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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은 Jan 26. 2023

미드소마와 하이데거

스포 (O)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읽으면 나도 모르게 영화 '미드소마'를 떠올리게 된다. 미드소마를 볼 당시에는 하이데거를 떠올리지 않았는데, 하이데거를 읽어 나가면 읽어나갈수록 이 생각이 점점 더 자주 떠오른다. 영화는 가족을 상실한 한 여인이, 남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의 작은 마을로 가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장르는 공포영화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기보다는 어떤 점에서 하이데거가 떠올랐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룰 예정인데, 그럼에도 이 이후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란다.


영화의 주인공 대니는 동생과 부모를 잃고 불안에 시달린다. 그러다 원래는 남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친구들만 가기로 했던 스웨덴의 작은 마을로의 여행에 대니도 함께 가게 된다. 그러나 결말에 가면 대니와 그 마을 출신이라던 펠레,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일행들은 죽고, 살아남은 대니는 (펠레처럼) 그 마을의 일원으로 동화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불안이라는 정서


내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대니의 불안이었다. 원래도 대니는 고질적으로 불안을 겪는 인물인 듯 하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겨진 시점에서 불안과 우울은 극도로 치닫게 된다. 애써 괜찮은 척 하지만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혼자 슬픔과 불안과도 같은 정서를 홀로 달랜다.


그리고 불안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기분이다. 흔히 실존적 정서라고 불리는 것인데, 현존재(현존재는 쉽게 말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자를 일컫는다)를 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로 이끄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왜 불안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서구 철학에 대한 내용을 알 필요가 있다. 플라톤 이래로 인간이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해진다. 감각을 통한 길과 사유를 통한 길, 이 두 가지이다. 그러나 눈앞에 대상으로서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함' 또는 '존재하기'는 감각과 사유를 통해 접근할 수 없다는 게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존재함과 존재하기는 동사적인 형태이지 눈앞의 고정된 대상/명사로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삼의 길을 모색해야 하고, 하이데거는 그것을 기분, 불안이라는 정서로 제시한다.


현존재는 일상성을 살아가는 존재자이다. 일상성은 비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이고 흔히 '세인' 또는 '그들'이라고 번역되는 'Das man(다스 만)'의 자리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함으로부터 도망쳐 일상성 속에 '빠져' 지내게 되는데,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본래적인 존재함은 끊임없이 자신의 '있음'을 알려온다. 이 알려옴의 정서가 바로 불안이다. 현존재는 그들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대니가 도심 속에서, 남자친구와 그 친구들과 함께 있음에도 불안을 느꼈던 것처럼.

부가적으로 하이데거는 불안과 공포를 구분하는데, 불안에는 대상이 없고 공포에는 대상이 있다. 불안은 내가 처해 있는 곳이 일상적인 장소이고 비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임을 알려주는 정서이기 때문에 대상이 없다. 또한 우리가 세계 속에 빠져 있고 내던져져 있는 사태에 어떤 근원적인 본질이 없다는 점에서, 지반이 없다는 점에서 불안을 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나타난 공동존재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의 각기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고유한 나의 존재 물음에 대해 던지는 것에서부터 현존재는 출발하는데, 현존재의 존재함은 동시에 공동존재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적인 주체처럼 세상과 동떨어져서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 느끼는 고립감이란 타인과 함께 있는 감각을 먼저 전제하고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통찰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악신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등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은 이미 현존재가 세계 내에 있고 다른 이들과 공동존재를 이룬다는 것을 전제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즉 현존재가 하나의 고립된 존재자로 먼저 출현하고 그다음에 이차적으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함의 방식인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세인/그들'과 더불어 있는 비본래적인 일상성 역시도 '그들'이라는 타자들과 함께 있다는 점에서 공동존재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그들'은 비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이고, 이 비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를 변양하여 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로 가야 한다.(주의해야 할 것은 하이데거가 비본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현존재의 일상성, 빠져있음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한 양태일 뿐이며 우리는 일상성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본래적인 존재함의 자리가 바로 '민족(Volk)'이다. 공동존재에 그들/세인과 민족이라는 두 가지 양태가 있고 그들/세인은 비본래적, 민족은 본래적이라고 단순화해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그러나 이런 단순화한 구분이 전부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영화 미드소마 속에 나오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를 하이데거의 민족 개념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 존재를 이룬다. 영화를 보았다면, 대니의 남자친구가 마을에 있는 한 여성과 성관계하는 장면을 보고 대니가 오열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을의 여성들은 대니와 함께 오열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가 감정이입(후설은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감정이입이라고 보았다)이 아니라 공동존재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하이데거의 논의는 영화 속 장면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영화 끝무렵 마을 구성원이 된 대니는 이제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다면, 스웨덴 작은 마을의 사람들 속에서 대니가 본래적인 존재함을 구성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타민족, 외부인에 대한 배척


그러나 본래적인 공동존재인 '민족'이 타자를 다루는 방식은 폭력적이다. <존재와 시간>은 위대한 통찰을 담은 작품이지만, 동시에 이 철학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결탁되기도 했다. 유대인은 '민족' 안에서 함께 공동존재를 이룰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화 미드소마에서 이 공동체가 외지에서 온 이방인을 다루는 방식 역시도 폭력적이었다. '민족' 내부의 규율과 전통은 외부인에 대한 살해를 정당화한다.(물론 그 민족 구성원 중 생애 주기를 마친 노인도 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여기까지가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바라본 영화 미드소마에 대한 해석이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테지만 커다란 맥락으로 분절해서 바라본다면 영화 미드소마가 하이데거의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특히 그의 이론이 어떻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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