 옮겼을 때 롱샹성당이 다시 한번 저 멀리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 위에 살짝 보이는 하얀 물체가 롱샹성당 ©hybridKIM
뒤돌아보면 이런 풍경 ©hybridKIM

길은 예상보다 가팔랐고,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살짝 땀이 났던 것도 같다.

그때, 이 언덕을 함께 오르고 있는 지친 표정의 J가 불현듯 떠올랐다. (잊었을지 모르지만 이 추운데 바젤에 왜 가냐던 그 J 말이다.) J와 이 곳에 함께 오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결정이었던가. (물론 재빠르고 단호한 거절력의 소유자 J의 결정이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10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각, 드디어 롱샹의 게이트하우스 Gate House 앞에 도착했다.

잠에서 덜 깬 듯한 표정의 직원은 입장권을 건네주며 우리가 오늘의 첫 게스트임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롱샹성당을 독점할 수 있다니! 1.8km를 등산한 보람이 있었네!


입장권을 샀다고 해서 이제 드디어 롱샹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롱샹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번 더 언덕을 오르고(1.8km는 아니니 안심하시길) 길을 따라 늘어선 울타리와 나무를 지나서야 온전히 그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와 울타리에 가려진 롱샹성당©hybridKIM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롱샹성당 ©hybridKIM


롱샹성당은 우리가 유럽여행에서 만나는 전형적인 성당들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언제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건축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 그 연장선상에 롱샹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코르뷔지에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종교 건축물을 설계하고자 했다.


코르뷔지에는 처음에 롱샹성당의 설계 제안을 거절했는데,

롱샹성당 설계 이전 Saint-Baume 교회 설계에 참여하면서 교회를 지하에 계획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보수적인 교회 당국자들과 충돌했던 경험 때문이었다.(결국 그 교회는 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낡은 관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는 전통을 건설하고 싶다며 설득해 오는 롱샹성당 측의 간청으로 결국 제안을 수락했고, 디자인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아 시대의 역작을 탄생시켰다.



#롱샹성당

롱샹에서 바라 본 주변. 이렇게 높은 곳까지 걸어서 올라왔다는 사실. ©hybridKIM

이렇게나 만나기 힘든 롱샹성당이라니,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클라이맥스가 남았다.


이 여정의 절정은 마지막 언덕길을 올라 성당의 전체 조형을 한눈에 담고, 다시 성당 주변을 돌아 북쪽으로 난 문을 여는 순간이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러.나


빛으로 조각된 창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이성은 판단을 멈추었다.


롱샹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이어폰이 필요하다. ©hybridKIM


남측 창들 ©hybridKIM


동측 제단을 향해 바라본 모습 ©hybridKIM


남측 예배실 ©hybridKIM


남측 예배실 위 조명탑 ©hybridKIM


문득 손이 시렸다.

단열이 되지 않는 예배당 안에서 두 시간여를 보낸 것 같다.

대여섯 명의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잠시 다녀갔고, 건축을 하는 '냄새가 나는' 한 명이 오기 전까지 오래오래 이을 독점하며 이 공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요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겼다.


기차 안에서 혹은 등산길에서 건축물을 인지하고, 접근하고, 주변을 거닐고, 문을 열고 다시 내부를 거니는 이 과정을 르 코르뷔제는 건축적 산책로 Architectural Promenad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간을 인식하고 향유하게 하는 하나의 건축적 장치인 것인데, 오늘 그 의도에 너무도 충실하게 롱샹성당을 감상했다.


직접 그곳에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총체적인 감각.

나는 오늘에야 드디어 롱샹성당을 보았다.


게껍질 Crab's Shell 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지붕의 롱샹성당 ©hybridKIM




#또 한 명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 Renzo Piano(1937~)
  

출처 https://www.collinenotredameduhaut.com


한편, 앞서 입장권을 샀던 게이트하우스 Gatehouse와 세인트 클레어 수도원 St. Clare's Monastery 은 2011년 렌조 피아노의 설계로 지어졌다.


새롭게 추가된 이 건물들은 후기 모더니즘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인 본당의 가치와 르 코르뷔제의 초기 계획 의도를 훼손하지 않도록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땅에 묻힌 형태로 계획되었다.  


후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종교 건축물에 수녀원과 게이트하우스를 추가로 계획하는 것이 결정되자 논란은 대단했다고 한다. 계획을 반대하는 측과 르 코르뷔제 재단에서는 프로젝트 중단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 문화부에 모든 결정을 철회해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기도실과 게이트 하우스 내부 ©hybridKIM

렌조 피아노는 이런 의견들을 받아들여 계획을 단순화하고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설계를 조정했으며, 아연 도금한 강판지붕, 날렵한 철골 단면, 콘크리트 패널, 목재가구 등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내부 공간에 경건함을 부여하여 겸손하고 품위 있는 시설로 계획하였다.

현대건축의 아버지 앞에 당시 70대의 또 다른 건축계 노장도 자세를 낮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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