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에 반짝이는 햇발같이
이사 직후 나는 마당을 거닐며 각을 재어보았다.
“어디다 꽃을 심을까? 넝쿨장미와 히아신스, 팬지는 꼭 심어야지”
시골행을 꿈꾸며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 시골의 봄이었다. 내 안에는 꽃만 보면 마음이 즐거워지는 순수함이 없지 않게 있어서 도시에 살 때도 꽃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곤 했다. 꽃집에서 산 꽃은 눈을 뗄 수 없게 아름답지만 오래지 않아 고개를 떨구고 색이 변하니 꽃을 치울 때는 늘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었으니 뿌리 깊은 꽃을 키우며 한 계절 내내 눈 호강을 해볼 생각으로 머릿속에 꽃밭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겨우 1년살이에 욕심내지 말자는 마음이 충돌했는데 그러는 동안 땅이 녹아 잔디와 나무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맞았던 계절 변화가 가벼워진 옷차림이었다면 시골에서의 봄은 돌담에 반짝이는 햇발이 분명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먼발치 소나무 숲길이 보이는데 늘 푸른 소나무라 할지라도 겨울 솔과 봄솔은 분명 달랐다. 디즈니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무가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랄까? 앙상했던 다른 나무들은 더 여실히 봄맞이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록 새순을 가만 바라보면 분명 빛나지 않음에도 눈이 부셔서 건조한 눈알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벚꽃나무가 연한 분홍빛으로 나뭇가지를 장식할 무렵 나는 집에서 두 블록쯤 위쪽에 작은 텃밭을 얻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겠다 싶은 좁은 골목을 두고 그 양옆으로 올레길같이 불규칙한 길들이 여러 집들을 연결하고 있는데 새로 지은 집과 기와를 얹은 흙집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정감 가는 그 예쁜 길 한켠에 내 텃밭이 위치해있다. 땅 주인이 예상 밖의 임대료와 물 값을 불러 잠시 고민했으나 나는 땅을 쓰기로 했다.
윗채 친구네 집에서 큰 삽을 빌려다 5줄 밭고랑을 만들고 상추, 케일, 씨감자, 가지, 고추, 오이, 방울토마토 등을 차례차례 심어나갔다. 그렇게 밭을 오가는 사이 봄은 깊게 내려와 밭일을 하다 보면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도 하고 피부가 벌겋게 타기도 했다. 약 4~5평 될까 싶은 텃밭까지 가꾸게 되니 나는 시골 생활의 정점을 맛본 듯 기뻐졌다. 나는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자발적으로 산책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에서 텃밭 가는 5분도 안 되는 시간이 유일한 산책인데 짧은 그 길을 무척 사랑한다.
텃밭 가는 길 주변 집들은 풀 관리를 위해 마당을 시멘트로 메워버린 마당이 대부분이지만 그 한편엔 반드시 화단이 있고 그곳엔 봄꽃이 피어났다. 특히 개양귀비와 수선화는 고고하고 존귀해 보여서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주홍과 노랑이 어찌나 쾌청해 보이는지 난 남의 집 대문 앞에 서서 그 꽃들을 한참 바라본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꽃구경을 즐기던 그 집이 지난겨울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 중간중간에 빈집들이 꽤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외관이 흉흉해지고 마당에 풀이 무성해지기 마련이라 한 눈에도 눈에 띄었다. 얼마 전까지 사람을 품고 있던 그 집은 봄의 온기가 더해질수록 스산해지고 낡아갔다.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마저 발길을 끊고 나면 주변의 흉흉한 빈집들과 더불어 풀과 벌레에게 잠식당하게 될터였다. 곧 닥칠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개양귀비와 수선화는 꼿꼿하게 피어 본분을 다 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가 이사하시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불부터 장독까지 다 트럭에 실도록 벽돌 사이에 피어있는 맨드라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던 모습이 문득 떠오르며 혼자 남는 개양귀비와 수선화에게 마음이 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더 이상 꽃구경을 하지 않았다. 꽃에게 섭섭하지 않냐고 위로했다가 “나는 가장 위대한 자연의 일부다!”라고 당당해하는 꽃을 보면 내가 더 서운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봄 햇살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희망적이라는 생각은 예쁜 꽃을 사는 습관처럼 소비적인 발상이었다. 빈집을 삽 순간 폐가로 만드는 잔인함이 봄도 꽃도 그저 ‘자연’ 일뿐임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결국 마당에 꽃밭을 만들지 않았다. 내가 심지 않아도 마을에 꽃이 지천인 덕분이 가장 크고 시한부 시골살이를 마치면 다시 빈집이 될 곳에 꽃을 남기는 일이 허무하고 소모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빨래를 걷으면 묻어나는 햇살 향만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뭔가를 가지려고 욕심내기보다는 주변에 당연하게 널린 것에 관심을 가지고 감사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마당 꽃밭 대신에 낮에는 새들의 자장노래를 들으며 달콤한 낮잠을 자고 밤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밤잠을 청하는 시골의 봄 그대로를 즐기기로 했다. 머지않아 파리와의 대소동이 시작될걸 예상치 못한 시절이었다!
다음 편도 꼭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