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괴롭힌다. 이것은 실제로 지은 죄에 달라붙어 우리에게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어떤 ‘의도’를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물론 나의 죄가 아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보여지는 인류 전체의 원죄에 대한 죄책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길티 플레져 guilty pleasure라는 말이 있듯, 죄책감에는 일종의 쾌락이 동반된다. 죄책감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금지된 것을 향유하거나 욕망했기 때문이다. 법은 우리가 즐겨도 되는 쾌락과 즐겨서는 안 되는 쾌락을 구분하며, 법 너머의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일에는 죄책감이 따른다. 예컨대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이 과도하게 게임이 주는 쾌락에 몰두하거나, 나를 희생하는 대신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할 때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아담의 원죄와 그에 따른 죄책감 역시도 금지된 사과, 선과 악의 구분이라는 지적 쾌락을 선사하는 사과를 탐한 것에서 비롯되듯이 말이다. 이처럼 죄책감의 이면에는 쾌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금지를 행하는 이는 ‘누구’이고, 금지된 것 너머의 쾌락을 향유하는 이는 ‘누구’인 것일까? 우리에게는 금지된 쾌락을 누리는 예외적인 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 많은 문화에서는 이것을 신으로 제시할 테지만, 정신분석은 ‘아버지’로 제시한다. 이 아버지는 실제 가족 관계 안의 구성원인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통용되는 규범을 제시하고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구분해 주는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아버지이다. 정신분석에서 아버지라는 개념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아버지의 억압으로부터 쾌락/주이상스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프로이트보다 라깡의 논의에서 이 부분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쾌락이 원래 있고 그것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억압이 행해지는 순간 여기에 금지된 쾌락이 있게 된다. 이 부분을 라깡의 개념어를 사용하여 설명해 보자면, 충동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으로 구성된 언어-상징계가 쾌락(충동)을 표지함과 동시에 쾌락이 생겨나고 그 쾌락에 대한 억압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없으면 충동도 없다. 인간의 충동은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함께 출현한다.
이번 글에서는 죄책감과 쾌락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주관하는 아버지에 관하여 프로이트와 라깡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억압 없는 만족, 혹은 죄책감 없이 금지된 쾌락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논하기 위해서이다. 상징계 내의 허용된 쾌락은 우리의 진정한 쾌락이 아니며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 하기 때문에 우리는 허용되지 않은 쾌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위반의 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못하고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을 또한 분명히 존재하며 라깡의 정신분석은 이러한 자들을 겨냥한다.
정신분석에서 설명하는 죄책감, 쾌락, 아버지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프로이트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삼각형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에 꽤나 익숙한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논의를 주체의 수준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확장시켜서 인간 사회에 적용시키고자 했고, 이러한 시도는 1913년도에 출간된 「토템과 터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죄책감을 넘어 사회적 금기와 그에 대한 복종, 그리고 사회적 법에서 기인하는 죄책감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의 기원』에 수록된 텍스트인 「토템과 터부」를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간략하게나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도를 정리해 보자. 아이는 어머니를 욕망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남자아이는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고 공격성을 보이는데, 동시에 이 공격성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거세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다. 이 위협에 굴복한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아버지처럼 되어서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갖고자 한다. 여자 아이의 경우 거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역시 거세되어 있는 어머니처럼 아버지와 같은 사람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가족 관계 내에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중요성은 바로 ‘동일시’에 있다. 아이는 이 삼각형 구도 안에서 동일시를 통해 성 역할을 습득하고 각각의 성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추구하는지를 배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아이의 성별에 상관없이 아버지와 동일시를 일으킬 수도, 어머니와 동일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연구를 마무리 지으면서 나는 종교, 도덕, 사회, 예술의 기원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집중되어 있다는 주장을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1]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버지는 종교, 도덕, 사회, 예술의 기원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토템과 터부」에서 ‘부친 살해’라는 테마가 다루어진다. 원시 부족 사회에는 모든 여성과 쾌락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식들에게는 이 쾌락과 향유를 금지하는 ‘아버지’가 있다. 이 아버지를 ‘원초적 아버지’라고 부른다. 독재적이고 전능하고 폭력적인 원초적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선망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형제들은 여성과 쾌락을 독점하고 있는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리고 살해한 아버지를 섭취함으로써(프로이트는 이 원시 부족이 식인을 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아버지와 일체화를 성취시키고, 각자 아버지가 휘두르던 힘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동화”[2]시킨다. 아들들이 모든 것을 누리던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권력을 나눠 먹음으로써 쾌락을 금지하던 이가 사라졌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발생한다. 자식들은 권력욕과 성욕이 막강한 폭군이었던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했기 때문이다. 부친을 살해함으로써 자식들이 가지고 있던 증오가 해소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공격 행위를 통해 증오심이 만족되자, 이번에는 사랑이 공격 행위에 대한 후회의 형태로 표면화했다. 사랑은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초자아를 확립했고, 마치 아버지에 대한 공격 행위에 대한 처벌이라고 되는 것처럼 그 초자아에 아버지의 권능을 부여했다. [3]
이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를 살해한 것에 대한 죄의식이 생겨나고, 죽은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강력한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죄의식으로 인해 자식들은 죽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행하던 금지와 법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사후 복종(nachträglichen Gehorsam)이라고 부른다. 금지와 법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은 원초적 아버지를 살해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죽은 아버지는 무의식 속에서 우리에게 법을 강제하고 이것이 바로 내면의 초자아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 범죄 행위로부터 사회 조직, 도덕적 제약, 종교 같은 것들이 비롯되었"[4]다고 보는데, 이러한 내용은 실제로 원시 부족에서 발견된 사례라기보다는 사회적 법과 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가설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바라본 쾌락과 죄책감의 관계는 원초적 아버지의 살해와 관련이 있다. 모든 쾌락을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들에 의해 살해가 되었고, 죄책감을 느낀 남자 형제들은 아버지의 금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강박증 환자의 사례에서 놀라울 정도로 양심적이거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증상이 사실 무의식에 잠복해 있는 유혹에 대한 반작용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5] 즉 아버지가 누렸던 쾌락, 금지된 쾌락에 대한 유혹이 있고 그것에 대한 저항이 죄책감이라면, 죄책감을 느끼는 자는 쾌락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자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원초적 아버지는 쾌락의 담지자인 동시에 살해당함으로써 문명화된 인간의 무의식에 초자아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자아는 끊임없이 여기에 쾌락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죄책감이 있는 곳에는 금지된 쾌락이 있다.
라캉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 Le nom-du-père’으로 대변된다. 프로이트에게서 죽은 아버지가 내면의 초자아로 자리 잡는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이트의 원초적 아버지는 상상계적인 측면이 강하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론」(1914)에서 ‘자아이상’[6]라는 개념을 언급하면서 이 ‘자아이상’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향하는 이상적인 자아라고 설명한다. 자가 성애의 형태로 모두 자아에게로 향하고 있던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은 외부의 대상으로 향하게 되면서 분화가 되는데, 모든 리비도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리비도도 남게 된다. 이 자아 리비도는 완벽하지 않은 현실의 자아 대신 완벽한 이상형이라 할 수 있는 이상적 자아로 향하게 되는데, 이 이상적인 자아는 이후에 부모와 사회적 언어로부터 주입된 규범으로 자아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자아이상’은 이후 「자아와 이드」(1923)라는 논문에서 초자아로 발전하며, 앞선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초자아는 내면화된 죽은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깡의 아버지는 이러한 상상계적인 면모보다는 상징계적인 측면이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은 아이를 분리시키면서 상징계 내의 주체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고 이것은 아이가 자기 자신을 어머니의 남근으로 여김을 의미한다. 아이 또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쾌락을 탐닉하지만, 아이는 어머니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는 주체로 나아갈 수 없다. 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남근이 아님을, 어머니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깨닫고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쾌락을 포기함으로써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라깡은 이 거세/억압의 과정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기표로 대체되면서 억압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을 ‘부성적 은유 métaphore paternelle’을 라고 부른다. 은유란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것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성적 은유란 어머니의 욕망(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욕망인 동시에 어머니를 향한 아이의 욕망이기도 하다)이 기표로 대체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의 욕망을 대변하는 기표인 S1은 아버지의 기표인 S2에 의해 억압 및 대체되고 S1의 의미는 원초적 공백으로 남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느끼던 만족과 쾌락을 아이는 상실했다. 이 상실을 채우기 위해 아이는 기표 연쇄의 환유 속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공백으로 남겨진 어머니의 자리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채 주체 안에 잔존하게 된다. 채울 수 없는 결여로서 등장하는 S1은 주체에게 불만족을 안기며 끊임없이 이 결여를 채울 대상을 찾아 욕망의 세계 안을 배회하도록 만들지만, 또한 동시에 S1은 상징계를 벗어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상징계 안에는 결여를 채울 기표가 없으므로. 그러나 상징계의 바깥(바깥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은 죽음의 장소이기 때문에 상징계를 벗어나도록 하는 S1의 유혹은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한다. 이처럼 인간은 늘 불만족과 불안 사이를 왕복 운동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깡은 우리에게 타자가 장악하고 있는 욕망의 장을 벗어나 불안과 주이상스의 장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한다. 물론 상징계의 안전한 울타리가 없다면 우리는 주체로서 존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상징계를 완전히 이탈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유혹하지만 고통스럽게 만드는 주이상스의 향유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주이상스에 다가서는 일은 우리가 상실한 것을 되찾는 길도 아니고 충만한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길도 아니다. 그러나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나의 고유한 욕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라 할 수 있는 죽음 충동의 유혹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윤리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1] 지그문트 프로이트, 「토템과 터부」, 『종교의 기원』, 열린책들, 2020, p243.
[2] 「토템과 터부」, p223.
[3]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19, p314.
[4] 「토템과 터부」, p223.
[5] 「토템과 터부」, p127.
[6] 라깡은 ‘자아이상(에크리에는 자아의 이상형으로 번역되어 있다)’과 ‘이상적 자아’를 면밀히 구분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둘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라깡에게 있어서 ‘이상적 자아’는 거울 단계에서 선취된 확실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상화된 자아를 의미하며 상상계적이다. 반면 ‘자아이상’은 상징계의 법의 측면이 보다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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