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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 어른이 Dec 14. 2023

우울함, 시간이 약인줄 알았지...

마! 흔한 일 아니겠니?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우울증 환자 100만 명 시대'란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나'같은 사람이 많구나... 얼마 전 나는 10년 가까이 고민만 하다 용기를 내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다.


나는 항상 밝은 얼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는상이라 한다.
소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업무 특성상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한 척하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색소폰, 스노보드, 최근엔 바이크까지 취미가 많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인생을 즐길 줄 안다고 한다. 하지만 나도 우울할 때가 있다. 스노보드 마니아인 나는 스키 시즌이 끝날 때면 의욕이 조금 떨어졌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따뜻한 바람이 불면 곧 내가 우울해질 거라 예상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우울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길어야 2~3일 정도? 그래서 그땐 "나 요즘 우울해!" 라며 장난스럽게 우울함을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봄이 아닌, 겨울을 기다리며 설렘이 가득해야 할 가을에 우울함이 찾아왔다. 처음엔 환절기라 그런가 보다 했다. 1주, 2주, 1달, 2달 우울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사실, 내가 우울증인가? 란 의심은 최근이 아니다. 10여 년 전, 나는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10년이 지나도 추억이 아닌 악몽으로 남아있는 직장 상사 때문이었다. 그땐 그 악마 같은 직장상사를 뭐라 표현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요즘 이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 '가스라이팅'


10년 전, 최고로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 우울함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결혼을 하고 2~3년, 한참 신혼의 달달함을 느낄 때, 그리고 아내의 몸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을 때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일본에서 나 하나 믿고 온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한다! 뱃속의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클 수 있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이런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힘든 직장 생활을 그냥 바보같이 참고 꾸역꾸역 이겨내야만 했다. 거의 매일 잠에 들면서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란 나쁜 생각을 했으니... 유일한 해방구는 퇴근길이 같은 동료와의 상사 험담이었고, 집에 돌아오면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음에도 내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며 걱정을 했다. 


하루는 집에서 집정리를 하는데, 결혼하기 전 성당에서 올바른 부부가 되는 방법을 주제로 공부했던 노트를 발견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보자는 취지로 서로에게 하는 질문들이 있었다. 질문 중 하나는 '당신은 당신의 남편의 어떤 점이 가장 좋아서 결혼을 결심을 했나요?'였고, 그 질문에 대한 아내의 답은 '자신감'이라 쓰여 있었다.

 

'나는 근본도 없는 자신감이 있던 놈이었지,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어느 날, 이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이 힘들어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정했다. 우선 아내에게 다음 주 월요일에 회사에 가서 사표를 던져야겠다 말하며 허락을 구했다. 다행히 아내는 승낙을 해줬다. 그냥 내 맘이 편한 데로 하란다. 그리고 부모님이 걱정을 하실까 봐 전화로 퇴사를 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부모님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집 앞 호프집에서 술을 한잔 마시며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 줬다. 한참을 내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은 내게 조언을 해줬고, 나는 울분을 터뜨리며 호프집에서 큰 소리를 치며 부모님에게 화냈다. 


"엄마! 아빠! 아들이 죽겠다고요! 인생을 즐겁게 살라면서요? 그런 아들이 죽을 것 같아요!"


부모님의 충고는 이랬다. 그래도 결혼을 했고 몇 달 뒤면 아이도 태어나는데, 섣불리 결정하지 말아라. 옮길 곳을 정한 뒤에 이직하는 게 좋지 않겠니? 지금 들어봐도 매우 현실적이고 올바른 조언이다. 


결국 나는 사표를 던지지 못했고, 한동안 매일 아침 지옥철을 타고 그 지긋지긋한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업무로 스트레스가 많거나, 불안할 때면 그때의 우울한 감정이 꾸물꾸물 올라온다. 그리고 또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얼마나 편할까'란 생각을 한다.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하지만 이러  생각이 1주, 2주, 몇 달이 계속된다면? 10년 전 그때, '설마 이게 우울증이겠어?'라 하지 말고 '이게 우울증일 수 있나?'라 생각하고 병원에 갔었어야 했다. 


지금은 그 직장상사가 회사에 없다. 하지만 이번처럼 우울감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도 가끔 있다. 머릿속에서는 '이게 그렇게 심각하게 우울할 필요가 없는 건데...'라고 하지만 기분은 한없이 우울해진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닌데...'라고 생각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울감이 줄어들면 괜찮겠지만, 이성을 찾은 후엔 '바보같이 내가 왜 그랬지?'라며 후회하고 또 우울해진다. 그렇게 심하게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 정신건강의학과 예약을 하고도 망설임이 많았다. 예약 당일날에도 '이거 우울증 아닌 거 같은데' '그냥 흔한 감정 기복인데 괜히 오버하는 건 아닌가?' 한 2주를 고민한 후 그래도 이번에는 한번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머피의 법칙이 여기서도 작용한 걸까? 병원을 방문하기로 한 날, 갑자기 기분이 괜찮아졌다. 


'진짜 가지 말까?'


그런데 그냥 갔다. 우울증이 아니라면 다행이고, 우울증이라면 치료를 받으면 되는 것이니 굳이 손해 볼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생애 첫 정신건강의학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특별히 한 것도 없었다. 그냥 차분한 조명이 있는 진료실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뿐. 근데 이상하게 마음에 위안이 됐다. 의사 선생님이 '당신은 우울증입니다!'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신은 정상입니다!'라고 단정 짓지도 않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그럴지도, 나이를 들면 그럴 수도 있어요. 당신만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오늘은 좀 괜찮은 것 같다 하니 약은 처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에도 또 그러면 고민하지 말고 다시 방문하라 했다. 


병원을 나온 후 마음이 개운했다. 특별히 치료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힘들 때 혼자 속으로 끙끙 앓지 않아도 되는구나란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도 우울감이 찾아온 적이 꽤 있지만 병원을 찾지는 않았다. 아직은 정신건강의학과란 문턱이 내게는 높은 듯하다. 


그래도 이번에 깨달은 것은 있다. 우울함은 시간이 약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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