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흔한 일 아니겠니?
어느 퇴근길, 팀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가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유명한 '수구레' 맛집이 있다 해서 우린 한번 가보기로 했다. 수구레? 이름부터 낯선 수구레는 소의 가죽과 살 사이의 부위라 한다. 가게로 가는 내내 나는 '뭐 이런 것까지 먹지?, 이런 부위는 누가 처음 먹었을까? 이게 맛있을까?' 궁금하기만 했다. 사장님의 추천대로 산낙지 수구레를 주문했다. 낙지볶음에 수구레를 추가한 거네! 라며 젓가락을 뒤적여 수구레 한 점을 찾아 생애 첫 수구레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나이 마흔셋이지만 이 세상엔 아직 내가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들이 많구나!'
쫄깃한 식감에 씹을수록 고소한 맛,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진 수구레는 소주를 부르는 맛이다.
"사장님~ 소주 한병이요! 소주는 아무거나요!"
아쉽게도 네 명 중 두 명은 운전을 해야 했고, 다른 한 명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소주를 마셨다. 한 동료가 같이 마셔주지 못해 미안하다 했지만, 요즘은 혼자 마시는 소주를 좋아해 상관없었다. 혼자 소주를 따라 수구레와 함께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소주 맛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사실 나는 소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제대로 마시기 시작한 대학교 시절,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던 나는 술을 많이, 자주 마셨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니 항상 돈은 없었고, 술은 어쩔 수 없이 항상 가장 저렴한 소주였다. 나는 술자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술을 잘 마시지는 못했다. 소주를 자주 마셨지만 이렇게 맛없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주를 마실 때면 항상 조용히 사라져 으슥한 곳을 찾아 구토를 했다. 그럴 때면 속으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라 다짐했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술을 마셨고, 으슥한 곳을 찾아 또 토악질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소주가 좋아졌다. 집에서 아내와 딸이 잘 때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소주 한 병을 마시면 행복하고 여유가 느껴진다. 혼자 술을 마실 때는 안주도 중요하지 않다. 아이 반찬으로 사놓은 도시락 김, 국물용으로 사놓은 마른 멸치에 고추장, 마른오징어가 있는 날은 특별한 날이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TV를 보며 소주를 마시는 모습,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모습이다. 바로 아버지...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나처럼 술은 잘 마시지 못했지만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였다. 어머니는 매일 한잔의 술이라도 마시고 싶어 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를 닮았다 한다. 아버지는 우리 세대의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항상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술을 마셔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아들들을 불러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귀찮은 나머지 네~ 네~ 건성으로 대답하고 방을 도망쳤다.
아들이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후 가끔 가족 행사에서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실 때면 아버지는 행복해했던 것 같다. 나를 보고는 "네가 정말 술을 마실 줄 아네!"라며 대견(?)해 하셨다. 형이 있는데, 형은 고급술을 좋아했고 나는 그냥 술을 좋아해서다. 그럼에도 그때도 소주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단지 구토를 하지 않았을 뿐!
소주를 좋아하게 된 요즘, 아버지와 함께 마른 멸치를 안주삼아 소주 한잔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뇌출혈로 3년 넘게 무의식 상태로 병원에 있다 몇 해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많이 슬펐다. 아버지를 이제 볼 수 없어서 슬펐다기보다 무뚝뚝한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어 슬펐다. 어린 시절 아들과 축구 한번 안 해준 아버지, 야구장 한번 같이 가주지 않았던 아버지, 항상 놀러 가면 낮부터 술을 마셔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있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주 맛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버지와 단둘이 소주를 마셨던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수구레를 안주로 소주를 거하게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몇 번은 있지 않았을까? 물론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는 피할 순 없었겠지만...
요즘은 그냥 소주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