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 그리고 라깡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격언처럼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우리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이것은 일견 남들 사는 대로 산다는 말을 멋지게 포장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좋은 직업을 갖기를 원하며 남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물건을 욕망하여 구입한다. 또는 우리가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남들이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염탐하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가 무엇인지, 핫한 장소는 무엇인지,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의 욕망을 결정하기 힘들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타자)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알기 위해 둘러본다.
이것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물었을 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답변에 대한 일상적인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일상적인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라깡이 이야기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전부가 아니기도 하다. 우리는 이 문장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욕망하는 주체이고 그렇기에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타자'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라깡이 '타자'라는 단어를 쓸 때에는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먼저 가장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로서의 타자가 바로 글의 초두에서 언급한 타자이다. 이 타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타자들을 일컬으며, 다른 타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소타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직장 동료, 학교 동창,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각종 인플루언서들, 연예인들, 모두 다 실체가 있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 타자이다.
그렇다면 다른 '타자'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 라깡에게는 소타자와 구분되는 '대타자 Autre'라는 개념이 있고 이 '대타자'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이 문장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대타자에게는 실체가 없다. 실재로 존재하되, 실체는 없는 것이다. 응시와 목소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로 감각할 수는 있지만 내 친구나 직장 상사처럼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 삶에 출현하는 타자는 아니다. 바로 이 대타자가 소타자들의 욕망을 결정한다. 무엇이 따라야 할 욕망인지 무엇이 금지되어야 할 욕망인지를 결정하는 실체 없는 권력의 타자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을 라깡이 했을 때, 여기서의 타자는 엄밀히 말해 '대타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주변을 살피고 광고를 보면서 남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살필 때, 그 '남들의 욕망'을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결정하는 권력을 대타자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은 '마른 몸'을 선망한다. 왜 마른 몸을 지향하는가를 물어 본다면, 마른 몸이 예뻐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는 많은 사람들이 마른 체형을 좋아하기 때문에 살을 더 빼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의 근원은 어디인가? '마르면 마를수록 아름답다'라는 기준을 우리는 어디에서 부여받은 것인가? 이 생각은 너도 하고 나도 하는 생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각도 너의 생각도 아니다. 마른 연예인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동경한다. 그리고 마른 연예인은 사람들의 사랑과 동경을 받기 위해 살을 뺀다. 이상적인 몸매에 대한 생각은 대중들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연예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의 주인이 바로 대타자이다.
대타자에 의해 강요된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는 만족이 없다. 막 배달 온 택배 상자를 뜯을 때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지는 만족감처럼,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불만족으로 가득하다. 다시 사라진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고 유행에 맞춰 옷을 사는 행위를 반복하며, 비슷비슷한 넷플릭스 시리즈를 돌려 본다. 어찌 보면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참으로 핍진하고 공허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깡의 정신분석이, 벗어날 수 없는 핍진한 삶의 굴레를 이야기하는 데에서 그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지만, 이것을 고유한 나의 것으로 밀고 갈 수도 있다. 나만의 고유한 욕망을 발명해야 한다는 말이, 세상에 없던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발명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 속에서 나만의 욕망을 추구해 나갈 수 있다. 라깡이 정신분석가로서의 욕망을 추구했던 방식이 그렇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이미 만들어 놓은 정신분석이라는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타자의 욕망을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라깡은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프로이트 역시도 정신과의사라는 직업에서 정신분석을 파생시켰다.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은 현재에서 보자면 전혀 다른 것이지만 정신의학이라는 타자적 학문 안에서 새로운 변주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역시 타자의 욕망에서 출발해 자신의 욕망에 도달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타자로부터 촉발된 욕망을 어떻게 나의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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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정신분석에서 욕망이란, 우리의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연쇄를 일으키는 무엇이다. 단 한 번으로 만족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옷을 사고 사고 또 사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구매하게 된다. 유행은 계속해서 바뀌고 한때는 나에게 만족을 주었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만족을 주지 못하고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을 라깡은 '환유'라고 부른다. 문학적인 수사법으로서의 환유와는 다른 의미로서의 환유로, 끊임없이 연쇄되는 작용이다.
이러한 욕망을 흔히 '타자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나의 욕망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유행과 흐름을 따라서 매번 새로운 것처럼 등장하지만 같은 종류의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욕망이 이런 타자의 장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통용되는 지점을 넘어서까지 무언가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경우를 우리는 이따금씩 보게 된다. 라깡이 많이 드는 예로서 안티고네가 그러하다. 크레온이라는 왕이자 삼촌이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 안티고네는 오라버니의 시신이 땅에 묻히기를 욕망한다. 가족의 시체가 매장되기를 원하는 것은 보편적인 욕망이지만 반역자인 오빠의 시체를 묻고자 하는 것은 금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그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티고네의 고유한 욕망이고(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나는 타자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승화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타자의 욕망을 그러한 수준으로까지 추구할 수 있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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