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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Mar 05. 2022

1/12. 나무 이야기

3월의 글

    자목련 나무가 언제 베어졌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목련 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에 있었다. 자목련은 우리 집 나무들 중 가장 먼저 봄을 알려주는 꽃이었다. 덕분에 나는 상대적으로 흔했던 백목련보다 자목련 나무를 먼저 알았고, 보라색이라기엔 붉고, 분홍빛이라기엔 푸른 그 오묘한 색깔을 자목련 나무 덕분에 배웠다. 목련에도 향기가 있다던데, 그 향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에 내 손 만한 자목련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향기를 맡았던 것은 기억이 난다. 보드라운 꽃잎이 아까워서 책 사이에 끼워봐도 예쁘게 말리기가 쉽지 않은 꽃이었다. 그냥 그렇게 떨어지는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예쁜 꽃.

    그때에 우리 집 마당에는 온갖 나무들이 있었다. 철제 초록색 대문을 열면 제일 먼저 단풍나무가 보였다. 키가 크진 않지만 가지가 길고 넓게 뻗어 있어 긴 그늘을 만들어내는 나무였다. 여름에는 단풍나무 그림자 아래에 내 몸의 절반이 들어갈 정도로 큰 빨간 고무 다라이를 두고 거기에 물을 받아 물놀이를 했다.

    단풍나무 뒤로는 앞서 말했던 자목련이, 그리고 자목련의 뒤로는 엄마가 좋아했던 파란 수국이 있었다. 수국의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꽃잎들을 하나씩 떼어내 인형 손에 쥐여주면, 딱 맞는 크기의 한 송이 꽃이 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수국 나무 옆으로는 마당을 가르는 작은 길이 나 있고 그 위에는 할아버지께서 세심하게 려놓은 디딤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과실을 맺는 나무들의 구역이었다. 그중에서도 앵두나무는 우리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무였다. 수국처럼 앵두도 인형 놀이를 할 때에 아주 유용했다. 내 손톱만 한 앵두 한 알이 인형의 손에 들어가면 사과가 되었다. 그렇게 갖고 놀던 앵두알들은 전부 인형이 아닌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그냥 기르는 나무인지라 달리 농약을 치진 않았기에 앵두나무엔 늘 벌레가 많았고, 겁이 많은 나를 위해 할아버지는 늘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앵두를 한 아름 따 두셨다. 우리 집 바로 맞은편으로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초등학생인 내 걸음으로 딱 스물일곱까지 세면 학교 후문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동네에 유일하게 있던 아파트와, 그 앞에 있던 버스 정류장은 정문보다는 후문을 통해서 가는 편이 빨랐기에,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등하굣길에 반드시 우리 집 앞을 지나쳐야 했다. 6월이 되면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 집에 들러 참새처럼 앵두를 먹었다. 내가 없을 때에 친구들이 찾아와도 앵두를 먹을 수 있도록 할아버지는 예의 그 파란 바가지에 앵두를 담아 밖에 두셨다. 그렇게 몇 번을 해도 될 만큼 앵두는 넉넉하니 인심 좋게 열렸다.

    앵두나무 앞에는 거봉 나무가 있었다. 내 고향은 포도 재배로 유명한 소도시였고 지천에 포도밭이었기에 어린아이들도 포도나무가 어떤 건지, 포도가 자라는 모습은 어떤지 알았다. 고향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다른 지역보다 수확 시기가 일러서 시장 출하가 빨랐다. 주력 품종의 포도가 출하가 되고 나서 느지막이 우리 집 거봉은 색이 짙어졌다. 앵두를 먹으러 온 친구들이 "포도나무도 있나?"라고 하면 "거봉 나무라", "청포도 나무야?"라고 물으면 "거봉 나무라, 아직 덜 익은 거라"라고 말하며 똑똑한 척을 하곤 했다. 안에 있는 과육만 쏙 빼먹고 껍질은 홀랑 버리면 되는 일반 포도완 달리 거봉은 껍질을 일일이 손톱으로 벗겨내야 했기에 귀찮기도 했지만, 나는 사실 포도보다 거봉을 더 좋아해서 우리 집 거봉이 빨리 익기를 기다렸다. 단 한 그루 있는 거봉 나무에서 마지막으로 얻은 거봉은 줄곧 추석 차례상에 올라가곤 했다.

    거봉 나무 뒤로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납작하면서 둥근 보통의 감이 아닌 길고 통통한 모양의 대봉감이 열리는 나무였다. 나무가 너무 커서 이웃집과 우리 집 사이를 가르는 담벼락을 넘어갈 정도였다. 가을이면 이따금씩 나무가 대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툭 떨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곧이어 아까워하는 할아버지의 탄식이 들려왔다. 땅에 떨어진 거 안 먹는다고 나는 도리질 쳤지만, 할아버지는 흙이 묻은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맛나게 잡수셨다.

    사계절 내내 푸른 사철나무와, 잎이 바늘처럼 뾰족한 향나무도 있었다. 색이 화려한 꽃이 피지도, 맛있는 열매를 맺지도 않지만, 항상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어줬던 나무들이었다. 우리 집은 지어지던 당시 유행이었던 붉은 벽돌집이었는데, 향나무와 사철나무의 짙은 푸름과 붉은 벽돌의 대조가 보기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미. 장미는 우리 집 벽을 채우고 향나무를 넘어 아치 모양으로 된 뒷문까지 덩굴을 휘감고 피어났다. 그래서 장미가 만발한 늦봄에서 초여름 즈음의 우리 집이 제일 예뻤다. 오래된 붉은 벽돌집에 피어난 그 생기가 좋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장미가 요긴하게 쓰인 적도 있었다. IMF로 아빠 사업이 부도가 나고 가계가 최악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IMF가 뭔지, 부도가 뭔지 어음은 또 뭔지, 어른들의 사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퇴직을 앞둔 산신령처럼 짙고 긴 눈썹을 가진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보자마자 "니 혹시 *** 아나?"하고 물으셨는데, 알고 보니 삼촌이 이 학교를 다녔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내 성이 한 학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성이라 바로 알아봤다고 하셨다. 그 인연 때문인지 선생님은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두루 다정한 정말 신선 같은 분이셨다. 성함이 "달수"여서 아이들이 "수달"이라고 불렀던 선생님을 나도 많이 좋아하고 따랐다. 그렇게 스승의 날이 다가왔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촌지를 찔러 넣는 부모와 역시나 시치미 떼고 받아먹는 선생이 있던 시절이었고,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께 선물을 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선물을 사 간다는 친구들 말에, 나도 엄마에게 가서 선생님께 선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집이 너무 어려워서 엄마도 밤낮으로 푼돈을 버는 일에 뛰어들었던 때에 선생님께 선물을 할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엄마는 고민을 하다가, 우리 집의 장미가 예쁘게 피었으니 그걸로 꽃다발을 만들어 드리자고 했다. 엄마는 특별히 더 예쁘게 핀 장미들만 꺾어다가, 솜씨 좋게 색깔 포장지로 꽃다발을 만들고 리본을 묶었다. 그리고 꽃 사이에,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도 꽂아주었다. 사실, 내 기억은 여기까지다. 그냥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우리 집 장미로 꽃다발을 만들어 선생님께 드렸다, 이게 다였다. 그런데 한참, 한참이 지나서 어느 날, 엄마가 그때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응 기억하지, 엄마가 초록색, 보라색 포장지 핑킹가위로 잘라서 꽃다발 만들었잖아."


    "그거 말고, 니가 그날 선생님한테 꽃다발 드리고 와서 한 말이 기억나느냐고."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날 내가 하교하고 집에 오자마자 엄마한테 자랑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께 꽃다발 드리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선생님께서 엄마의 편지를 읽어보시더니, 반 친구들에게 내가 드린 꽃다발을 보여주면서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좋은 선물을 못 드리고 집에서 기른 장미로 손수 만든 꽃다발을 드린 사정이 적힌 편지 내용을 어렸던 내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내 선물을 제일 좋아했다고 기뻐만 했다. 혹시나 집에서 직접 만든 꽃다발을 가져왔다고 주눅 들까 봐 걱정했던 그 사려 깊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 다정함을 알았을 때엔 이미 우리 집 벽을 수놓던 장미는 없어진 뒤였다.

    우리 집 마당에는 온갖 나무들이 있었다. 그 나무들 덕분에 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색을, 계절을, 향기를 배웠다. 그러나 이제 그 나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둘씩 없어졌나? 아니, 한꺼번에 다 없어졌던가? 향나무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던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무는 거기에 있었는데, 나무의 끝은 이상하게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무가 없어졌듯이, 사람도 집을 떠났다는 것. 나무가 없어졌듯이, 우리 집에 흐르던 넉넉함도, 여유도, 인정도 다 말라버렸다는 것. 그래서 서글프고, 서글프니까 집을 찾지 않게 되고,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죄책감과 부채감만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리고 나서야, 한 때 우리 집을 가득 채우고 나를 가르치고 놀아주고 먹였던 나무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나무가 가득했던 만큼이나 행복했던 그때를 기록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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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 작가님 못 본 지 150일이 지났습니다, 라는 눈물 젖은 알림을 보고서야 드디어 글을 하나 남기네요. 올해의 목표는 제 생일인 오늘..이 벌써 지났네요, 아무튼 3월부터 다음 해 생일까지 매달 글을 한 편씩 쓰는 것입니다. 이 글은 그 프로젝트(?)의 첫 번째 글이지요. 저는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는 수필을 썼던 사람인데요, 이런 글을 안 써본 게 글을 썼던 세월만큼이나 되었습니다. 그때보다 나이는 곱절을 더 먹었는데, 과연 그때만큼 글을 쓸 수 있을지...

 컨디션이 따라 준다면 한 달에 두 편을 써도 좋겠지만, 아마 논문과 병행해야 하니 한 달에 한 편도 충분히 버겁지 싶어요. 일단 저는 꾸준히 뭔갈 하는 걸 잘 못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한 편 썼습니다. 4월에도 또 쓸 수 있길. 만약에 5월까지 써서 글이 세 편 쌓인다면 사람들에게 보러 오라고 자랑할래요.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일어나서 자꾸자꾸 보면서 수정하고 퇴고하도록 하겠습니다(글을 뭐 이렇게 써?). 그래도 오랜만에 글을 쓰니 기분이 좋네요. 계속 글 남겨서 브런치가 울면서 작가님 어디 갔냐고 하지 않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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