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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Apr 07. 2022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결말이 아쉬웠던 이유

'연습'이라는 말의 빈틈

  OTT 플랫폼에서 그때그때 콘텐츠를 골라보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 된 내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아주 오랜만에 방송시간을 고대하며 본방을 놓칠 수 없게 한 드라마였다. 슬러시, 바다, 풀벌레 소리로 그려낸 온통 초록인 여름의 청량함이 좋았고, 솔직하고 용감한 희도와 세심하고 다정한 이진의 교감을 지켜보는 일이 즐거웠다. 그래서 두 사람의 헤어짐 앞에 주책맞게 내가 더 많이 울고 말았다. 혹시 옛 연인이 떠올라 대성통곡하냐며 나를 핀잔주던 내 짝꿍도 소파 귀퉁이에서 눈물을 훔치며 함께 이 결별을 슬퍼했다.



  로맨스 드라마라고 해피엔딩이 의무일 리 없고, 바람과 달리 두 주인공이 헤어져서 마음 씁쓸한 거야 내 사정이니 과몰입한 시청자였던 내가 안고 갈 부분이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상황이 바뀌었을 때, 누군가는 유림과 지웅처럼 견디는 것이고 또 누군가는 희도와 이진처럼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안다.



모든 걸 갖겠다고 덤비던 시절이었다. 갖고 싶은 게 많았다. 사랑도 우정도 잠시 가졌다고 착각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연습이었던 날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그 사랑과 이별을 정의하는 드라마의 시선만은 못내 아쉬웠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금, 그때는 미숙했다며 뒤돌아보는 현재 희도의 인자한 미소 같은 것.


  온 마음으로 누군가를 응원했던, 또 질투하고 사랑했던 10-20대의 시간을 앞으로를 위한 '연습'으로, 사랑과 우정을 가졌다고 '착각'했던 시기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그때를 함께한 이들에 대한, 또 그 시절을 지나온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30대인 내 하루하루가 완숙한 60-70대 노년을 보내기 위한 연습의 시간일 수 없듯이 10-20대의 시간이 현재의 나를 위한 발판쯤으로만 여겨질 수는 없다. 삶이라는 연장선의 지점들을 매일 서툴게 살아내는 우리에게 인생의 한 부분을 단지 성장을 위한 연습 기간으로 제한하는 것은 지금껏 드라마가 공들여 조명해온 시절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드라마가 기획의도대로 IMF를 거쳤던 세대에 대한 찬가라면 그때의 순간들을 눈앞에 데려와주고 감상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뒀다면 어땠을까. 그 빈 공간 없음이 아쉬웠던 것이다. 특별했던 수학여행을 바로 떠올리지는 못해도 없던 일처럼 넘겨버리던 현재 희도의 무심함이 꽤나 서운했던 것처럼.


  




  얼마 전까지 나는 한 여고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했다. 10대 후반의 시간을 나보다 현명하고 치열하게 보내는 아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의 10-20대 시절을 더듬어보는 일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이불킥을 부르는 흑역사와 시간을 되돌려 바꿔놓고 싶은 기억들이 어마어마하지만, 그 시간 속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택했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책임을 지려 열심을 다했음을 이제는 안다. 그때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멋진 사람이었고, 또 어떤 부분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 여전하다. 이를테면 연말정산과 상여금과 주택청약 같은 것들이 지금의 내게 중요한 생각거리가 되었지만 언제나 나의 중심 화두는 사람과 사랑인 것처럼. 그래서 나는 사람이 성장만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어느 날, 수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습관적으로 하던 진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어디까지 했지?"

  그러자 맨 앞에 앉은 단발머리 학생 하나가 뜻밖의 대답을 해왔다.

  "우리,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장난기 반, 감성적인 진심 반인 그 대답에 나도 웃음이 번지고 말았다. 매번 반복되는 수업을 시작하기에 이보다 괜찮은 말이 또 있을까.


  그동안 나는 뻔하게도 수업이 지식을 전달하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수업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는 아이들을, 아이들은 나를 알아가는 시간임을 이 말 한마디로 번뜩하고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의 통찰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음을 다시 또 느꼈다.



  그러니까 삶에서 어떤 순간이나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결국 세상을 매개로 서로를 알아가는 일이다. 어쩌면 그 만남이 끝난 이후에도 우리는 다시 그 시간들을 반추하며 여전히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 아닐까. 오늘의 내가 그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의 느릿한 말투와 섬세한 성정을 기억하고, 그때와는 또 다른 감정으로 마음속에서 그 아이를 만나는 것처럼.


  희도와 이진도 애틋하게 다시 매듭지은 이별 이후에 여전히 삶의 틈 어딘가에서 서로를 기억하며 알아가는 중이기를 응원해본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연습'으로 퉁쳐질 수 있는 '착각'의 순간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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