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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29. 2019

배가 아니라 마음이 고팠었네요

오늘 하루 마음이 고팠을 당신에게

01. 늦은 밤, 냉장고 문을 여는 이유


우리 집에서는 가끔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엄마이다.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지는 시각은 저녁 시간을 지나 하늘이 한 뼘 더 깜깜해질 무렵. 때때로 엄마는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입맛이 없다며 밥그릇에 밥을 정말이지 쥐 씨알만큼 담아 먹곤 한다. 밥 한 숟갈, 반 찬 몇 젓가락, 국 한 숟갈, 식사 끝. 그럴 때면 회사에 있는 동안에도 썩 영양가 있는 식사를 잘 챙겨 먹지는 않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쿵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러한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10분이 채 되지 않아 엄마는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게 없나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약 15분 정도의 간격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어쩔 때는 콜라비 5조각을 꺼내 먹기도 하고, 어쩔 때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은 채 다시 냉장고 문을 닫는 등의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분명 입맛이 없다고 밥은 숟가락을 스치듯 먹어 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냉장고를 열어 먹잇감(?)을 찾는 이 모순된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신기함과 놀라움, 호기심이 일곤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컨디션이 안 좋거나 기분이 좀 메롱일 때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울컥 짜증이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저녁을 좀 잘 먹지, 왜 자꾸 냉장고 문은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건지 원'이라는 말을 삼키며 말이다.(막상 글로 써 놓으니 다소 싹퉁머리가 없어 보인다. 반성해야겠다.)


몇 주 전에도 역시 엄마의 모순된 행동이 나의 눈에 포착되었고, 나는 도대체 평소와 오늘 같은 날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이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날은 엄마의 기분이 유독 다운되어 있던 날이었다. 춘천에 계시는 외할머니의 건강이 조금 안 좋아지셨기 때문이었다. 연세도 있으신 데다 몇 년 전에는 큰 수술까지 받으셨던 터라 외할머니의 건강은 엄마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 중 하나이고, 때문에 매일 안부 전화를 드리며 외할머니의 컨디션과 건강 상태를 체크하곤 한다. 그런데 그날은 외할머니께서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마의 미스터리 한 행동이 보이는 날에는 그날과의 공통점이 있었다. 회사에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렸다거나, 외할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거나,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이러저러한 일들로 어딘가 마음 한 켠이 헛헛할 때, 그러한 모순된 행동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아, 어쩌면 엄마는 배가 아니라 마음이 고팠었을지도 모르겠구나.'     

Photo by Maxim Shklyaev on Unsplash

02. 애교가 많은 타입이 아니라


아쉽게도 나는 애교가 썩 많은 타입이 아니다. 이렇듯 엄마가 마음이 좀 헛헛한 날에는 "엄마, 힘내세요~ 지수가 있잖아요~ 뿌잉뿌잉"하는 애교도 부리고, 옆에 찰싹 붙어서 아양도 좀 떨고 하면 좋으련만.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것을 보니 애교 알레르기가 있음에 틀림없다.


비록 애교를 뿜뿜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나 나름대로 엄마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한 방안을 하나 강구했더랬다.

바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같이 보기.

뭐 그런 위로 같지 않은 위로가 다 있냐고 어이없어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론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또한 그런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이거나 혹은 이미 본 방송일지라도, 그런 날이면 엄마 옆에 앉아 같이 TV를 보곤 한다. 무뚝뚝한 딸내미의 서툴고, 티 나지 않는 무언의 위로랄까.

Photo by Maria Teneva on Unsplash

03. 마음이 고픈 나, 너, 그리고 우리에게


먹거리는 점점 다양해지고, 많아지는데 이상하게도  갈수록 ‘허기’를 느끼는 사람 또한 점점 느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함께 드니, 참 아이러니하다.

나 역시도 때로는 분명 삼시 세 끼에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끝에 왠지 모를 허기가 찾아오는 날이 있었다. 무언지 모를 불안감과 걱정, 고민과 함께.

그리고 이런 날들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글을 쓰다 보면 비어있던 마음 한구석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면 내가 글을 통해 마음을 채우듯, 나의 글을 읽는 누군가 또한 작디작은 위로를 받거나, 피식하고 웃어 보이거나, 잔잔한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하루 끝에 왠지 모를 허기가 찾아오는 날이면 어느 노래 가사와 같이 '초콜릿처럼 꺼내 먹을' 수 있는, 마음이 고픈 나의 엄마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오늘 역시 생각해 본다.



참, 그리고 엄마.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이따가 스페인 하숙 같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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